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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 작은 기쁨

by 탄천사랑 2016. 4. 4.

·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작은 기쁨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우리는 종종 얼굴에 미소를 띠며 선인들이 쓴 서정적이며 감성적인 여행담을 읽는다. 
우리의 조상들이 시간에 쫓긴 나머지 무언가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던가? 
일전에 프리드리히 쉴레겔1)이 쓴 게으름에 관한 시선집을 읽으며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만약 그가 지금 우리가 사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면 그는 얼마나 긴 한숨을 내쉬며 괴로워했을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려서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늘 서두르도록 교육받는 것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줄곧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이 우리가 겨우 여가 시간을 누리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여가 시간에도 서두르고 바삐 움직이는 것이 일을 할 때보다 신경을 덜 쓴다거나 덜 피로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빠르게’가 되었다. 
그 결과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가하거나 놀이공원이라도 찾아간 사람은 뜨거운 열기에 몸은 달아오르고,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뻑뻑해진 눈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온통 힘든 기억들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된다.

그렇게 늘 만족감을 얻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과도한 방법으로 여가를 즐기려고 하는 태도는 연극이나 오페라, 
혹은 연주회나 그림 전시회를 볼 때에도 쉽게 나타난다. 
현대적인 예술 전시회를 찾아가 관람하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 되는 경우는 이제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부자라고 해서 그런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들은 우리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최고의 자리를 지켜 내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늘 신경을 써야 하고 
그들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잘못된 삶의 방식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다만, 별로 현대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 내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던 생각 하나를 말하고 싶다. 
적당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삶이 주는 맛을 이중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기쁨을 간과하지 말라는 조언도 꼭 하고 싶다.

결국 내 말의 핵심은 ‘절제’이다. 
굳이 어느 오페라 공연의 초연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간지를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유행이나 관습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몇 알고 있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들은 그런 용기를 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정기 관람권을 끊어 두기는 했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만 극장에 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는 조급함에 쫓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 
분명 그는 매주 시간에 쫓겨 극장에 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을 둘러보는 일에 익숙한 어떤 사람이, 
바쁜 일상 중에서도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쪼개어 몇 점의 대작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낸다면 
그는 그것으로 오히려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책벌레라고 불리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간 서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 
함께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된다면 스스로에게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몇 번은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스스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10시간 정도 잠을 푹 자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느라 소비해 버린 시간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쾌락을 대체할 만큼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될 것이다.

절제된 행동 습관은 ‘사소한 기쁨’을 내면에서 맛볼 수 있게 해 주어 쾌락을 만끽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데 현대 생활에서 왜곡되고 잃어버린 가치인 유쾌함, 
사랑, 서정성과 같은 것들을 기초로 한다. 
이른바 시간에 쫓기며 돈에 연연하는 삶을 지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러한 작은 기쁨들은, 
일상의 곳곳에 너무나 많이 흩어져 있고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일에만 몰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둔감한 감성으로는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희구하지도 않으며,  많은 돈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가난한 사람들조차 가장 아름다운 기쁨을 맛보는 것에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기쁨들 중 가장 으뜸은 우리가 날마다 자연을 접하면서 맛보고 누리는 즐거움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 내느라 특히나 혹사당하며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해야만 했던 눈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아침에 일터로 갈 때에 만나게 되는 나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이 겨우 잠에서 깨어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빠른 걸음으로 발길을 재촉하느라 딴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두르면서 바닥만 보고 걷거나 기껏 시선을 들어도 지나가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얼굴만 훑어볼 뿐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딱 한 번이라도 시도해 보라!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뼘의 하늘은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 
굳이 파란 하늘일 필요도 없다. 
햇살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을 가지면 어느 날 문득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공기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향하는 도중에도 신선한 아침의 숨결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이 새롭게 느껴지고, 

심지어 집집마다 지붕 모양이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조금만 눈길을 돌려 보면 하루 종일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자연과 함께 하고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당신은 어느새 당신 주변에 수많은 작은 유혹들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채고, 
당신이 걷는 길에 잇닿은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함으로써 
작은 생물들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라도 훈련된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뼘의 하늘, 
초록의 나뭇가지로 뒤덮인 정원의 울타리, 
튼튼한 말, 
멋진 개, 
삼삼오오 떼를 지어 가는 아이들, 
아름답게 감아 올린 여인의 머리. 우리는 아름다운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자연에 눈을 뜬 사람은 거리를 걷는 도중에도 단 1분도 허비하지 않은 채 소중한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것을 보지만 눈은 절대로 피곤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고 맑아진다. 
설령 내 흥미를 끌지 않거나 보기 흉하게 생긴 것들이라도 모든 사물들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다.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보려는 마음이 그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오랫동안 작업했던 집 맞은편에 여학교가 있었다. 
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그 집에서 내다보이는 쪽 운동장에 나와 놀고는 했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글쓰기에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많은 일을 해냈고,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기쁨을 느끼고 생활의 활기를 찾았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생기에 넘치는 아이들, 
활발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망울, 
날렵하고 민첩한 아이들의 움직임이 내 마음 속에 삶에 대한 기쁨을 충만하게 해 주었다. 
승마 학교나 닭 훈련소 같은 곳도 내게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

집 벽 등의 단색 평면에 비치는 빛의 변화를 한번쯤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눈은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끼며, 
사물을 보며 즐거움을 찾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무엇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사소한 기쁨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꽃이나 열매에서 나는 아주 특별한 향기를 맡는다든가,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는 것이라든가,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어떤 노랫말을 흥얼거리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과 그로 인해 얻은 작은 기쁨들을 하나하나 꿰어 우리의 삶을 엮어 나간다.

시간이 부족하다며 늘 전전긍긍하고,  재미있는 일이 없다며 항상 따분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날마다 벌어지는 사소한 기쁨들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하고, 
거창하고 짜릿한 쾌락은 휴가를 즐길 때나 특별한 시간을 보낼 때 조금씩 맛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1) Friedrich Schelegel(1772~1829)
독일 낭만파의 문학자이자 평론가. 
피히테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현대 문학을 연구하며 형과 함께 잡지 〈아테네움(Athenäum)〉을 창간하고, 
레싱의 〈단편〉에 새로운 예술 형식을 인정하며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고전철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의 
주관적 관념론에 기초를 둔 낭만주의의 근본 이론을 발표했다.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 독일의 미술사 연구가. 
1768년 빈에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금상을 받았으나, 귀로 중 강도의 칼을 맞고 불의에 피살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미술사에 양식 개념을 도입하고 미술사학의 방법론을 확립했다)의 역할을 문학에서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 로마 문학사》(1798)를 써서 고전의 본질을 해명하고, 
형과의 공저 《해석과 비판》(1801)을 통해 비평의 원칙을 확립했다. 
동양학과 비교언어학의 기점이 된 명저 《동인도의 언어와 예지》(1801) 발간한 후 
1803년 산스크리트 어를 배우려고 파리로 가서 잡지 〈오이로파〉를 발행하고 중세 연구에 전념했다.  (p12~20)



※ 이 글은 <삶을 견디는 기쁨>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16.04.04.  20210403-16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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