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류시화. 정채봉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아름다운 도둑

by 탄천사랑 2022. 6. 2.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아름다운 도둑
여름비가 퍼붓는 날이면 비시누가 생각난다.
그리고 비시누를 생각하면 보리수나무들 위로 억수같이 퍼붓던 인도의 장맛비가 생각난다. 
그 장마비 속으로 비시누는 맨발을 하고서 뛰어다니곤 했다. 
길바닥에 홈이 패일 정도로 빗방울은 굵기만 했다.
아대륙 인도에 우기가 찾아오면 

그렇게 하루에 한차례 씩 감자만 한 빗방울들이 머리가 아프도록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빗속을 뛰어 다니는 비시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시누는 하루에 한번씩 내가 생활하는 명상센터에 찾아왔다.
그렇다고 명상을 배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명상을 배우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비시누는 열 살의 소년이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비시누는 어린 소매치기였다.

비시누가 하루 한번씩 명상센터에 들르는 것은 뭔가 훔치기 위해서였다.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비시누가 훔쳐갈 만한 물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다.
모두가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소지품이랄 것도 없었다.
또 소매치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시누가 다가오면 조심을 했다.
그래서 비시누는 더더욱 훔치기가 어려웠다.

어린 도둑이긴 했지만 비시누는 매력있는 아이였다.
인도 소년답게 눈이 크고 얼굴이 잘 생겼으며, 집안이 가난하고 출신이 나빠도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 비시누가 난 맘에 들었다.
그래서 명상센터의 식당에서 갖고 나온 음식을 비시누와 함께 나눠 먹곤 했다.
오늘 뭐 좀 건진 게 있느냐고 물으면 비시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오늘은 아무 소득도 없었어요.
  하지만 내일은 뭔가 훔칠 수 있을 거예요.'

비시누는 언제나 그렇게 희망적이었다.
단 한번도 내 앞에서 절망한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어땠지?' 하고 내가 물으면 언제나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일은 뭔가 소득이 있을 거예요."

비시누의 그런 뜻밖의 태도는 수피즘(이슬람교 신비주의 학파)의 위대한 스승 주나이드의 일화를 생각나게 했다. 
주나이드는 늙어서 제자들로부터 '당신의 스승은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자기가 만났던 한 훌륭한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여행중에 사막에서 길을 잃은 주나이드는 어떤 도둑과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매일 밤 도둑은 주나이드에게 말하곤 했다.

"자, 난 물건을 훔치러 갑니다. 
  당신은 여기서 쉬면서 날 위해 기도해 주시오."   도둑이 돌아오면 주나이드는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라도 훔쳤소?"   도둑은 말했다.
"오늘밤은 실패했소.  하지만 신의 뜻이 그렇다면 내일 밤 난 또다시 시도할 것이오."

도둑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희망에 차 있었다.
여러 해를 명상과 사색을 계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을 때면 
주나이드는 늘 깊은 절망에 빠져 이 모든 어리석은 짓을 포기하려고 마음먹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그 도둑이 하던 말을 떠올리고서 주나이드는 수행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주나이드가 그 도둑을 스승으로 삼았듯이,  나 역시 어린 비시누에게서 배울 것이 있었다.
아무 소득도 없는 상태에서도 변함없이 희망을 간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시누는 소매치기를 할지언정 다른 인도 소년들처럼 구걸 행위는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잃지 않는 아이였다.
또한 비오는 날이면 맨발을 하고서 보리수나무들 사이로 난 신작로를 뛰어가곤 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퍼지는 비시누의 웃음소리는 삶의 희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난 비시누가 소매치기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총명한 머리와 희망적인 태도로 공부를 하거나 뭔가 다른 일을 하면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비시누의 조언자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나는 비시누를 불러 앉혀 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비시누, 너도 이젠 네 인생을 생각해야지. 네 이름만 해도 인도 최고의 신에게서 따온 이름이잖아.
  그런 훌륭한 이름을 가진 네가 좀도둑으로 세월을 보내는 건 옳지 않아."

비시누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또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학교를 다니든지,  아니면 여기서 열심히 명상공부를 해봐. 

  학비가 필요하다면 내가 대주겠어. 난 네가 도둑질을 그만두고 좀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바래."

잠자코 듣고 있던 비시누는 크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 동안 좀도둑에 불과한 비시누에게 나처럼 조언을 해주려고 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비시누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명상센터를 떠났다.

이튿날 아침 비시누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비시누는 그것을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어제 해주신 충고 정말 고마웠어요.
  지금까지 나한테 인간적인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가져왔어요. 앞으로 새롭게 살도록 할게요. "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너무 감격해서 콧등이 시큰할 정도였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작은 상자 안에 크리스털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수정이 명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크리스털 목걸이가 인기를 끌던 때였다.
나는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러웠다.

"뭣하러 이런 걸 사왔어?  돈도 없으면서."  그러자 비시누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제가 돈이 어딨겠어요.
  저기 크리스털 파는 미국 여자한테서 훔쳤어요. 아무튼 어제 제게 해주신 말씀 명심할게요."

난 아직도 비시누가 내게 선물한 그 크리스털 목걸이를 몇 년째 갖고 있다.
그 목걸이를 볼 때마다 비시누가 생각나고,  여름비가 생각난다.
그러면 갑자기 웃음이 나고,  희망이 솟는다.  

 

 


※ 이 글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열림원 - 1997. 05. 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