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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27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버스가 어찌나 만원인지 그대로 있다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일자 콧수염 기른 인도 남자와 코걸이를 두 개씩이나 한 아줌마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더 숨 쉬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버스 지붕에 앉아서 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버스가 차이 스톱(차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라고 잠시 정차하는 것)을 한 틈에 나는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이미 열 명이 넘는 인도인들과 닭 몇 마리가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가 간혹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서, 나는 지붕 한가운데의 쌀자루 위에 걸터앉았다. 나 말고도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계집.. 2024. 4. 1.
지구별 여행자 - 새점 치는 남자 「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새점 치는 남자 태양이 눈부신 날이었다. 나는 캘거타에 있는 구세군회관 여인숙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싸구려 여인숙 안이 너무 어두워, 햇빛 찬란한 바깥세상이 오히려 구세군이었다. 사원 지붕의 늦잠 잔 원숭이가 합장하며 인사를 하고, 노천에서의 배고픈 명상을 끝낸 탁발승이 반갑게 손짓하며 나를 맞았다 땅콩 파는 남자는 내일을 기약하며 공짜로 한 줌 건네주고, 아침부터 소똥 밟은 서양인 여행자는 성스런 소똥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망연자실 서 있었다 나는 장발을 휘날리며 강으로 걸어갔다. 강에 세워진 커다란 다리 위에는 새점 치는 남자가 가부좌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이마에 흰색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지혜의 눈을 그려 넣은 중년의 바라문이었다 그는 .. 2022. 12. 10.
지구별 여행자 -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 힌두 사원의 분주한 푸자(종교 의식)소리와 함께 봄이 찾아오자, 겨우내 피었던 유채꽃들은 노란색이 짙어졌다. 해는 하루가 다르게 열기를 더해 가서, 마침내 유채꽃들에게서 싱싱한 영혼을 거두어 가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우기가 찾아와 인도 대륙은 마치 거대한 방주처럼 물위에 떠다녔다. 그 배 안에서 색색의 사리를 입은 5억의 인도 여인들과 도티를 걸친 5억의 인도 남자들이 비에 흠뻑 젖었다. 사원의 종소리도 둔탁해지고, 연필 깎을 때 나는 냄새 같은 백단향 연기는 장대비 때문에 지붕을 넘지 못했다. * 백단향(인도에만 있는 독특한 향의 희귀목) 사원 지붕의 원숭이들은 몽키 템플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비를 피해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코코넛 피리 부는 사.. 2022. 11. 2.
작은이야기 2 - 싸움의 가치 정채봉. 류시화 -  「작은 이야기 2」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기자 생활한 것이 인연이었다. 작가  한 분에게 원고를 청탁 하러 찾아다니면서 몇 번이나 허탕을 쳤다.  더구나 교통수단이라고는 걷는 것 밖에 없던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울상이 되어 거의 단념하려 할 때 탈고를 했노라며 전달식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고급 레스토랑에 불려가 양식을 먹으면서 작가가 묻는 대로 띄엄띄엄 신세타령을 했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 고민이라는 고백도 했다. ​그러자 그 작가가 말했다. "그래?    내 집에 매일 오라구. 개인 지도를 해줄 테니." 나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고마워서 시키는 대로 했다.  작가는 독신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매일 저녁 찾아가서는 .. 2022. 9. 2.
지구별 여행자 - 구루지와 꽃목걸이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구루지와 꽃목걸이람 샤란 구루지는 만날 때마다 내게 신선한 풀 말라(꽃목걸이) 하나씩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예스, 시화!” 하고 나를 맞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약간 어색했다.  그는 내가 무엇을 물어도, 심지어 짜이 한 잔을 마시자고 청해도, 늘 '예스, 시화!'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내가 가진 슬픔, 어두운 면, 열등감, 비관적인 것들을 모두 배낭 속에 넣어 두곤 했다.  그것들은 밖으로 내보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낭을 등에 메고 다녔다.  대개 그것들은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배낭 속에 잘 들어가 있었지만,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내가 .. 2022. 8. 16.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 2022. 7. 14.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빈자의 행복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빈자의 행복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차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남인도 마드라스의 호텔 앞에서 아침마다 릭샤(바퀴 셋 달린 택시)를 받쳐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내가 호텔 문을 나서면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도 다른 릭샤꾼들을 제치고 재빨리 달려왔다. 그리고는 날 모시고 다니려고 이른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다고 허풍을 떨었다. ​처음 차루의 릭샤를 탔을 때 연신 기침을 해대는 것이 안돼 보여 약 사먹으라고 차비를 더 얹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부터 차루는 아예 나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기로 작정한듯 어딜가나 따라다녔다. ​나는 약간 창피.. 2022. 6. 30.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빈배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빈배작은 배를 타고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그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 지붕이 있는 배 한 척을 띄워놓고 그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모우니 사두, 곧 침묵의 성자였다.  여행자들이 갖다 주는 음식으로 생활하면서 그는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침묵 수행 중이었다. 배를 노 저어 그의 배로 가면 일렁이는 물결 위에 긴 머리를 한 그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이 내 영혼 구석구석 파고들어서 어떤 때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처럼 몇 시간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의 눈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 2022. 6. 23.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아름다운 도둑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아름다운 도둑여름비가 퍼붓는 날이면 비시누가 생각난다. 그리고 비시누를 생각하면 보리수나무들 위로 억수같이 퍼붓던 인도의 장맛비가 생각난다.  그 장마비 속으로 비시누는 맨발을 하고서 뛰어다니곤 했다.  길바닥에 홈이 패일 정도로 빗방울은 굵기만 했다. 아대륙 인도에 우기가 찾아오면 그렇게 하루에 한차례 씩 감자만 한 빗방울들이 머리가 아프도록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빗속을 뛰어 다니는 비시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시누는 하루에 한번씩 내가 생활하는 명상센터에 찾아왔다. 그렇다고 명상을 배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명상을 배우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비시누는 열 살의 소년이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비시누는 어린 소매치기였다. 비.. 2022. 6. 2.
지구별 여행자 -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12년마다 열리는 인도 최대의 축제「마하 쿰부 멜라」에 참석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안고 뭄바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발부터 예상 밖의 장애물에 부딪쳤다. 델리행 연결 편 비행기가 짙은 안개를 이유로 이륙이 취소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뭄바이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나, 북인도 대륙을 장악한 히말라야의 안개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기차역으로 달려갔지만,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표를 구하기는커녕 표 파는 직원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조차 불가능했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보름 치의 예약을 마감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해서 한 달 전부터 치밀하게 짜놓은 나의「마하 쿰부 멜라」행 계획이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 2022. 5. 24.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세 가지 만트라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세 가지 만트라산 모퉁이를 돌자 만년설을 뒤집어쓴 설산 히말리아가 아이맥스 영화처럼 거대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래 납작바위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요기(요가 수행자)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눈은 지그시 감겨 있고,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손은 허공중에 무드라(깨달음의 형상)를 그리며 정지해 있었다.  신비 그 자체였다. 거대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박혀 있는 불상처럼 그렇게 요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리까지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만이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요기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첫눈에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완벽한 스승이었다. 바로 그런 스승을 만나기 위해 나는 인도.. 2022. 5. 16.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술 통 (잠언시집) 류시화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술통 내가 죽으면술통 밑에 묻어 줘.운이 좋으면밑둥이 샐지도 몰라.  (p99)  - 모리야 센얀 (일본 선승 78세).   잠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영혼의 순간적인 대오각성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삶들 속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축척이다. 그러니까 잠언의 시대와 역사의 검증을 받고 살아남은 금강석과 같은 지혜이다. 잠언이 없는 시대, 잠언이 없는 문화는 불행하다. 더구나 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언을 거들떠 보지 않는 사회는 더 불행하다.이 시집에 실린 이름 없는 사람들은 시인으로서는 무명씨일 뿐,자신의 삶에서는 개인사를 당당하게 완성한 위대한 개인들이다.이들이 남긴 잠언시의 핵심은 우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2022. 4. 8.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를 보면서 (잠언시집) 「 류시화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아무도 없는 골목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혼자 후회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잠언 시집을 읽으면서 그날 흘린 나의 외로운 눈물을 위로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당신은 이 시집을 통해 당신의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 당신의 인생이 그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얼마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집은 하루하루 상처받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시인들의 크나큰 선물이다. 시를 .. 2022. 3. 26.
인생을 다시 산다면 (잠언시집) 류시화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이번 인생보다 더 우둔해지리라.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자주 구경하리라.산에도 더욱 자주 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많이 하리라.아이스크림은 많이 먹되 콩요리는 덜 먹으리라.실제적인 고통은 많이 겪을 것이나상상 속의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 시간을, 하루 하루를의미있고 분별있게 살아온 사람 중의 하나이다.아, 나는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나의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지리라 사실은 그러한 순간들 외에는 다른 의미없는시간들을 갖지.. 2022. 3. 17.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 공감과 연민 ·「류시화 -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공감과 연민나와 배우 김혜자가 함께 네팔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카트만두 외곽의 유적지에 갔다가 길에서 장신구들을 펼쳐 놓고 파는 여인을 보았다. 이름난 관광지라서 노점상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혜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는 것이었다.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었다.  그제야 보니 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싸구려 장신구들 위로 번졌다.  놀라운 일은 김혜자 역시 그녀 옆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말도 없이 여인의 한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먼지와 인파 속에서 국적과 언어와 신분이 다른 두 여인이 서로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2017. 5. 20.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류시화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어느 날 페르시아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 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가슴에 새기라. '.. 2008. 12. 10.
눈을 감고 보는 길 - 책머리에(법정) / 바다를 생각하며 ·「정채봉 에세이 - 눈을 감고 보는 길」   책머리에 내 눈시울에도 물기가 배었다.정채봉 님의 책에 전에 없이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을 나는 기쁘고 고맙게 생각한다.  작년 이맘때,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충격에 한동안 할 말을 잊었었다.  몇 차례 편지로 또는 말로 음주에 대해 잔소리를 해온 터라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싶었다. 환자복을 입고 반쪽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대하자 불안했던 생각이 얼마쯤 가시었다.  그 이유는 그의 눈망울과 그 방안의 분위기에 어두운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병상에서 다시 일어설 사람과 일어서지 못할 사람은  그의 눈망울과 그 병실의 분위기가 의사의 말보다 더 잘 암시해 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008. 6. 11.
지구별 여행자 - 내 영혼의 여인숙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내 영혼의 여인숙우주를 떠돌다 지구라는 여인숙에 온 한 영혼이 있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몇 군데 직장을 다니다가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그 장소가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기에 좋은 경험들을  그에게 많이 가져다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그는 자주 고통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스스로의 삶이 너무 피곤하다고 여겨질 때도 많았다. 더듬이가 끊어진 여치처럼 생의 방향을 잃고, 눈을 깜박이거나 숨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삶을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가 갑자기 인도로 떠난 것은 어쩌면 행복은 때때로 단순한 깨달음과 함께  찾아온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인숙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여인숙 이.. 2007. 11. 3.
지구별여행자 - 신은 어디에 있는가 「류시화 - 지구별여행자」  신은 어디에 있는가동인도 비하르 주에 있는 요가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기차가 역을 출발하고 반 시간도 채 안 돼 배불뚝이 검표원이 나타났다.  그는 좌중을 제압하려는 듯 복도에서 걸구 치는 가짜 시계 파는 청년을 떠다민 뒤,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다들 표를 보여 주시오!”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승객들은 보따리 속에 감춰 둔 표를 찾느라 더욱 부산해지고,  표 없이 탄 아줌마는 그 틈을 타 분홍색 사리로 얼굴을 가리고 나는 듯이 뒤칸으로 피신했다.  축제 시즌이 코앞에 다가오자 한 푼 얻어 볼까 하고 탔던 걸인들도 아연 긴장했다. 검은색 카이제르 수염을 하고, 코와 볼 사이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는 그 검표원은 잔뜩 거만한 태도로 승객들이 내미는 표에 검은 볼펜을 찍.. 2007. 9. 23.
지구별 여행자 - 내 친구 여동생의 결혼식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내 친구 여동생의 결혼식쑤닐 차크라바티의 여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그간의 우정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결혼식이 동인도 비하르 지방에서 열린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대학에서 인도 역사를 전공하고 지금은 힌두 대학의 시간 강사로 일하고 있는 쑤닐은  한때 나의 친구이자 통역자로 인도 전역을 함께 여행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바라문(인도의 신분 계급 중 첫 번째 성직자 계급) 사제이자 점성 학자여서,  해마다 내가 인도의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 좋은가를 점쳐 주곤 했다. 물론 나는 항상 그 점괘와는 정반대로 돌아다녔지만,  쑤닐의 여동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 결혼식에는 꼭 참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구나 결혼식 장소는 내가 늘 가보고 싶.. 2007. 9. 15.
마른 나뭇단처럼 가벼웠던 몸무게 (법정) ·「정채봉. 류시화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 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 2007. 6. 26.
然 後(뒤에야) ·「류시화 -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然  後(뒤에야)   진계유(陳繼儒)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침묵을 지킨 뒤에야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일을 돌아본 뒤에야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문을 닫아건 뒤에야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욕심을 줄인 뒤에야이전의잘못이많았음을알았네.마음을 쏟은 뒤에야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2007. 6. 10.
무엇이 성공인가 「 (잠언시집) 류시화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무엇이 성공인가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건강한 아이를 낳든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사회 환경을 개선하든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류시화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열림원 - 1998. 04. 10.[t-07.06.03-  20210604-183959-3] 2007. 6. 3.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 이 책을 엮으며 ·「정채봉. 류시화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시인이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선 에서 몇 줄 쓴 적이 있지만  어머니는 내 글 어디에도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리 해도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맨 먼저 눈물이 글썽거려지기 때문이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 편의 글이 어니라 한 권의 책을 써도 모자라기 때문이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모든 기쁨과 슬픔과 지나온 삶의 기억들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편지 한 장 제대로 쓴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 2007. 4. 28.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오, 이제야 왔군!  2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타났어!" 누가 소리치며 반가워하길래 뒤돌아보니 코브라 지팡이를 든 늙은 구루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난 양 반갑게 어깨를 껴안으며 말을 걸었다. "난 언제나 그대를 불렀지.  바로 곁에서 말이야.    그런데 그대가 듣지 못했어.    내가 부르는 소리를 환청이라고 여겼어."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환청으로 어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늙은 구루가 괜한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난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건 아닌가요?  전 그.. 2007. 4. 13.
지구별 여행자 - 영혼을 위한 음식 「지구별 여행자 - 영혼을 위한 음식」    영혼을 위한 음식"한 가지가 지루하면 모든 것이 지루한 법!"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 남자가 영어로 말했다. 때가 지나 선지 식당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내가 창가 자리로 가서 앉자, 주인 남자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종업원을 무척 부려먹게 생긴, 끝이 둥글게 꼬부라진 콧수염을 한 풍채 좋은 남자였다. 그는 테이블에 앉은 파리 한 마리를 메뉴판으로 후려쳐서 아득한 뇌사 상태에 빠뜨린 뒤,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펼쳐 놓았다. 식당은 손바닥만 한데, 메뉴에는 북인도 음식이든 남인도 음식이든 없는 게 없었다. 몇 년 동안 인도 대륙을 헤매 다닌 끝에 모처럼 제대로 된 싸구려 식당을 발견한 것이다.뭘 먹을까 입맛을 .. 2007. 4. 13.
작은 이야기 2 - 먼저 살던 여자의 편지 「 정채봉. 류시화 -  작은 이야기 2」  장미의 향기는 그것을 건네주는 사람의 손에도 남아 있다. - 작자 미상   얼마 전에 남편 회사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결혼한지 벌써 5년,  자질구레한 살림살이가 한 트럭 가득이었다.   한 해에 한두 번씩 하는 이사여서 짐 꾸리는 데는 이골이 난 터다. 커다란 짐은  미리미리 남편더러 챙겨 달래서 이사하는 날 아침 일찍 싣고 출발했다. ​집 앞 공터에 짐을 부려 놓고 들어가 보니,   방이며 부엌이며 아직도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장판이 구멍 난 곳은 꽃무늬 별무늬 종이로 예쁘게 붙여져 있고 정결하게 걸레질까지 되어 있었다.  ​이사하는 날의 어수선한 기분이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상쾌한 .. 2007.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