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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세 가지 만트라

by 탄천사랑 2022. 5. 16.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세 가지 만트라
산 모퉁이를 돌자 만년설을 뒤집어쓴 설산 히말리아가 아이맥스 영화처럼 거대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래 납작바위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요기(요가 수행자)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눈은 지그시 감겨 있고,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손은 허공중에 무드라(깨달음의 형상)를 그리며 정지해 있었다.  신비 그 자체였다.

거대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박혀 있는 불상처럼 그렇게 요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리까지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만이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요기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첫눈에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완벽한 스승이었다.
바로 그런 스승을 만나기 위해 나는 인도까지 온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로 이끌린 그의 발에 이마를 갖다 대며 말했다.

​"스승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이 고통의 삶으로부터 저를 구원의 세계로 인도해주십시오. 당신과 같은 완벽한 스승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기는 천천히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호수 같은 그의 눈동자에 초라한 내 얼굴이 비쳤다.
그 눈은 내 영혼을 단숨에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윽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받아들일 만큼 완벽한 제자인가?  나는 완벽한 제자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한번도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서 어떻게든 내가 완벽한 제자라는 걸 증명해 보여야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성자께서 긴 머리를 하고 계신 것처럼 저 역시 장발입니다.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끈기있게 머리를 길렀습니다.  그런 점을 봐서라도 절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런 진지한 자리에서 왜 그렇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요기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뭐 이런 녀석이 있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말했다.

​"물론 머리카락의 길이가 영적인 깊이를 상징한다고는 저도 생각지 않습니다.
  일단 절 받아주시기만 하면 제가 완벽한 제자라는 걸 차차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반 어거지로 싯다 바바 하리 옴 니티야 난다의 제자로 입문했다.
그는 홀로 북인도 쿤자푸리 산의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거칠게 짠 야크 털 담요와 토기로 된 물항아리가 전재산이었다.

아침마다 물항아리를 들고 골짜기로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것이 내게 주어진 첫 임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복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다, 발을 헛딛기라도 하면 다치는 건 둘째치고 항아리를 깨 먹기 십상이었다.
항아리가 없으면 큰일이었다.  물은 싯다 바바보다도 내가 더 필요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었다. 
그토록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던 요기가 내가 입문한 뒤부터 완전히 딴 사람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는 더이상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지도 않으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산을 쏘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를 사정없이 부려먹었다.
필요도 없는 밭을 갈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먼 곳까지 나가서 땔감으로 쓸 소똥을 주워오게 했다.
나는 갑작스레 심한 노동을 하느라 입술이 부르틀 정도였다.
열흘 뒤 요기는 내게 말했다.

​"나는 40 년 동안을 혼자 자 버릇했기 때문에 그대가 옆에 있으니까 영 불편하다. 
  게다가 그대의 그 오리털 침낭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대는 오늘 당장 동굴 밖에다 작은 움막을 짓고 거기서 혼자 자도록 하라."

​그렇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싯다 바바는 또다시 산 뒤로 사라져 버렸다.

히말라야 기슭이라곤 하지만 낮에는 태양이 열대지방 못지않게 뜨거웠다. 
하루만 뙤약볕에 서 있어도 콧등이 벗겨질 정도였다. 
그런 살인적인 햇볕 아래서 집을 지으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되어간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가 찾아오면 돌을 쌓아 움막을 짓게 하는 것이 인도 요기들의 전통임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티벳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파도 스승을 찾아갔을 때 수없이 집을 지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두말없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짓는 집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돌산이라서 주위에 돌이 널려 있었다.  나는 넓적한 돌들을 주워다 벽을 쌓기 시작했다.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돌을 쌓아 올라가니 그럴싸한 벽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서 아침에 길러온 물을 나 혼자서 다 써버리고 만 것이다.

​벽을 다 쌓아갈 무렵, 나는 갈증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항아리를 들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런데 물을 길어 갖고 올라와 보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 있었다.
내가 하루 종일 힘들게 쌓은 돌벽이 사방에 무너져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그 기이한 요기가 한 짓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날 골탕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날 쫓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움막을 지으라고 해놓고는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재빨리 때려 부순 것이다.

그렇다고 증거도 없이 함부로 스승을 다그칠 순 없는 일이었다.
제자는 어찌됐든 스승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저녁에 갑자기 납작바위 뒤에서 나타난 싯다 바바 하리 옴 니티야 난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내게 왜 움막을 짓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억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일 다시 짓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요기는 동굴 안에서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자고,
나는 동굴 밖에서 쓸쓸히 오리털 침낭에 들어가 오리처럼 부스럭거리며 잠을 잤다.
영적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다음날도 똑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 요기는 내게 서둘러 움막을 지으라고 말하면서, 
움막이 완성되면 요가 수행자에게 필수적인 세 가지 만트라를 전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만트라는 '옴 마니 밧메 훔'처럼 신비한 힘을 가진 단어나 문장을 반복해서 외는 것으로, 
인도뿐 아니라 동양에선 오랜 전통을 가진 수행법이다.
사실 그 동안 나는 몇 군데의 명상센터에서 만트라 명상법을 배우긴 했지만
히말라야 요기에게서 만트라를 전수받을 기회는 아직 없었다.

서둘러 물을 길어오고 간단한 밀가루떡으로 아침을 때운 나는 다시 돌을 날라다가 벽을 쌓기 시작했다. 
어제의 경험이 있어서 한결 속도가 나고 힘도 덜 들었다.
물을 길러 갔다간 똑같은 일을 당할까 봐 나는 물도 아껴 가며 마셨다.
잠만 잘 것이기 때문에 지붕이 높을 필요도 없었다. 
웬만큼 높이가 됐을 때 나는 서둘러 나뭇가지들을 겪어다가 지붕을 얹었다. 
내가 봐도 그럴싸한 움막이 완성되었다.
히말라야에서 요가 수행을 하는 구도자가 머물기에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내가 완성한 집을 바라보고 있는데 싯다 바바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저 위쪽의 넓은 바위로 올라가자고 재촉했다.
그곳에 가서 세 개의 만트라를 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대에 차서 그를 따라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그를 따라잡느라 숨이 턱까지 찼다.

과연 동굴 뒤쪽으로 해서 올라가니 그곳에 널따란 바위가 있었다.
바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전망은 이틀 동안의 힘든 노동을 잊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다.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수많은 히말라야 영봉들이 꿈결처럼 아련히 떠 있었다.

숨을 돌리면서 전망을 감상하고 있자니까 요기가 말했다.

"그대는 눈을 감고 이곳에 앉아 잠시 명상에 들라, 
  반 시간 동안 그대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 다음 그대에게 만트라를 전수하겠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의 지시대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단전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 시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요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동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토록 힘들여 지어 놓은 움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돌들만 사방에 소똥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지붕에 덮었던 나뭇가지는 이미 한쪽 구석에서 불타버린 뒤였다.

한참 뒤에 나타난 요기는 오히려 더 큰소리였다.
내가 참을성 없이 내려오는 바람에 만트라 전수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었다.
만트라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고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날이 1년 중 가장 길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도 나는 또다시 동굴 밖에서 외롭게 잠을 청해야만 했다.
동굴 안에서는 전날보다 더 크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요기였다. 
이제 나는 깨달음이고 뭐고,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완벽한 스승이란 완벽한 허구에 불과했다.  이대로 그의 밑에 있는 건 시간 낭비였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요기는 벌써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재빨리 배낭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무려 열이틀 동안 생고생을 한 게 억울했다.
마침 물항아리가 눈에 띄어서 나는 그것을 들어다가 납작바위 위에 냅다 내동댕이쳤다.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요기가 돌아와 이 꼴을 보면 뭔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길로 쏜살같이 근처 마을로 내려온 나는 곧장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마침 히말라야의 다른 마을로 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지 직전, 신작로 저편에서 누더기 담요를 두른 걸인 한 사람이 걸어왔다.
가까이 오는데 보니 거지가 아니라 장발을 한 싯다 바바 하리 옴 니티야 난다가 아닌가!

물항아리를 깬 것 때문에 나를 잡으러 오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겁이 났지만 달리 숨을 수도 없었다.
요기는 내가 버스를 타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열린 차창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에게 세 가지 만트라를 전수시켜주기 위해서 왔다.
  이 세 가지 만트라를 기억한다면 그대는 다른 누구도 스승으로 섬길 필요가 없다.
  그대의 가장 완벽한 스승은 그대 자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기는 차창 너머로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세 개의 만트라를 전했다.

첫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너 자신에게 정직하라.
세상 모든 사람과 타협할지라도 너 자신과 타협하지는 말라. 그러면 누구도 그대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찾아오면, 그것들 또한 머지않아 사라질 것임을 명심하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넌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

셋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누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거든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네가 나서서 도우라.

말을 마치고 나서 요기는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옴--- " 하고 진동을 보냈다.
그 순간 척추 끝에서 온 몸을 마비시킬 것만 같은 강한 진동이 일면서 몸 전체로 퍼졌다.
축복과 환희의 물결이 내 안에 밀려왔다.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미치광이로 알았던 그가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요기의 축복이 끝남과 동시에 뿌웅 하고 버스가 출발했다.
물항아리를 깨뜨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나는 그와 헤어지고 말았다.
싯다 바바는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봐 주었다.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하나가 바람에 날아가 그에게로 가 닿았다.

그 이후 인생의 여러 길을 다니면서, 나는 언제나 싯다 바바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탄 버스를 지켜보던 그 모습 그대로 언제나 내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버스는 점점 멀어지고,  모퉁이를 돌아가고, 

다른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멈춰서지만
싯다 바바는 늘 그렇게 그만큼의 거리에서 내 여행길을 지켜보고 있다.  

 

 

※ 이 글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열림원  - 1997.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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