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 지구별여행자」
신은 어디에 있는가
동인도 비하르 주에 있는 요가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기차가 역을 출발하고 반 시간도 채 안 돼 배불뚝이 검표원이 나타났다.
그는 좌중을 제압하려는 듯 복도에서 걸구 치는 가짜 시계 파는 청년을 떠다민 뒤,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다들 표를 보여 주시오!”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승객들은 보따리 속에 감춰 둔 표를 찾느라 더욱 부산해지고,
표 없이 탄 아줌마는 그 틈을 타 분홍색 사리로 얼굴을 가리고 나는 듯이 뒤칸으로 피신했다.
축제 시즌이 코앞에 다가오자 한 푼 얻어 볼까 하고 탔던 걸인들도 아연 긴장했다.
검은색 카이제르 수염을 하고, 코와 볼 사이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는 그 검표원은
잔뜩 거만한 태도로 승객들이 내미는 표에 검은 볼펜을 찍찍 그어 댔다.
그리고는 중간쯤에 앉은 늙은 사두(힌두교의 고행 수도승)에게도 어김없이 표를 요구했다.
그제야 내가 그 사두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만큼 그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평범한 탁발승이었다.
색 바랜 옷에 지저분한 장발머리를 머리꼭지에 둘둘 말아 올린 그는 남의 자리에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앉아 있었다.
영국이 인도 땅에 철도를 건설한 이후,
열 정거장 정도는 그냥 올라타 은근슬쩍 남의 자리에 끼어 앉는 것이 인도인들의 전통이자 지나친 미덕이었다.
세 명씩 앉는 좌석에 대여섯 명씩 좁혀 앉는 것은 예사였다.
하지만 이제는 철도 행정이 날로 엄격해져 표 없이 탔다가 걸리면 그 자리서 철창행이었다.
보나 마나 무임승차를 한 게 분명한 그 빈털터리 사두는
검표원의 거듭되는 요구에도 묵묵부답 눈을 감고 명상하는 자세였다.
신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결코 명상을 방해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검표원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인이면서도 수도승에 대한 존경심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인도는 사두들의 나라라고 외치며
문전걸식 돌아다니는 이 소똥 묻은 방랑승들을 멸시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사두의 어깨를 치며 재차 표를 요구했다.
“바바지, 어서 표를 보여 주시오!”
마침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사두가 눈을 떴다.
그러자 층층이 낀 눈곱과 함께 뜻밖에도 강렬한 빛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는 검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표를 보여 달라는 말인가? 난 수십 년을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사두의 범상치 않은 눈빛에 약간 움찔한 검표원은 일부러 더 배를 내밀며 말했다.
“기차표 말이오. 기차를 타려면 표를 사야 할 것 아니오.
어서 표를 보여 주시오.
표가 없으면 다음 역에서 당장 내려야만 할 것이오.” 사두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 같은 수행자들은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우린 사람들의 적선에 의지해서만 살아간다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순간 마음이 슬퍼졌다.
영적인 나라 인도에서 고작 기차표 한 장을 두고 수행승과 검표원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나는 요가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었다.
‘세상 속에서 살라, 하지만 세상에 속하진 말라.’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도라고 해도 어딜 가나 집착과 슬픔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나라에 진리를 찾아 떠나온 내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검표원은 여전히 카이제르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사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수행자든 시바 신이든, 표 없이 기차를 타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소.
보아하니 표가 없는 모양인데, 어서 일어나시오.”
그는 늙은 사두를 당장 어디론가 끌고 가 봉변을 줄 태세였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위압적인 태도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때쯤 나는 내가 나서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임승차는 위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속세를 떠난 사람을 걸인 취급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 검표원에게 돈을 집어던지며
그 사두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소리칠까 말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검표원이 문득 비아냥거리는 투로 사두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요?
진리를 추구한다면 히말라야 동굴 속에나 앉아 있으면 될 거 아니오.”
사두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는 신을 찾아서 돌아다닌다네.”
그러자 검표원은 또다시 코 옆에 난 사마귀를 실룩거리며 반박했다.
“당신들은 항상 신은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소.
그런데 또 어디로 신을 찾아다닌단 말이오?” 사두가 얼른 맞받아쳤다.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모든 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지.”
달리는 이등 열차 안에서 난데없이 사두 대 검표원의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떠돌이 수도승과 검표원이었다.
검표원은 승객들의 표를 검사해야 한다는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사두와의 논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가 핏발 선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이 기차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가 있소?
신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말해 보시오.”
허를 찌른 예리한 질문이었다.
그 순간 나뿐만 아니라 승객들 모두가 긴장했다.
이 예상치 않은 질문을 사두가 어떻게 받아넘길지 다들 염려하는 표정들이었다.
가난한 사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서 있는 배불뚝이 검표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신혼부부와 맞은편의 시크교도 청년,
때마침 지나가는 짜이(우유와 설탕과 향료를 넣고 끓인 인도식 차) 파는 소녀,
그 건너편에 앉은 서류가방 든 신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신사의 맞은편에 앉은,
검은 선글라스에 장발머리를 한 외국인 여행자에게도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는 사이 검표원은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호통을 쳤다.
“모든 곳에 신이 있다면 당연히 이 기차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오?
허풍만 떨지 말고 어서 증거를 대 보시오.”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사두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거만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다음 궁지에 몰린 엉터리 사두를 보라는 듯 승객들을 휘둘러보았다.
이윽고 사두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난 이 기차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가 있소.” 검표원이 다시금 무시하는 투로 윽박질렀다.
“그 신이 어디에 있다는 거요?
빨리 말해 보시오!”
사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불타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자기 앞에서 있는 검표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지금 내 앞에 서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소.
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소.
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당신은 지금 내게 표를 요구하고 있지만, 난 당신 안에서 신을 발견하고 있소.
그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오.”
그 순간이었다.
검표원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두의 말솜씨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이 그를 변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두의 목소리에 담긴 평화로움과 진실성이 그의 내면에 어떤 불꽃을 일으켰는지도.
어쨌든 검표원은 갑자기 어떤 것을 느낀 듯했다.
그것은 작은 깨달음이자 큰 변화였다.
공손히 태도가 바뀐 검표원은 조금 전까지의 거친 행동을 버리고,
무릎을 약간 굽혀 사두의 다리에 두 손을 갖다 댔다.
영적인 스승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인도의 오랜 예법이었다.
그리고는 부산하게 나머지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며 다음 칸으로 옮겨갔다.
내게 다가와 표를 요구할 때의 검표원의 눈빛은
조금 전 가짜 시계 장수를 떠다밀 때의 눈빛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약간 물기에 젖어 있었고, 부드럽고 평화로운 빛이 검은 동자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 온화한 빛에 전염이 되는 기분이었다.
무임승차한 사두는 눈을 감고 다시 명상에 잠기고,
승객들도 덩달아 실눈을 뜨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자기 속의 신을 찾는 모습들이었다.
눈치 없는 짜이 파는 소녀만이 어서 짜이를 마시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인간 존재의 완성을 이룬 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인가?
그는 천한 사람이든 귀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선한 자든 악한 자든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신을 발견하는 자라고
비하르 요가 학교의 창시자 스와미 사티야난다는 말했다.
※ 이 글은 <지구별 여행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류시화 - 지구별 여행자
김영사 - 2002. 11. 27.
'작가책방(소설 > 류시화. 정채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을 감고 보는 길 - 책머리에(법정) / 바다를 생각하며 (0) | 2008.06.11 |
---|---|
지구별 여행자 - 내 영혼의 여인숙 (0) | 2007.11.03 |
지구별 여행자 - 내 친구 여동생의 결혼식 (0) | 2007.09.15 |
마른 나뭇단처럼 가벼웠던 몸무게 (법정) (0) | 2007.06.26 |
然 後(뒤에야) (0) | 2007.06.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