작가책방(소설181 걷기 예찬 허송세월 - 김훈 산문 / 나남 - 2024. 06. 20. 2부 글과 밥 - 걷기 예찬 살아 있는 인간의 몸속에서 '희망'을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적이다. 아마도 이런 희망은 실핏줄이나 장기의 오지 속과 근육의 갈피마다 서식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인 것이어서, 사유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뿐이다. 몸의 희망을 몸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간극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이런 행복을 '몸과 삶 사이의 직접성'이라고 이름 지으려 한다. 돈이나 수고가 드는 것도 아니지만, 이 직접성의 행복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일상성(속도, 능률) 속에 매몰되어 있다. 추운 겨울 거리의 노점 식당에서 라면을 먹을 때나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수박을 식칼로 쪼갤 .. 2024. 11. 18.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기본 개념 ·「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원제: Man's search for meaning)」 로고세러피의 기본 개념 이제 내가 만든 이 이론에 왜 '로고세러피 logotherapy'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얘기하겠다. 로고스 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세러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이 롱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세러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부르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 2024. 4. 16.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버스가 어찌나 만원인지 그대로 있다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일자 콧수염 기른 인도 남자와 코걸이를 두 개씩이나 한 아줌마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더 숨 쉬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버스 지붕에 앉아서 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버스가 차이 스톱(차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라고 잠시 정차하는 것)을 한 틈에 나는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이미 열 명이 넘는 인도인들과 닭 몇 마리가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가 간혹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서, 나는 지붕 한가운데의 쌀자루 위에 걸터앉았다. 나 말고도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계집.. 2024. 4. 1. 무라카미 하루키 -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무라카미 하루키 -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 아침 시각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에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정오 전이.. 2024. 2. 2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양초 ·「톨스토이 단편선 1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양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라. - 마태의 복음서, 5:38. 이것은 아직 농노가 해방되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랍니다. 그 무렵에는 지주에도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자기도 언젠가는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농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농노 출신으로 갑자기 지주가된, 말하자면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것처럼 귀족의 대열에 끼인 자들만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 사람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귀족의 토지에 그런 마름이 나타났습.. 2024. 1. 22. 아름다운 여름 - 샐비어의 꽃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 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실제로 여름이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내게 진득진득한 소문의 그림자까지 들러붙는 바람에 더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스스로 마네킹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 까닭이었을까 사람들은 뒤늦게 내게 소문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내가 단순한 마네킹의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이 작은 소리에는 민감해지는 반면 꼭 들어야 할 중요한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것이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집중력과도 관계되는 현상이라.. 2023. 12. 1. 루 ru - 인생이라는 싸움에서는 슬퍼하면 진다 ·「킴 투이 - 루」 인생이라는 싸움에서는 슬퍼하면 진다 우리를 현재가 기다리는 곳으로 데려가 준 것은 캐나다에서의 첫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우리 그룹의 베트남 아이 일곱 명을 이끌고 현재로 가는 다리를 함께 건너주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같은 정성으로, 새 땅에 옮겨 심기는 우리를 돌봐주었다. 선생님의 펑퍼짐한 허리, 볼록하게 솟은 풍만한 엉덩이가 느리고 편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우리는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해졌다. 그녀가 새끼 오리들을 이끄는 어미 오리처럼 앞장서서 안내한 피난처에서 우리는 온갖 색과 그림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고마운 선생님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낯선 땅에 온 여자아이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랄 수 .. 2023. 11. 25. 호텔 선인장 - 약 속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약 속 이제, 이 이야기는 곧 끝이 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아파트의 주민들은 차례차례 이사해 갔습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이사한 것은 오이였습니다. 공원을 가로 질러 거리 반대편에 있는, 큰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운동기구를 놓아 둘 충분한 공간이 있고, 주방은 대면식이었습니다. 더구나 목욕물도 시원스레 잘 나와서 오이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래층 방에는 속물과의 신혼부부가, 위층에는 왠지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는 버섯 학자가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고 오이는 생각했습니다. 대층 짐을 옮겨 온 후, 오이는 그 새로운 방에, 2가 언젠가 직장에서 가져 온 해변의 포스터를 붙.. 2023. 9. 20. 호텔 선인장 - 계기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선선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아주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예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열세 살 먹은 수고양이로 건물 주인이 기르는 녀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상당한 멋쟁이로 방탕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낮잠만 자는 늙은 고양일 뿐입니다. 이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면, 실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공간이 있습니다. 우측 .. 2023. 9. 15.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제1장 / 6 답장은 우유 상자에 ·「히가시노 게이고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6 쇼타가 새 양초에 불을 붙였다. 눈에 익은 탓인지 촛불 몇 개로도 방 구석구석까지 환히 보였다. "편지, 안 오네?" 고헤이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이렇게 간격이 길었던 적이 없는데, 이제 편지 안 하려나?" "이제 안 할 거야" 쇼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혼을 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기가 죽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야. 그리고 어느 쪽이건 편지 따위는 다시는 쓰고 싶지 않겠지."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쓰야는 쇼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도 너하고 똑같은 마음이고, 그 정도는 써 보내도 괜찮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써 보냈으니까 답장이 안 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2023. 8. 28. 사뮤엘 스마일즈 - 1. 인격의 힘 ·「사뮤엘 스마일즈 - 인격론」 인격의 힘 인격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본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상의 인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진실로 훌륭한 사람들... 근면한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 자제력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실한 사람들... 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하며 본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선한 것들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들 덕택이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천재성은 항상 감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천재성만으로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존경심을 부러 일으키는 것은 인격이기.. 2023. 8. 3. 아름다운 여름 - 그의 기록 2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그의 기록 2 그날 나는 오전 10시 무렵의 텔레비전 뉴스를 귓가로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주부 대상의 시간대라서 그런지 앵커는 30대 후반의 여자 아나운서였지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나는 누나가 걸레를 들고 가까이 다가와 바닥을 닦으려 하자 두 발을 모두 소파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내 앞에 엎드린 누나의 오른쪽 어깨가 문득 눈에 들어 오더군요. 습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는 그 우울한 어깻죽지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마흔이 넘어버린 누나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때, 브라운관 안에서 초등학교 교사처럼 이상 고온 현상을 친절히 설명하던 부드러운 목소리를 제치고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 것입니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해드립니다.라.. 2023. 8. 1. 그레고리 맥도널드 - 1 플레치 ·「그레고리 맥도널드 - 플레치」 1'이름은' '플레치' '정식 이름은' '플래처' '성은?' '어원' '뭐라고요?' '어원, 어원 플래처요. 아는 사람들은 보통 플레치라고 부르죠' '어원 플레처,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일단 애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하면 천 달러를 주겠소. 그리고 만약 내가 제시하는 얘기를 거절하고 싶다면 그냥 천 달러만 가지고 가시오. 그 대신 우리끼리 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면 절대로 안 되오. 됐소?' '혹시 범죄 아닙니까? 요컨대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소' '어쨌든 졸습니다. 천 달러를 준다는데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죠. 도대체 뭡니까?' '나를 살해해 주시오' 모래 묻은 검은 구두가 동양풍의 양탄자를 가로 질러.. 2023. 7. 13. 아름다운 여름 - 푸른 노트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푸른 노트 이 스튜디오에 처음 들어서던 날의 그 어둠을 기억한다. 한낮의 햇살 같은 조명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데스크, 그 주변을 포위해 들어오는 검은 실루엣,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말없이 나를 압도하던 어둠…… 그때 그 시간을 기록해둔 필름에 크로마키 기법이 사용된 걸 보면 데스크 뒤에 파란색 배경 판이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엔 감감하기만 하다. 묵직한 카메라와 모니터 따위가 어울려 자아내던 금속성의 분위기 역시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때 본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뿐이다. 9년 전 입사 시험 때였다. TV 주조 성실의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스튜디오의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나는 그.. 2023. 7. 12. 120% COOOL - 다이어트 코크 ·「야마다 에이미 - 120% COOOL」 사랑을 잃을 때 나는 그 직전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 하면 그럴 때 반드시 내 귀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귀의 고막이 무거워지면서 이상한 현실이 느껴진다. 온 세상에 울려 펴지는 모든 소리의 혼란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이 귓전에서 무너져서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마음의 한 부분에 달라 붙는다. 소리는 선별되고 그것을 튕긴다. 그러면 나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랑을 잃기 전에 내 귀는 언제나 이런 소리를 골라 낸다. 술잔을 들었을 때는 얼음의 맑은 소리만이 들린다. 재즈를 들을 때는 왠지 색스폰 소리만 귀에 들어온다. 슐슐. 즉 찰리 파커를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나의 사랑 편력은 다양해진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 2023. 7. 9. 豫言者 - 2 사랑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 豫言者 예언자」 2 -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 위엔 잠시 정적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안을 땐, 전신全身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 놓을지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 2023. 7. 2. 청소부 밥 - 03 삶에 지쳤을 때는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로저는 컴퓨터 모니터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그 청소부를 만날 시간이었다. 로저의 머릿속으로 지난 일주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청소부를 처음 만났던 지난주 월요일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경영진 접대로 골프장에서부터 칵테일을 곁들인 저녁식사까지 동행하느라 주말에도 쉬지 못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퇴근 전까지 급한 이메일을 완성하려면 아무래도 청소부와의 약속은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로저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로 향했다. 청소부 밥은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녹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밥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그냥 그렇죠. 뭐." 로저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저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2023. 6. 28. 산을 오르듯 나를 경영하라/개혁은 왜 자주 실패하는가? ·「서재경 - 산을 오르듯 나를 경영하라」 산에 들어서면 이미 산이 아니다. 산은 밖에서 보아야 윤곽을 볼 수 있지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나무와 바위와 계곡의 물뿐이다. 사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가 사뭇 다르다. 산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외국에 나가서 생활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개혁은 왜 자주 실패하는가? 개혁의 대상을 밖에서 볼 때는 산의 윤곽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명료해 보이나, 막상 그 현장에 들어가면 마치 산속에 들어온 것처럼 너무도 다른 모습이 펼쳐지기 때문에 밖에서 마음먹은 대로 실천에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p48) 서재경 - 산을 오르듯 나를 경영하라 예지 - 2005. 04. 05. [t-23.06.. 2023. 6. 20.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후기/세상의 길 위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후기 세상의 길 위에서 이 책에 담긴 원고는 각 장 서두에 적혀 있는 것처럼, 2005년 여름부터 2006년 가을에 걸쳐 쓰인 것이다. 단숨에 간추려서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조금 조금씩 써나갔다. '자,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가면서, 그래서인지 그다지 길지 않은 책이지만 쓰기 시작해서 다 마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쓰고 난 다음에도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여행기나 에세이집은 몇 권 냈지만, 이처럼 하나의 테마를 축으로 해서, 나 자신에 대해 정면으로 이야기했던 경험이 별로 없으므로, 그만.. 2023. 6. 17. 칼릴지브란 - 豫言者 / 배가 오다. · 「칼릴지브란 - 豫言者예언자」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 받은 자, 또한 시대의 여명黎明이었던 그는, 올펄레즈 시市에서 열 두 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이윽고 열 두 해째 되던 해, 수확의 달 이엘룰Ielool 초이렛날에 그는 성벽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안개에 싸여 그의 배가 오고 있는 것을. 그러자 그의 마음의 문은 활짝 열리고 기쁨은 바다 멀리 날아갔다. 두 눈을 감고 고요한 영혼으로 그는 기도했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자 그는 문득 슬퍼져 마음 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평화로이 슬픔도 없이 떠날갈 수 있을까? 아니, 영혼의 상처 하나 없이 나는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으리라. 내 여기.. 2023. 6. 12. 청소부 밥 - 02 고독과 피곤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고독과 피곤 로저 킴브로우는 부엌으로 연결된 뒷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어둠이 집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로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지만 너무 피곤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보고서 숫자들과 오늘 오갔던 수많은 대화, 이매일 내용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잠을 자두지 않으면 분명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요즘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생각할 때 늦잠을 자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로저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알람을 6시에 맞추고 수면제를 찾아 한 알 삼켰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두 딸 중 누군가 숨이 넘.. 2023. 4. 20. 청소부 밥 - 한국의 독자들에게.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이미지 다음에서 추천의 글 '청소부 밥'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거울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경쟁과 승리라는 도그마에 빠져 앞만 보고 질주하다 지쳐버린 우리들의 모습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부 밥'은 일상의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 고 '남들이 질주해가니까, 낙오될까 봐, 불안해서 쫓아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대답하는 우리에게 청소부 밥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서두를 필요 없다" 고 '청소부 밥'은 커다란 변하를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강요하며 몰아세우는 법도 .. 2023. 4. 16. · 앤 브래셰어즈-파이어 아일랜드 「앤 브래셰어즈 - 파이어 아일랜드」 [230412-171556-2-3] 난생처음 겪는 불공평함을 쉽게 극복하는 이는 없다. 유일한 예외는 피터 팬뿐이다. 피터 팬은 자주 불공평함을 맞다뜨렸지만 늘 잊어버렸다. 내가 보기에 이 점은 피터 팬을 다른 이들과 구분해 주는 잔정한 차이점이다 - J. M. 베리 1. 기다림 앨리스는 페리 선착장에서 폴을 기다렸다. 폴은 활기찬 목소리로 자동응답기에 오후 배로 도착한다는매시지를 남겼다. 참 폴다운 짓이었다. 폴은 1시 20분 배나 3시 55분 배라고 꼭 집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폴의 말뜻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페리 운항 시간표를 오래도록 째려보았다. 분명 폴이 탔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앨리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을 억누른 채, 1시 20분에 떠.. 2023. 4. 14. · 이용범-사과나무/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이용범-사과나무」 [230407-174722] 운동권 팀장으로 수배자가 된 상은을 보호하기 위해 지훈은 같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자기집 과수원으로 피신시키고 그곳에서 지훈의 마음을 알게 된 상은은 자수를 결심한다. 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1. 눈을 떴을 때 창가에는 투명한 우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유병에는 아카시아꽃이 꽂혀 있었는데, 나는 꿈인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햇살이 얹힌 아카시아꽃이 눈부셔서 나는 한동안 우유병이 놓인 창틀을 바라보았다. 늦잠꾸러기. 상은이 쪽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향해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이슬방울 같은 물기가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이부자리를 걷었다. "아침 일찍 산 밑에까지 걸어갔다 왔어. 아카시아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너.. 2023. 4. 9. · 짐 해리슨-가을의 전설 「짐 해리슨-가을의 전설」 - 이미지 다음에서 1914년 10월 말, 러드로우 집안의 세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1917년이 되어서야 참전했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몬타나의 초토를 출발하여 앨버타의 캘거리로 향했다. '한번 찌르기'라는 이름을 가진 샤이엔족의 늙은이 하나가 그들과 동행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한 뒤 말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들을 신통찮은 조랑말에 태워 보낼 수는 없지, 자네가 따라갔다가 말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작별의 날 새벽에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 말들은 순종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이른 시간, 들소가죽을 둘러쓴 아버지는 호롱불을 든 채 마굿간 안에 서 있었고,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들을 차례.. 2023. 3. 25. 이주훈-세상 살아가는 지혜/사랑이 깃든 대화 이주훈 - 「세상 살아가는 지혜」 [220301-171000] 099 타인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거나 슬퍼하거나 마음이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완전한 실체를 보고 그것을 항상 마음 속에 그리며 찬탄하라. 출퇴근 시간이나 아니면 어떠한 시간이든 완전한 자기의 실체를 묵상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분위기를 높여라. 타인의 험담을 하는 일에 쾌감을 느낄 정도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인격은 비천 바로 그것이다. 욕설을 퍼부었을 때의 쾌감은 뒷맛이 나쁘지만, 사람을 칭찬하거나 감사하였을 때의 쾌감은 뒷맛이 개운하다. 그 사람의 눈앞에서는 어지럽도록 칭찬하고 자리를 뜨기가 바쁘게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 2023. 3. 22. 대화의 A. B. C. 1. 말할 때는 온 몸으로 표현하라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직접 마주하고 주고받는 것이다. 때문에 온몸으로 표현해야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대화를 할 때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으면 억지로라도 명랑하게 행동하고 웃는 표정을 짓게되면 분위기가 한결 좋아진다. 대화는 꼭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웃는 얼굴과 무뚝뚝한 얼굴 아무리 말이 유창해도 얼굴 표정이 어둡거나 밝지 못하면 상대방은 경계심을 갖게 마련이다. 밝은 표정은 상대방과 내 마음까지 환하게 밝혀준다 3. 대화의 기본은 눈을 마주보기 대화를 할 때 시선을 돌리면 상대방은 당황하게 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상대방을 보며 시선을 마주쳐야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에 신명이 붙는다. 서로 다른 곳을 보면 대화 분위기가 서먹.. 2023. 3. 15. 박수용-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에필로그 「박수용 -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230101-090308] 세빙(細氷) 봄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지랑이를 쫓아 진달래가 피어나더니 물결을 따라 다시 강아지풀이 솟아올랐다. 싹은 대지를 초록으로 물들었으며 꽃은 이슬을 머금고 피었다가 소나기에 젖어 떨어졌다. 여름은 습하고 뜨거웠다. 차가운 대지에 앞발을 가지런히 세우고 앉은 맹수가 푹신한 꼬리를 돌려 시린 발등을 덮듯이, 숲은 따스한 낙엽으로 겨울 잠자리를 마련했다. 자작나무와 백양나무는 햐얀 피부의 제일 바깥 껍질을 건조시켜 외투로 삼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이미 입은 향기로운 거북등 외투를 더 붉고 두툼하게 부풀려 겨울을 맞았다. 바짝 얼어붙은 키에프카 강은 눈이 쌓인 체로 구불구불 흘러갔다. 그 위를 가로질러 선명한 매화발자국이 건너갔다. 눈.. 2023. 1. 4. 루 ru - 우리는 자꾸 베트남을 짊어진 여인들을 잊는다 ·「킴 투이 - 루」 학교에서 역사를 필수 과목으로 듣는 것 때문에 불평하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역사 수업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각자 매일매일 살아남느라 너무 바빠서 집단의 역사를 쓸 시간이 없다. 얼어붙은 넓은 호수들이 장엄한 고요 속에 펼쳐지고, 단조로울 정도의 평온한 일상이 매일매일 이어지고, 풍선과 색종이 조각과 초콜릿으로 사랑을 기념하는 그런 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메콩강 삼각주의 내 증조부 무덤 가까이에서 만난 늙은 여인을 눈여겨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늙었고, 너무 많이 늙어서 이마에 맺힌 땀이 마치 땅의 고랑을 적시는 실개천처럼 주름살 사이로 흘러내렸다. 등이 굽었고, 너무 .. 2022. 12. 28. 루 ru - 100개의 얼굴을 지닌 괴물 ·「킴 투이 - 루」 라츠지아 연안에서 한밤중에 닻을 올리기 전까지는 배 안의 사람들 대부분에게 한 가지 두려움밖에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두려웠고, 그래서 탈출을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배가 똑같은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로 나온 뒤로 두려움은 100개의 얼굴을 지닌 괴물로 변했다. 그 괴물이 우리의 다리에 톱질을 했고, 다리를 뻗지 못해 근육이 뻣뻣해진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 두려움에 짓눌린 우리는 두려움에 갇혀 굳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머리에 옴이 가득한 아기의 오줌이 얼굴로 날아와도 눈을 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토사물 앞에서도 코를 움켜쥐지 않았다. 누군가의 어깨, 누군가의 다리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각자의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굳어버린 채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2022. 12. 26.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