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
12년마다 열리는 인도 최대의 축제「마하 쿰부 멜라」에 참석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안고 뭄바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발부터 예상 밖의 장애물에 부딪쳤다.
델리행 연결 편 비행기가 짙은 안개를 이유로 이륙이 취소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뭄바이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나,
북인도 대륙을 장악한 히말라야의 안개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기차역으로 달려갔지만,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표를 구하기는커녕 표 파는 직원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조차 불가능했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보름 치의 예약을 마감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해서 한 달 전부터 치밀하게 짜놓은 나의「마하 쿰부 멜라」행 계획이 여지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중에 묵을 호텔 예약도, 미리 사둔 특급 열차표도,
축제가 열리는 장소의 게스트하우스 예약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더구나 축제에 함께 가기 위해 도중에서 만나기로 한 인도인 친구들과
멀리 유럽에서 오기로 된 친구와의 약속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각자 축제 장소에 간다 한들,
그곳에서 서로를 찾기란 시바 신의 능력으로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공식 집계 3천만 명,
비공식 집계 5천만 명이 참가하고
하루 실종자 신고 수가 2만 5천 명에 달하는 그야말로 은하계 최대의 축제가 아닌가!
나는 더없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12년 전에도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었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심한 열병에 걸려 그만 도중에 돌아가야만 했었다.
그리고는 여행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려 축제 장소로부터 영영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마하 쿰부 멜라」 축제가 내 눈앞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기차로도 수십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인도인 남자가 바로 미스터 굽타이다.
아라비아해가 바라다보이는
한 여행사에서 만난 미스터 굽타는 컴퓨터를 사이에 두고 조용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었다.
나는 어떻게든「마하 쿰부 멜라」에 가겠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고,
동시에 그것이 좌절될 것만 같아 실의에 차 있었다.
오랜 인도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락을 하려고 아무리 시도를 해도 늘 그렇듯 전화마저 불통이었다.
사실 인도 여행 중에 이런 일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번번이 비행기가 취소되고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예정대로 여행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예악은 뒤바뀌고,
약속은 간단히 무시되고, 심지어 음식을 주문해도 엉뚱한 요리가 나오기 일쑤였다.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애물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50대 초반의 미스터 굽타는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짜이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점점 인도의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불만이 커져갔고,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 허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기차역 앞에서 탄 오토릭샤가 회교도들의 폭동을 핑계로
멀리멀리 돌아오는 바람에 잔뜩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천민들이 데모를한다는 둥,
또는 홍수로 길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인도 운전수들의 상투적인 수법인 걸 내 모를 리 없었다.
수줍은 미소를 가진 인도소년이 배달해 온 짜이를 권하며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당신의 여행일정이 헝클어진 건 참으로 안 된 일이오.
하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당신에게 내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소."
그는 짜이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의 일이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의 골치 아픈 생활을 잊고 여가도 즐길 겸 캘커타에 골프장을 하나 만들었소.
그런데 골프를 칠 때마다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난 것이오.
그것은 다름아닌 원숭이들이었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원숭이들은 영국인들이 쳐올린 골프공이 필드에 떨어지자마자 얼른 집어가 엉뚱한 곳에다 떨어뜨리곤 했다.
당연히 경기는 지연되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영국인들은 골프장의 담장을 두 배로 높였다.
하지만 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들에게 그까짓 높이가 문제 될 리 없었다.
영국인들이 그 작은 공에 그토록 미친 듯이 집착하는 것을 본 원숭이들은 더욱 신이 나서
골프공을 이리저리 굴리고 다녔다.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결국 영국인들은 새로운 골프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었소.
그것은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 경기를 진행하라'는 것이었소.
물론 이 새로운 규칙은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었지요.
엉뚱한 곳으로 골프공이 날아갔는데
원숭이들이 그 공을 주워다 홀컵에 떨어뜨리는 행운을 맛본 사람도 있었고..."
또한 간신히 홀컵 가까이 공을 보냈는데, 원숭이가 재빨리 집어가 물속에 빠뜨리는 불운한 경우도 있었다.
행운과 불운이 매번 교차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짜이 잔을 들며 미스터 굽타가 내게 물었다.
"영국인들이 그 골프 경기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그 경기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골프 경기만이 아니라 삶 또한 그렇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의 계획대로 다 조종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매번의 코스마다 긴꼬리 원숭이가 튀어나와
골프공을 엉뚱한 곳에 떨어뜨려 놓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미소를 지으며 미스터 굽타가 말했다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충고는 바로 이것이오.
좌절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숭이가 골프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여행을 계속하시오."
물론 나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시바 신의 심부름꾼인 하누만(인도의 원숭이 신)이 정해 준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며칠 늦기는 했지만 끈기를 갖고 기다려 준 인도 친구들과도 감격적으로 재회할 수 있었고,
12년 동안 벼르고 별렀던 '마하 쿰부 멜라' 축제에도 참석해
새벽의 갠지스 강물에 무사히 내 카르마를 씻어 보낼 수 있었다.
멋진 충고가 아닌가?
원숭이가 경기를 방해할 때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2.
'작가책방(소설 > 류시화. 정채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빈배 (0) | 2022.06.23 |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아름다운 도둑 (0) | 2022.06.02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세 가지 만트라 (0) | 2022.05.16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술 통 (0) | 2022.04.08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를 보면서 (0) | 2022.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