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1부 영혼이 건네는 목소리
오래된 음악
시골 외딴집의 창가로 시커먼 빗줄기가 허물어지듯 끊임없이 쏟아진다.
나는 다시 장화를 꺼내 신고 그 질펀한 길을 따라 시내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로웠고, 긴 시간 동안 작업한 까닭에 눈이 아팠으며,
서재 곳곳에 꽂혀 있는 금장의 책들이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작은 난로의 불길은 이미 수그러들었다.
결국 집을 나서기로 결심한 나는 콘서트 입장권을 챙기고 장화를 꺼내 신은 다음
강아지 목에 줄을 매달아 주고 비옷을 입은 채 더러운 진흙과 빗물이 넘치는 길을 따라 나섰다.
공기는 상큼했지만 씁쓸한 냄새가 났다.
키가 크고 줄기가 휜 참나무 사이로 뻗은 시커먼 들길이 이리저리 꺾이면서 이웃 마을로 이어졌다.
마부의 집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고,
개가 컹컹 짖기 시작하면서 사납게 울더니 점점 더 목청을 높이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시커먼 덤불 뒤에 있는 시골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저물녘 들판에 서서 외딴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은 없으리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서 살포시 고개를 들었다.
고향, 등불, 조용한 방에서 어둑어둑한 저녁에 거행하는 축하 행사,
여인의 손,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문화까지.
양철 갓을 쓴 채 도시를 지키고 있는 첫 번째 가로등이 보이고,
다시 또 하나가 보이고,
지붕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집 울타리를 지나자 갑자기 환한 빛을 쏘아 대는 전철역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긴 외투를 입고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차량 안내원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유니폼을 입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자를 쓴 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이어 차체 밑에 파란 불빛을 쏘아 대면서 환하고 따스해 보이는 넓은 창이 인상적인 전차가 덜거덕거리며 다가왔다.
사람들에 섞여 차에 오르자마자 기차는 곧 출발했다.
나는 불빛이 환한 차창 밖으로 넓고 텅 비어 있는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앞쪽 골목 어귀에 한 여인이 우산을 쓴 채 우리가 타고 있는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츰 생동감이 느껴지고,
거리가 점점 더 환해지더니 곧이어 나타난 커다란 다리 저쪽에서는
불빛에 잠겨 있는 도시와 가로등이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 보였고,
다리 밑에는 강물이 어둠 속에서 뽀얀 물거품을 일구며 흘러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뮌스터 교회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을 걸어갔다.
작은 뮌스터 광장에는 붉은 가로등이 젖은 도로 위로 차가운 불빛을 희미하게 비추었고,
어느 집 테라스에서는 밤나무가 살랑댔으며,
불그스름한 출입문 위에는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고딕 양식의 탑이 젖은 밤하늘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빗속에 잠시 멈춰 서서 피우던 담배를 버린 나는 지붕이 뾰족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손에 들었다.
옷이 젖은 채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투명한 칸막이 안에 있는 검표 직원은 내게 표를 요구했다.
옅은 빛을 뿜어내는 둥근 원형 지붕에서 내가 기대했던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나를 휘감았다.
작은 전등은 기둥을 향해 멋진 빛을 쏘아 올렸는데 불빛들은 회색 돌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천장까지 오르기도 하면서 따스한 온기를 내뿜었다.
몇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합창단 자리는 거의 비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실내에는 내 발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합창단이 앉는 어두운 자리에는 멋지게 조각한 팔걸이가 있는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가
누군가 앉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덩그맣게 놓여 있었다.
내가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살짝 발돋움을 하자 석조 건물 안에는 나무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큼지막하고 속이 깊은 의자에 기분 좋게 앉아 프로그램을 꺼냈지만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되새기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작고한 프랑스의 어느 거장이 작곡한 오르간 연주라는 안내 말이 나왔다.
곧이어 이태리 출신 작곡가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연주되었지만
그 곡이 정확히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심지어 베라치니 Veracini, 나르디니 Nardini 혹은 타르티니 Tartini의 곡이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어서 서곡과 바흐의 푸가가 연주되자 몇몇 사람들은 내가 앉아 있는 어두운 자리로 살금살금 들어와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의자에 등을 파묻은 채 음악을 들었다.
누군가 책을 떨어뜨렸고, 내 뒤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멀리 양 옆으로 세워둔 둥근 램프 사이에 위치한 오르간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앞에 위치한 강단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손짓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고, 사람들은 기대에 찬 숨결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곳을 쳐다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침묵이 흐르고 있는 교회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매주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이 이렇게 밝은 대낮에 이런 성스러운 공간에 빼곡하게 모여 앉아
강론을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내용이 아무리 아름답고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천장이 높고 큰 교회 안에서는 그 소리마저 공허하게 들릴 것만 같았다.
오르간 소리가 높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넓은 공간을 순식간에 꽉 채웠고 우리를 둘러싸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점점 커지기도 하다가 잠시 쉬기도 하고,
다른 소리가 그것을 따라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모든 소리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간절히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써 고집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샌가 다른 소리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치 천둥 번개가 내리치기 전의 고요처럼 교회 안에 고운 숨결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곧이어 황홀한 열정에 감싸인 우렁찬 소리가 거대한 강줄기처럼 밀려들어왔고,
고함을 지르듯 높아지다가 신에게 간곡히 매달리는 것처럼 애절해졌다.
그리고는 비명 소리가 한 번 나더니 소리는 급박해지면서 점점 커지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작품에 몰두해 있는 그 거장은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워 신께 매달리며 하소연하고, 부르짖고, 눈물을 짓더니
다시 폭풍처럼 장엄하게 일어서다가 잠시 쉬고 조용히 물러서면서 존경과 엄숙함을 담아 신을 찬양하였다.
그 소리는 키 높은 교회 안을 조준하며 황금 화살을 팽팽히 당기는 것 같더니
이내 소리가 울려 퍼지는 기둥들을 높이 끌어올려 자기가 그 위에 서서 쉴 수 있을 때까지
숭배하는 마음으로 거대한 돔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소리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소리에 감싸여 있었다.
나는 문득 우리가 우리의 삶을 너무나 사소하게 여기고, 시원찮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그 거장처럼 심오한 뜻을 가지고 거대한 틀을 만들며 신에게 간청하고 감사의 표현을 하겠는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하늘이 있는 풍경으로 더 자주 시선을 옮기고, 나무가 있는 자연으로 더 자주 발걸음을 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더 확보하며, 아름다움과 거대함의 비밀을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말이다.
다시 낮고 굵은 오르간 소리가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바이올린 소리는 조금 덜 슬픈 목소리로 덜 머뭇거리면서 비밀스러운 성스러움을 노래했고
그 소리는 보다 높게 흘러나왔다.
마치 예쁜 어린 소녀의 발걸음처럼 상쾌하고 가벼웠다.
곡이 다시 반복하면서 변화하고 뒤틀리더니 수백 개의 고운 형상과 유희를 즐기는
아라베스크를 찾아 좁은 길에서 서로 엉켜 녹아 흐르는가 하면,
어딘가에서는 깨끗한 모습으로 멈춰 있다가 맑게 깨어난 감정을 다시 추스르며 자유스럽게 흘러가며 솟아올랐다.
여기에는 커다란 고통과 비명,
심연 深淵은 물론 한없는 경외심도 없었고 다만 그저 만족스럽고 유쾌한 영혼이 주는 아름다움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의 질서와 조화로 가득 차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 우리가 살면서 그런 말을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런 기쁨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굳이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그 큰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순수한 웃음이 감돌고 있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오래된 음악을 약간은 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소 지으며 강줄기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휴식 시간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음성, 의자를 바로 잡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새로운 음악의 장을 맞이할 기대에 설레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거장 바흐가 활기에 넘치는 몸짓으로 성전에 나타나 신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인사를 하고
숭배의 마음을 담은 찬양을 하였다.
곧 찬송가를 부르며 주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 준비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는 다시 연주를 시작해서 음을 잡자마자 화음을 낮게 끌어내려 선율을 만들고,
다양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조화를 이루게 하고,
그것을 교회 밖으로 힘차게 내뻗어 고귀하고 완벽한 천상으로 밀어 올렸다.
마치 신이 잠을 자러 가면서 그에게 지휘봉과 외투를 건네주고 간 것 같았다.
그는 한데 뭉쳐 있는 구름을 이용해 뇌우를 일으키고 다시 햇빛이 있는 밝은 공간으로 나와서
행성과 태양 주위를 의기양양하게 거닐고,
한낮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시간에 맞춰 서늘한 저녁 기운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지는 태양처럼 화려하고 장엄하게 곡을 마무리 지은 뒤,
영혼을 빛으로 가득 채운 채 아무 말도 없는 세상을 뒤로 하고 홀연히 떠났다.
나는 천장이 높은 그 공간을 조용히 가로지르고,
잠들어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
높은 다리를 말도 없이 건너서, 가로등이 켜 있는 거리를 지나 도시를 벗어났다.
빗줄기는 힘을 다했고,
온 도시를 덮고 있는 시커먼 구름 뒤에 달빛이 조금 비치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밝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는 자취를 감췄고, 우리 집 근처 들길에 있는 참나무로부터 부드럽고 신선한 바람이 전해졌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느릅나무가 창가에서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제야 나는 다시 조용히 살고 싶어졌고, 이후로 한동안은 다시 삶의 장난감 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p 70~80)
※ 이 글은 <삶을 견디는 기쁨>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16.10.06. 20211011-165440]
'작가책방(소설 > 헤르만 헤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원 일의 즐거움 - 정원에서 보낸 시간 (0) | 2022.05.11 |
---|---|
삶을 견디는 기쁨 - 2부 조건 없는 행복/한 편의 동화(험난한 길) (0) | 2016.07.28 |
삶을 견디는 기쁨 - 작은 기쁨 (0) | 2016.04.04 |
삶을 견디는 기쁨 - 무위의 미학 (0) | 2016.03.22 |
정원 일의 즐거움 - 즐거운 정원 (0) | 2007.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