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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 무위의 미학

by 탄천사랑 2016. 3. 22.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무위의 미학
정신적 노동마저도 오랜 전통을 잊은 채, 멋도 잃고 그저 거칠기만 한 공업 세계를 닮아 가고, 
학문과 학교는 우리에게서 자유와 개성을 가차 없이 빼앗아 가려고 하며,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얼른 유아기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노력하고 쉴 새 없이 달리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세태 속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예술이 그랬듯이 
적당하게 게으름을 피우며 향유하던 무위 無爲의 미학도 아득하게 멀어져만 갈 뿐이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고는 
하던 것을 그 누구보다 잘했던 시절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 서구에서는 예술의 경지로 게으름을 부리곤 하는 것이 몇몇 호사가들만 누릴 수 있는 짓이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 많은 서구 사람들이 동경의 눈빛을 띠며 동양을 바라보고, 
시리아와 바그다드에서 약간이라도 무위의 즐거움을 맛보려고 애를 쓰고, 
그 간절한 마음만큼 인도에서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진지함과 몰입을 체험하기 위해 부처의 성지를 찾아가는 등의 힘겨운 노력을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동양의 역사책에서 차가운 성벽으로 울타리를 치고 있는 궁전에 관한 글을 읽으며 느꼈던 
그런 마법 같은 기분을 체험하기 위해 우리 가까이 있는 장소를 찾거나 
우리 주위에 있는 책은 펼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이상하게 여겨지기만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터키의 전래 동화나 아랍의 《천일야화》, 
혹은 《앵무새의 책》이나 《데카메론》과 유사한 구하기 힘든 동양의 유서 깊은 책 등을 보며 
묘한 기쁨과 해방감을 맛보는 것일까? 
파울 에른스트2) 같은 섬세하고 독창적인 작가가 왜 《동양의 공주》같은 작품을 쓰면서 
왜 그토록 좁은길을 걸으며 오래된 형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오스카 와일드3)는 심혈을 기울이면서 상상의 세계, 그곳으로 자꾸 도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몇몇의 동양학자들의 도서를 제외한다면 내용 면에서는 
그 두꺼운 《천일야화》가 

그림 형제 동화의 어떤 단편이나 중세 기독교 신화와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읽는다. 
그러고서는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아서 금세 잊어버리고는,  다시 책장을 잡으며 똑같은 기쁨을 맛본다.

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그 이유를 동양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학적인 판단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 그래도 우리 문학에서 타고난 이야기꾼들을 제대로 평가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문 마당에 
왜 유독 우리는 동양의 문학과 그들이 하는 이야기만을 추앙하는 것일까? 
잘 쓰인 작품을 읽는 기쁨이 크다는 것이 이유일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외에는 심리적으로 감성적인 자극만 찾으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를 마법의 사슬로 옭아매는 동양 예술의 배경에는 우리가 갖지 못한 동양적인 느림의 미학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여유로운 기질이 예술로 승화, 발전한 것이다. 
아라비아의 이야기꾼들은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부분에 다다르면 공연히 시간을 끌면서 궁전의 화려한 장식, 
혹은 보석을 매달아 예쁘게 만든 말의 안장, 
수도승의 덕망이나 진정한 현인의 완벽함을 세세한 묘사를 통해 표현한다. 
그들은 왕자나 공주가 결정적인 한 마디 말을 던지기 전에 그들 입술의 움직임이나 붉은 빛깔에 대해 말하고, 
아름다운 하얀 이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강렬한 눈빛, 
겸손하게 아래로 향하는 눈빛과 깨끗하게 잘 손질한 손의 움직임, 
그리고 발그스름한 빛이 나는 손톱과 손가락에 끼워진 반짝이는 보석 반지를 묘사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는다. 
요즘 독자들이 이야기를 들으며 조바심을 내거나 
줄거리만 빨리빨리 읽어 내려는 성급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의 감격에 겨워하는 젊은이들의 기쁨이나, 
불행에 처한 건축업자의 자살 이야기에 열심히 귀 기울이는 것처럼 
그저 동양에 살고 있는 늙은 은둔자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들은 시간도 많고 그만큼 여유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은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이나 나쁜 사람의 비굴함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기꺼이 하룻밤과 오전 시간을 할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의 절반 정도를 들었을 뿐인데 
자정 무렵이 되어 버리면 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 있다는 것에 대해 알라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

그들은 시간의 백만장자다.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처럼 한 시간, 하루, 
혹은 일주일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으면서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도 어느샌가 인내심이 많아진 것을 느끼고, 이 이상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위의 신이 우리를 마법의 지팡이로 치유해 주는 큰 마법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인류와 문화의 고향 같은 요람을 찾아 순례를 떠나고, 
공자나 노자같은 위대한 스승이 들려주는 가르침에 무릎을 조아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신성한 무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고,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조용한 흐름을 끊임없이 감지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걱정을 다 잊게 해 준다는 바쿠스4)나 달콤한 잠을 취하게 해 준다는 해시시5)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우리 서양에서는 시간이 아주 작은 단위로 나뉘어졌고, 
그 하나하나가 돈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아직 시간이 나뉘어지지 않은 채 도도한 물결이 되어 세상의 갈증을 채워 주고, 
바다의 소금이나 천체의 불빛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은 채 흐르고 있다.

인간성을 짓밟아 버리는 이 시대의 공업과 과학에 그 어떤 충고를 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공업과 과학이 인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파산지경에 이른 문화라는 섬의 한가운데에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목숨을 연명해 가려는 우리 예술가들은 유서 깊은 법칙을 좇아가야만 한다. 
우리에게 인간성은 사치가 아니라 존재를 위한 필수 조건이며, 
삶을 위한 공기이고,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자산이다.

여기에서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 
자기가 쓰는 힘의 근원을 알고 그 위에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을 쌓아 올리는 것을 꼭 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말한다. 
즉 그들은,  잘 지은 건축물의 천장이 벽과 어울리고 지붕이 기둥과 잘 맞는 것처럼, 
확실하고 의미 깊은 관계의 기본 원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저급한 행동이나 표현을 삼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가끔이라도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는 생활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새로 깨달은 것을 정확하게 해석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숙성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꾸만 다시 자연스러운 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 어린이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땅의 벗이요 형제라고 생각하며, 식물과 바위와 구름을 느껴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든 혹은 집을 짓거나 시를 쓰는 사람이거나 간에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일정한 휴식 시간이 꼭 필요하다. 
새로 화첩을 펼쳐 놓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내면의 준비가 덜 되었다면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도 해 보고 의심도 해 보며 예술적인 구상도 해 본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벌컥 화를 내면서 자신은 결코 어떤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 버리고,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하다가 급기야는 작업실 문을 닫아 버린 채, 
유유자적하며 설렁설렁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리의 청소부를 부러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미 계획했던 것이 난관에 부딪친 시인이라면 애초에 느꼈던 그 벅찬 감정을 그리워하며, 
한번 써 놓은 단어나 문장 전체를 아예 다 지워 버리고 글을 새로 쓰기도 하다가 
그것마저 불구덩이에 집어넣고는 전에는 머릿속에 확실하게 떠오르던 구상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자신의 열정과 감정이 갑자기 자질구레하고 참되지 않으며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자책하면서 일을 내팽개치고 거리로 나가 비슷한 고통을 겪은 화가처럼 
거리의 청소부를 부러워하게 된다. 
다른 예술가라고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삶의 3분의 1 내지 절반을 그런 식으로 흘려보낸다. 
지극히 드문 몇몇 사람만이 공백기 없이 꾸준히 활동을 이어 나가지만 텅 빈 무위의 휴지기가 생겨나면, 
그는 그것 때문에 속세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이나 동정을 받는다. 
보통 사람들이 아주 작은 창작을 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만큼, 
일단 작업을 시작한 화가가 왜 붓을 잡은 채 계속 일하지 않는지, 
왜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지, 
왜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작업실에 틀어박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술가는 그런 휴지기를 맞으면 스스로에게 놀라고 실망하여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넘칠 정도로 가득 찬 것이 오히려 자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권태라는 것을 깨닫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의 몸속에는 그가 가시화 可視化시키고 싶어 하고, 
아름답게 변모시키고 싶어 하는 무엇인가가 꿈틀대지만 그것은 아직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고 
미처 성숙되지 않아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어떤 유일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수백 가지나 된다. 
특히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좀 더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살에 박힌 가시처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지내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것이 오히려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다 잘되지 않아 마음이 괴롭다면 티치아노6)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른바 ‘생각하는 예술가’를 이상으로 삼는다는 젊은 예술가들은 
작업이 잘되지 않을 때에는 생각에 몰두하거나 혹은 목적도 없이 쓸데없는 공상을 하고, 
때로는 맹목적인 관찰을 하며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 사이에도 일고 있는 금주와의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술과 맞서 싸우지 못한 사람들은 좋은 술을 찾아 나선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깊은 공감을 느낀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위로해 주며, 
꿈을 꾸게 만들어 주는 포도주가 오히려 그것을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멋지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근사하고 멋지게 술을 마시는 것이 아무에게나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잔 술을 우아하고 지혜롭게 즐기며 그것을 사랑하고 달콤하게 빠져들게 하는 부드러운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타고나야 할 뿐만 아니라 적당한 교육도 받아야 한다. 
훌륭한 전통을 학습하지 못한다면 완벽함에 도달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일지라도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은화가 꼭 필요할 때 그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작업할 의욕이 전혀 없는 상태와 복잡한 망상에만 사로잡히는 공허함이라는 
두 가지 위험 요소 사이에서 어떻게 육신과 정신을 온전히 지켜 내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운동이나 여행을 하는 것 등은 의욕이 없고 공허함을 느끼는 상황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도 그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들 가운데 예술가의 공명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슷한 종류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조차 힘든 시기에는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이 화가를 찾아가거나, 
화가가 음악가를 찾아가 다시 정신적 균형을 이루며 편안해지는 경우는 드물다. 
예술가가 타인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삶이 명쾌하고, 
창조적인 시기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시기에는 오히려 모든 예술이 빈약하거나, 
시시하거나 과도한 부담을 안겨 주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일시적인 낙담이나 무기력증에 빠져 있을 때 
한 시간 동안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것은 마음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바로 이런 상태가 되면 나는 오랜 전통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무위의 예술을 간절히 그리워한다. 
그리고 순수하게 게르만 민족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형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적 존재 방식을 유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에 고급스럽게 정돈된 리듬을 부여하는 관심을 
오랫동안 이어 오고 있는 아시아에 부러움과 동경의 눈빛을 보낸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서 
그런 예술의 문제를 실험적으로 해결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내가 얻은 경험은 나중에 좀 더 특별한 지면을 위해 남겨둘 생각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이 방법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점만은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몇몇 예술가들이 분명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거나, 
혹은 독자들 가운데 마치 협잡꾼에게 실망한 것처럼 예술가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러한 예술을 배웠던 내 자신의 초기 경험들을 이 자리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겠다.

1. 어느 날 나는 특별한 생각 없이 
독일어로 완역된 《천일야화》와 《사지드 바탈의 여행Fabrten des Sajjid》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처음에 얼마간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가 
그것을 반납할 시간이 다 되었을 즈음에는 두 권 다 재미없다는 생각을 했다.

2.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나는 책이란 자리에 눕거나 바닥에 앉아 읽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반듯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서양의 의자는 그런 효과를 모두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눕거나 주저앉아 있으면 공간과 사물에 대한 내 시각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3.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읽으면
(물론 그 사람은 눕거나 주저앉아 책을 읽어야 한다)  동양적인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4. 마침내 합리적인 행동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곧 체념 어린 관람자의 감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잠시 후 아무런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더라도 수시간 동안 조용하게 꼼짝도 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고, 
아주 작게 보이는 사물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면 모기가 공중을 나는 모습, 햇빛 속에 보이는 아주 미세한 물질의 움직임, 광선의 흐름 등등). 
그런 것을 보다 보면 주변에서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놀라게 되고, 
마음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기초가 만들어지고, 
절대로 지루한 시간들이 우리를 지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의식이 깨어 있는 생활을 벗어나 
예술가에게 꼭 필요하고 도달하기 힘든 자아 망각의 시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소개한 방법이 이미 존재하는 무위가 가진 힘에 대해 
잠시나마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2) Paul Karl Friendrich Ernst(1866~1933)
독일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사회주의자로서 자연주의적 현실 묘사에 역점을 두고 글을 썼으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신고전주의 확립에 힘썼다.

3) Oscar Wilde(1854~1900)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안과 의사이자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트리니티칼리지와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고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했으며 그 분야의 권위자였다.

4) Bacchus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酒神.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로 자연의 생성력 및 포도, 포도주를 다스린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Dionysos에 해당한다.

5) Haschisch
인도 대마초에서 추출한 마취제로 
13세기경 이집트에서 음주가 금지되어 있던 이슬람교도에게 기호물로 널리 애용되었다. 
코카인, 헤로인과 함께 대표적인 마약으로 분류된다.

6) Vecellio Tiziano(1488/1490~1576)
이탈리아 출신의 르네상스 화가.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했다. 
고전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p24~39)



※ 이 글은 <삶을 견디는 기쁨>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역자 - 유혜자
문예춘추사 - 2014. 03. 10.

[t-16.03.22.  20-031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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