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 김훈 산문 / 나남 - 2024. 06. 20.
2부 글과 밥 - 걷기 예찬
살아 있는 인간의 몸속에서 '희망'을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적이다.
아마도 이런 희망은
실핏줄이나 장기의 오지 속과 근육의 갈피마다 서식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인 것이어서,
사유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뿐이다.
몸의 희망을 몸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간극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이런 행복을 '몸과 삶 사이의 직접성'이라고 이름 지으려 한다.
돈이나 수고가 드는 것도 아니지만,
이 직접성의 행복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일상성(속도, 능률) 속에 매몰되어 있다.
추운 겨울 거리의 노점 식당에서 라면을 먹을 때나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수박을 식칼로 쪼갤 때,
또는 개를 데리고 새벽 공원을 달릴 때 나는 때때로 그 직접성의 행복을 느낀다.
그 행복 속에서는, 살아 있는 몸을 통해서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느낌은 사유라기보다는 생명을 보증으로 삼는 경험이다.
연초에, 눈 덮인 공원을 달리다가 빙판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
그래서 나는 겨우내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내 어두운 골방에서 도리 없이 책을 끼고 뒹군다.
김화영 교수가
프랑스 여행길에 서점에서 책을 골라 와 번역 해준 <걷기 예찬 (현대문학, 2002)>을 읽으면서,
무릎이 아파 걸을 수 없는 나는 걷기의 육체성과 걷기의 정신성,
걷기의 개별성과 걷기의 개방성,
그리고 그 두 쌍의 대립적 국면들이 서로 만나서 접합되는 대목의 건강함을 생각했다.
이 한 쌍의 대립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층위가 사실은 서로 스미고 엉키는 동질성의 다른 측면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신비가 아니라,
몸의 생명현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이다.
김화영 교수는 2년 전에도 번역서 <예찬>(현대문학, 2000)을 펴냈다.
<예찬>도 삶과 몸의 직접성을 위하여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걷기 예찬>과 함께 읽히는 책이다.
아마도 <예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김화영 교수의 마음은 아늑해지는 것 같다.
이 세상이 다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예찬'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을 때,
김 교수는 시무룩해 보인다.
<걷기 예찬>이 예찬하고 있는 것은 우선 걸음을 걸어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이다.
직립보행하는 이 몸은 진화의 수억 년을 통과해 나온 몸이지만,
아직도 네 발의 추억을 간직한 몸이다.
당신들의 발바닥의 굳은살 속에 그 추억은 살아 있다.
그 몸이 걸어갈 때, 걸어가는 몸의 속도,
시선의 위치와 방향, 팔다리의 동작은 몸의 기능과 위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걷기는 시원적이고 인류학적이다.
세계의 시간과 풍경,
말들과 침묵, 산과 강으로 길은 뻗어 있고 몸이 그 길을 걸어가지만,
이 세계의 의미는 걸어가는 자의 몸속에 쌓여서 고착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몸을 통과해서 흘러나가고,
걸어가는 몸 앞에는 언제나 새롭고 낯선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서, 살아서 걸어가는 몸은 그 앞에 펼쳐진 세상을 낯설어한다.
걸어가는 몸속에서 이 낯섦은 친숙함으로 바뀌는데,
몸은 그 친숙함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때의 길은 '노'나 '가'가 아니라, 노와 가를 다 포함하면서 '도' 쪽에 가까운 길이다.
이때의 걷기는 '가기'가 아니라 가기를 포함한 '행함' 으로 바뀐다.
그래서 <걷기예찬>에서는 '걷기'를 '살기'나 '글쓰기'로 바꾸어 놓아도 무방할 듯싶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들은 '걷기의 정신성'이 라는 소제목으로 묶여 있는 뒷부분이다.
그 페이지들 속에서 걷기는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삶의 진행태로 다가온다.
걸어가는 몸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연료처럼 사용되고,
다리로 땅을 믿어서 살아 있는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정신성은 몸과 함께 간다.
그때, 세상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길은 도(道) 쪽으로 넓어지는데,
이 걷기는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는 듯하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1721~14781)은 말했다.
-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 <도로고道路考> 중에서
신경준은 길과 걷기의 공적 개방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길은 소통의 통로이고 걷기는 그 행함이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
나의 집에서 너의 집으로 가는 통로가 길이다.
길의 몸과 말의 몸은 다르지 않다.
살아 있는 몸만 이 그 통로를 따라 걸어갈 수 있다.
집으로 가는 길과 밖으로 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걷기예찬> 속의 길을 따라서 타인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인가.
몸은 그 길을 가고 싶다.
길이여,
책 속에서 뛰쳐나와 세상으로 뻗어라.
[t-24.11.18. 20241117-15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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