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헤르만 헤세7

정원 일의 즐거움 - 정원에서 보낸 시간 ·「 헤르만 헤세 - 정원 일의 즐거움」 아침 7시쯤 방을 나와 햇빛이 밝게 비치는 테라스로 걸어간다. 어느덧 다시 깨어난 태양이 무화과나무 그늘 사이로 비쳐든다.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난간에는 벌써 온기가 감돈다. 여기 나의 연장들이 놓여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연장들은 모두 친숙해져 나와 다정한 동무가 되었다. --- 그건 채소밭을 가꿀 기대에 들떠 씨앗을 주문할 때 쓴 표식이지만 이미 필요 없어지고 오래된 것이다. 고대인들의 지혜와 성스러운 문헌들이 오늘날 구식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짓밣히고 이 쓰레기 더미처럼 비웃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생각 있는 사람들, 한가한 사람들, 몽상가들, 정감 있는 사람들에겐 값진 것이다. 그렇다. 마치 바라보고 생각하노라면 기분을 안정시켜 주는 .. 2022. 5. 11.
오래된 음악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오래된 음악 시골 외딴집의 창가로 시커먼 빗줄기가 허물어지듯 끊임없이 쏟아진다. 나는 다시 장화를 꺼내 신고 그 질펀한 길을 따라 시내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로웠고, 긴 시간 동안 작업한 까닭에 눈이 아팠으며, 서재 곳곳에 꽂혀 있는 금장의 책들이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작은 난로의 불길은 이미 수그러들었다. 결국 집을 나서기로 결심한 나는 콘서트 입장권을 챙기고 장화를 꺼내 신은 다음 강아지 목에 줄을 매달아 주고 비옷을 입은 채 더러운 진흙과 빗물이 넘치는 길을 따라 나섰다. 공기는 상큼했지만 씁쓸한 냄새가 났다. 키가 크고 줄기가 휜.. 2016. 10. 6.
삶을 견디는 기쁨 - 2부 조건 없는 행복/한 편의 동화(험난한 길)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2부 조건 없는 행복 한 편의 동화 - 험난한 길 어두컴컴한 바위 문 옆으로 뻗어 있는 골짜기 초입에 멈춰 선 채 나는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햇빛이 푸르른 세상을 아늑하게 비추고, 풀밭 위에는 연갈색의 꽃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반짝였다. 그곳에는 따뜻한 온기와 안락함이 있고, 나는 날아다니는 한 마리 벌처럼 꽃 내음과 햇빛을 만끽하며 내 영혼은 깊고 평화로운 안식을 취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나는 바보일지도 모른다. 안내인이 내 팔을 가만히 건드렸다. 나는 따뜻한 목욕물에 담근 몸을 마지못해 일으켜야 했을 때처럼 풍경에 미련을 두며 겨우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바위틈으로 시.. 2016. 7. 28.
삶을 견디는 기쁨 - 작은 기쁨 ·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작은 기쁨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우리는 종종 얼굴에 미소를 띠며 선인들이 쓴 서정적이며 감성적인 여행담을 읽는다. 우리의 조상들이 시간에 쫓긴 나머지 무언가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던가? 일전에 프리드리히 쉴레겔1)이 쓴 게으름에 관한 시선집을 읽으며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만약 그가 지금 우리가 사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면 그는 얼마나 긴 한숨을 내쉬며 괴로워했을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려서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늘 서두르도록 교육받는 것이 성인이 된 .. 2016. 4. 4.
삶을 견디는 기쁨 - 무위의 미학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무위의 미학 정신적 노동마저도 오랜 전통을 잊은 채, 멋도 잃고 그저 거칠기만 한 공업 세계를 닮아 가고, 학문과 학교는 우리에게서 자유와 개성을 가차 없이 빼앗아 가려고 하며,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얼른 유아기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노력하고 쉴 새 없이 달리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세태 속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예술이 그랬듯이 적당하게 게으름을 피우며 향유하던 무위 無爲의 미학도 아득하게 멀어져만 갈 뿐이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고는 하던 것을 그 누구보다 잘했던 시절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 서구에서는 예술의 경지로 게으름을 부리곤 하는 것이 몇몇 호사가들만 누릴 .. 2016. 3. 22.
정원 일의 즐거움 - 즐거운 정원 ·「헤르만 헤세 - 정원 일의 즐거움」 즐거운 정원 정원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이제 봄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생각에 잠겨 텅 빈 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 보면, 그 북쪽 가장자리엔 아직도 누르스름한 빛의 눈이 쌓여 있다. 봄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들판과 시냇가, 경사진 따사로운 포도밭 주변에는 벌써 갖가지 초록의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갓 모습을 드러낸 노란 꽃들은 수줍은 듯 즐거운 듯 생명에 대한 용기를 내어 풀숲에 숨은 채 어린 눈을 열어 고요하고도 기대에 찬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정원엔 갈란투스 식물만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는 봄이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벌거벗은 꽃밭은 사람들이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려주기를 묵묵히 기.. 2007. 7. 6.
정원 일의 즐거움 - 보덴 호숫가에서 ·「헤르만 헤세 - 정원 일의 즐거움」 나는 여태껏 내 정원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정원을 갖게 되면 스스로 어떻게 배치할까 정하고 식물을 재배해야 한다는 건, 시골에 사는 내 원칙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실 몇 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나는 정원에 땔감과 정원용 도구들을 넣어 둘 헛간을 지었다. 조언을 해주곤 하는 농부의 아들과 함께 길을 만들고 꽃밭의 구획을 정비했으며, 여러 종류의 나무들도 심었다. 밤나무 서너 그루, 보리수 한 그루, 개오동나무 한 그루, 너도밤나무 울타리, 나무딸기 넝쿨, 멋진 과일나무들을 말이다. 겨울에 산토끼와 사슴들이 갉아먹어 버린 통에 어린 나무들은 망했지만, 다른 나무들은 모두 멋지게 잘 자랐다. 우리는 그 당시 딸기와 라스베리, 양배추, 완두콩, 샐러드 잎 .. 2007.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