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빈배

by 탄천사랑 2022. 6. 23.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빈배
작은 배를 타고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그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 지붕이 있는 배 한 척을 띄워놓고 그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모우니 사두, 곧 침묵의 성자였다. 
여행자들이 갖다 주는 음식으로 생활하면서 그는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침묵 수행 중이었다.

배를 노 저어 그의 배로 가면 일렁이는 물결 위에 긴 머리를 한 그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이 내 영혼 구석구석 파고들어서 어떤 때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처럼 몇 시간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의 눈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마치 큰 산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긴 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영혼의 만남엔 말이 필요 없음을 그는 가르쳐주었다. 
침묵은 신과 대화하는 유일한 언어임을 그는 가르쳐주었다.

우리가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에도 강둑에선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 태우는 연기,  물을 공중에 흩뿌리며 요가 목욕을 하는 사람,  뭘 사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집단으로 몰려와 강물에 뛰어드는 순례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

모우니 사두가 탄 배는 그 모든 소음을 초월해 있었다. 
그의 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춤을 추고 싶기도 하고,  나 자신이 물거품이 되어 아득히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인도에 와서 여러 명상법을 배우러 돌아다녔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명상에 빠져드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침묵하는 모우니 사두에게서 전염된 것이다.

이듬해 나는 다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을 찾아갔다. 
모우니 사두가 아직도 묵언 수행 중인 채로 배 위에서 살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도 여전한 채로,  나는 또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몇 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 네팔을 거쳐 다시 바라나시로 갔을 때는 사두는 떠나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강 위에 빈 배만이 떠 있었다. 
나는 그 빈 배로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 모우니 사두는 사실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 그대로 살아 있다. 
지금도 나는 명상을 하려고 눈을 감으면 

지붕이 달린 작은 거룻배 위에서 그 모우니 사두와 함께 마주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하루 일을 마치면 나는 그의 배를 타고서 그와 함께 저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의 배는 산과 지붕들을 넘기도 하고,  우주 공간을 날아 외계로도 넘나 든다.

신나지 않은가!

나는 그와 함께 내 안과 밖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많은 스승들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 없이 가장 중요한 것, '침묵'을 가르쳐준 스승은 그 모우니 사두였다.  

 

 

 이 글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열림원 - 1997. 05. 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