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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헤르만 헤세

정원 일의 즐거움 - 정원에서 보낸 시간

by 탄천사랑 2022. 5. 11.

· 헤르만 헤세 -  정원 일의 즐거움

 

 

 


아침 7시쯤 방을 나와 햇빛이 밝게 비치는 테라스로 걸어간다.
어느덧 다시 깨어난 태양이 무화과나무 그늘 사이로 비쳐든다.
거친 화강암으로 만든 난간에는 벌써 온기가 감돈다.
여기 나의 연장들이 놓여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연장들은 모두 친숙해져 나와 다정한 동무가 되었다.
---

그건 채소밭을 가꿀 기대에 들떠 씨앗을 주문할 때 쓴 표식이지만
이미 필요 없어지고 오래된 것이다.
고대인들의 지혜와 성스러운 문헌들이 오늘날 구식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짓밣히고 이 쓰레기 더미처럼 비웃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생각 있는 사람들, 한가한 사람들, 몽상가들, 정감 있는 사람들에겐 값진 것이다.

그렇다.
마치 바라보고 생각하노라면 기분을 안정시켜 주는 모든 것들처럼 성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열정과 충동의 사려 깊은 주인이 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개도하고 세상을 가르치고, 이념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어내려는 그 열정,
저 결렬한 쾌락을 우리는 자제해야한다.
지금 세상은 안타깝게도 이 고귀한 충동이 다른 모든 이들을 피와 폭력과 전쟁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명하다는 것은 현자에게는 연금술이자 유희인 것이다.
세계가 거칠고 격렬한 충동에 지배되는 동안에도, 그러니 우리는 겸허해지자. 
가능하면 세계가 질주하며 흘려가는 시대 속에서도 저 영혼의 고요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옛 사람들이 칭찬하고 노력했던 것이니, 우리도 그 선한 것을 따르자.

제발 서둘러 세계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갈 것이다.

주위의 뜨거운 한낮이 침묵을 지키며 무겁게 내려앉는다.
멀리 공중에서, 골짜기 깊숙한 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손수레가 굴러가는 소리, 가끔 불꽃이 탁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불길이 나무뿌리를 바싹 말리며 탐욕스럽게 갉아 들어간다.
조용히, 그러나 무료한 기분은 없이 
나는 땅에 무릎을 꿇고서 부드럽게 손으로 재를 모아 멋들어진 둥근 체를 채운다.

방금 전에 태운 불에서 생겨난 그 재 속에 흙을 섞는다.
오랫동안 따스하고 축축하게 퇴비가 쌓여있던 땅바닥에서 서서히 발효하고 부패한 흙이다.
마구 섞인 그것을 흔들면, 
체 밑으로 재가 된 흙의 고운 작은 알갱이들이 쌓인다.
일부러가 아니라도 나는 그렇게 흔들며 
서로가 하나가 되게 하는 또렷한 박자 속으로 빠져든다.
그 박자 속에서 결코 지치지 않는 기억은 
다시 음악을 만들어내고, 제목도 작곡가도 모르는 곡을 나는 함께 흥얼거린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나는 이름, 모차르트다.

그의 오보에 시중주곡.... 
그래, 이제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명상의 유희가 떠오른다,
벌써 몇해 전부터 나는 그 생각을 열심히 굴려 왔고 
유리알 유희-20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참으로 멋진 착상이다.
그것의 골격은 음악이고 그 기초는 명상이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음악의 대가이다.
이 아름다운 환상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의 덕분이었다.
즐거운 시간에 그것은 내게 유희이자 행복이다.
고통과 혼란의 시간에는 위안이 되고 분별을 심어주었다.

여기 불가에서, 재를 거르는 체 곁에서 
크네히트처럼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때로 그 음악을 연주한다.
유리알 유희를, 

유희를 하는 동안 흙덩어리가 쌓여 체를 통해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 사이에 기계적으로, 오른손으로는 필요할 때마다 
연기를 돋우거나 새로 체에 흙을 채운다.

헛간 쪽에서 커다란 해바라기가 나를 바라보고 
포도나무 덩굴 너머로 멀리서 한낮의 푸른 향기가 스며 올 때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지난날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현자와 시인, 탐구가와 예술가가 한마음으로 
수백 개의 성문을 지닌 웅장한 정신의 사원을 세우는 모습을 본다.
나중에 언젠가 나는 그것을 글로 묘사해야겠다.
다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그러한 시기는 조만간 오거나 전혀안 올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게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요 재프 크네히트의 다정하고 의미 깊은 유희가 
동반 여행자인 늙은 나를 시대와 계산으로부터 벗어나 
성스러운 형제들에게 다가가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의 조화로운 합창 역시 나의 목소리를 받아 주리라.  

 

 

 

※ 이 글은 <정원 일의 즐거움>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헤르만 헤세  - 정원 일의 즐거움

역자 - 두행숙
이레  - 2001. 10. 30.

[t-22.05.11.  20220509-16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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