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책방(소설266 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무라카미 하루키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 무라카미 하루키 / 하문사 1999. 05. 17.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햄 샌드위치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런 아침 시각에 맥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에 도착하는.. 2024. 2. 23. 새해의 미소-최지원(MZ 작가의 인스타)/가정과 건강 2024. 01 VOL.381 가정과 건강 - 2024. 01 VOL.381새해의 미소아침에 차가운 팔을 문지르며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다. 아, 다시 1월이 왔구나 생각한다. 세수를 하고 따듯한 차를 우려 마셨다. 서늘한 공기에 찻잔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온다. 글도 읽었다. 미소에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 글을 읽으며 나를 밝은 미소로 반겨 주던 모습, 힘들었을 텐데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해 주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미소 덕분에 잘 버티며 살아왔다. 새해에는 더 자주 미소 짓고 살아야지 소소한 다짐을 해 본다. 글 - 최지원 작가 (MZ 작가의 인스타)출처 - 가정과 건강 2024. 01 VOL.381 = [t-24.02.21. 210204-1655.. 2024. 2. 2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양초 ·「톨스토이 단편선 1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양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라. - 마태의 복음서, 5:38. 이것은 아직 농노가 해방되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랍니다. 그 무렵에는 지주에도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자기도 언젠가는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농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농노 출신으로 갑자기 지주가된, 말하자면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것처럼 귀족의 대열에 끼인 자들만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 사람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귀족의 토지에 그런 마름이 나타났습.. 2024. 1. 22. 아름다운 여름 - 샐비어의 꽃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 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실제로 여름이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내게 진득진득한 소문의 그림자까지 들러붙는 바람에 더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스스로 마네킹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 까닭이었을까 사람들은 뒤늦게 내게 소문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내가 단순한 마네킹의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이 작은 소리에는 민감해지는 반면 꼭 들어야 할 중요한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것이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집중력과도 관계되는 현상이라.. 2023. 12. 1. 루 ru - 인생이라는 싸움에서는 슬퍼하면 진다 ·「킴 투이 - 루」 인생이라는 싸움에서는 슬퍼하면 진다 우리를 현재가 기다리는 곳으로 데려가 준 것은 캐나다에서의 첫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우리 그룹의 베트남 아이 일곱 명을 이끌고 현재로 가는 다리를 함께 건너주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같은 정성으로, 새 땅에 옮겨 심기는 우리를 돌봐주었다. 선생님의 펑퍼짐한 허리, 볼록하게 솟은 풍만한 엉덩이가 느리고 편안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우리는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해졌다. 그녀가 새끼 오리들을 이끄는 어미 오리처럼 앞장서서 안내한 피난처에서 우리는 온갖 색과 그림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고마운 선생님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낯선 땅에 온 여자아이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랄 수 .. 2023. 11. 25. 남들도 다 그래? 난 안 그래!-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고명환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 고명환 / 라곰 2023. 06. 15. '남들도 다 그러니까'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때에 사자들은 당당하게 자신에게 외친다. "난 안 그래!" '남들도 다 그래'에 속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삼각형의 아랫부분을 차지한다. 이쪽에 위치한 사람들은 스스로 뭔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외부 탓으로 돌리며 그 자리에 머무른다. 책을 읽고 사자가 된 사람들은 '난 안 그래!'라고 외치며 점점 위로 올라가 결국 소수들만 차지하는 삼각형의 맨 위쪽에 자리한다. 자본주의는 늘 이런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이 개념을 반드시 이해하고 우리는 삼각형의 위로 올라가야 한다. 사자 단계가 되면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다. 용기가 생긴다. 지혜가 생긴.. 2023. 10. 24. 호텔 선인장 - 약 속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약 속 이제, 이 이야기는 곧 끝이 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아파트의 주민들은 차례차례 이사해 갔습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이사한 것은 오이였습니다. 공원을 가로 질러 거리 반대편에 있는, 큰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운동기구를 놓아 둘 충분한 공간이 있고, 주방은 대면식이었습니다. 더구나 목욕물도 시원스레 잘 나와서 오이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래층 방에는 속물과의 신혼부부가, 위층에는 왠지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는 버섯 학자가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고 오이는 생각했습니다. 대층 짐을 옮겨 온 후, 오이는 그 새로운 방에, 2가 언젠가 직장에서 가져 온 해변의 포스터를 붙.. 2023. 9. 20. 호텔 선인장 - 계기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선선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아주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예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열세 살 먹은 수고양이로 건물 주인이 기르는 녀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상당한 멋쟁이로 방탕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낮잠만 자는 늙은 고양일 뿐입니다. 이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면, 실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공간이 있습니다. 우측 .. 2023. 9. 15. 모든 돌파구는 끊고 버리는 것에서 나온다-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스티븐 코비 외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 스티븐 코비. 로저 메릴. 레베카 메릴 / 김영사 2002. 08. 15. 영화 은 원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마을로 돌아오다가 시기심 때문에 발작을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만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짓에 큰 충격을 받아 몇 주일 동안이나 절망에 빠진 채 망언 자실에게 앉아 있는다. 마침내 사제 한 사람이 다가와 그가 속죄할 방법이 있다고 일러 준다. 그는 사제의 가르침에 따라 선교사 무리와 함께 정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참회를 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무기와 갑옷이 가득 든 그물을 등에 지고 간다. 그 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그는 자신의 짐을 지고 필사적으로 산을 오르고, 협곡을 건너고, 폭포를 올라간다. 선교사 한 사.. 2023. 9. 1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제1장 / 6 답장은 우유 상자에 ·「히가시노 게이고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6 쇼타가 새 양초에 불을 붙였다. 눈에 익은 탓인지 촛불 몇 개로도 방 구석구석까지 환히 보였다. "편지, 안 오네?" 고헤이가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이렇게 간격이 길었던 적이 없는데, 이제 편지 안 하려나?" "이제 안 할 거야" 쇼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혼을 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기가 죽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야. 그리고 어느 쪽이건 편지 따위는 다시는 쓰고 싶지 않겠지."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쓰야는 쇼타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도 너하고 똑같은 마음이고, 그 정도는 써 보내도 괜찮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써 보냈으니까 답장이 안 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2023. 8. 28. 나는 책만 보는 바보 -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 안소영 / 보림 2005. 11. 04. 나는 책만 보는 바보 햇살과 함께하는 감미로운 책 읽기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몸시 작고 내가 쓰던 방은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남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을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방 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 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2023. 8. 27. 두 청년 - 관포지교 / 최웅빈 관포지교 - 최웅빈 / 선비 1991. 09. 01. 두 청년 위수에 홀로 앉은 저 어옹 바늘 없는 낚싯대로 무엇을 낚으려나 백 년 묵은 잉어도, 천년 묵은 이무기도 아니라네 태평천하 이룰 문왕을 기다린다네 낭랑한 노랫소리가 산골짜기를 울려 퍼져 길게 여운을 남긴다. 노랫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포숙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날렸다. "저 친구 배짱 하나는 알아 주어야 겠군. 피신해 있는 처지에 한가하게 노래나 부르고 있으니....., "때는 한 여름철이었다. 때 아닌 노래 소리에 놀라 멈추었던 매미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포숙은 흘려내리는 땀방울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평평한 들판이 나타났다. 풀밭가에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쉬어 가.. 2023. 8. 9. 사뮤엘 스마일즈 - 1. 인격의 힘 ·「사뮤엘 스마일즈 - 인격론」 인격의 힘 인격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본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상의 인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진실로 훌륭한 사람들... 근면한 사람들, 정직한 사람들, 자제력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실한 사람들... 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하며 본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선한 것들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들 덕택이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천재성은 항상 감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천재성만으로 존경을 받을 수는 없다. 존경심을 부러 일으키는 것은 인격이기.. 2023. 8. 3. 아름다운 여름 - 그의 기록 2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그의 기록 2 그날 나는 오전 10시 무렵의 텔레비전 뉴스를 귓가로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주부 대상의 시간대라서 그런지 앵커는 30대 후반의 여자 아나운서였지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나는 누나가 걸레를 들고 가까이 다가와 바닥을 닦으려 하자 두 발을 모두 소파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내 앞에 엎드린 누나의 오른쪽 어깨가 문득 눈에 들어 오더군요. 습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는 그 우울한 어깻죽지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마흔이 넘어버린 누나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때, 브라운관 안에서 초등학교 교사처럼 이상 고온 현상을 친절히 설명하던 부드러운 목소리를 제치고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 것입니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해드립니다.라.. 2023. 8. 1. 시와 맥주와 오이 새끼 -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 목순옥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 목순옥 / 타임비 2012. 05. 03."제 동생입니다. 자, 옥아 인사드려라. 이분은 황금찬 씨 되시고 여긴 천상병 씨라고...., "오빠의 소개에 따라 꼬박꼬박 고개를 숙인 후에 자리에 앉은 나는 그분들을 다시 바라보았다.그 가운데 시인 천상병 씨는 인상이 좀 독특했다. 함께 있을수록 괴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못 생기도 했지만 행동도 우스웠다. 콧구멍을 후비면서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 깔깔깔 웃어대니 사춘기 여고생의 눈에 예쁘게 비칠 리가 없었다. 이것이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38년 전 명동의 갈채 다방 한 모퉁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상주 여자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오빠에게 놀러와 있던 참인데 라는 .. 2023. 7. 28. 당달 봉사의 눈뜨기와 공양미 50달러 - 문학기행 / 김윤식 '울란;과 '우데'의 울림을 찾아 나선 멍텅구리. 이들 당달봉사 떼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찾아온 것은 울란바토르에 닿은 지 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심청이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참으로 용감하게도 이들 청맹과니들은 상당한 비용을 지불, MIAT를 전세 내어 몽골을 탈출, 국경을 넘어 러시아령인 브라야트 공화국의 수도인 이른바 울란우데 RED GATE를 향하지 않았겠는가. 어째서 울란우데인가. 일목 요원한 해답이 주어진다. 울림 때문. '울란'이란 울림, '우데'라는 울림에 매혹되지 않았다면 굳이 그곳을 찾아갈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것은 '울란바토르'의 울림 때문에 몽골 여로에 나섰던 까닭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것.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였다. 도시 상공에서 본 울란우데는 한가운데 강을 .. 2023. 7. 21. 3박자 글쓰기의 균형감각 (머리말) - 김윤식 문학기행 / 김윤식 김윤식 문학기행 - 김윤식 / 문학사상사 2001. 03. 30. 머리말3박자 글쓰기의 균형감각보여 주기, 들리게 하기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런 경지를 오랜동안 꿈꾸어 왔다. 순수 감각의 길이 그것. 오랜동안 내가 살아온 '연구자의 논리'에 대한 생명적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울림은 들리지 않는다. 사원에서 나온 울림이 몸에 닿고 몸 주변을 에워싸면서 몸을 울린다. 울림이란 그러기에 함께 울림이되 온몸으로 느끼는 그 무엇이다. 울림에 온몸이 함께 울 때의 그 진동의 폭과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잴 수 있을까. 요컨대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헛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헛것이 시원의 땅을 지나 몸에 닿고 몸 주변을 에워싸면서 몸을 환하게 한다. 헛것이란 그러기에 함께 환하게 하되 온몸으로 환하게 하는.. 2023. 7. 16. 그레고리 맥도널드 - 1 플레치 ·「그레고리 맥도널드 - 플레치」 1'이름은' '플레치' '정식 이름은' '플래처' '성은?' '어원' '뭐라고요?' '어원, 어원 플래처요. 아는 사람들은 보통 플레치라고 부르죠' '어원 플레처,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일단 애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하면 천 달러를 주겠소. 그리고 만약 내가 제시하는 얘기를 거절하고 싶다면 그냥 천 달러만 가지고 가시오. 그 대신 우리끼리 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면 절대로 안 되오. 됐소?' '혹시 범죄 아닙니까? 요컨대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소' '어쨌든 졸습니다. 천 달러를 준다는데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죠. 도대체 뭡니까?' '나를 살해해 주시오' 모래 묻은 검은 구두가 동양풍의 양탄자를 가로 질러.. 2023. 7. 13. 아름다운 여름 - 푸른 노트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푸른 노트 이 스튜디오에 처음 들어서던 날의 그 어둠을 기억한다. 한낮의 햇살 같은 조명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데스크, 그 주변을 포위해 들어오는 검은 실루엣,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말없이 나를 압도하던 어둠…… 그때 그 시간을 기록해둔 필름에 크로마키 기법이 사용된 걸 보면 데스크 뒤에 파란색 배경 판이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엔 감감하기만 하다. 묵직한 카메라와 모니터 따위가 어울려 자아내던 금속성의 분위기 역시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때 본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뿐이다. 9년 전 입사 시험 때였다. TV 주조 성실의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스튜디오의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나는 그.. 2023. 7. 12. 120% COOOL - 다이어트 코크 ·「야마다 에이미 - 120% COOOL」 사랑을 잃을 때 나는 그 직전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 하면 그럴 때 반드시 내 귀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귀의 고막이 무거워지면서 이상한 현실이 느껴진다. 온 세상에 울려 펴지는 모든 소리의 혼란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이 귓전에서 무너져서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마음의 한 부분에 달라 붙는다. 소리는 선별되고 그것을 튕긴다. 그러면 나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랑을 잃기 전에 내 귀는 언제나 이런 소리를 골라 낸다. 술잔을 들었을 때는 얼음의 맑은 소리만이 들린다. 재즈를 들을 때는 왠지 색스폰 소리만 귀에 들어온다. 슐슐. 즉 찰리 파커를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나의 사랑 편력은 다양해진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 2023. 7. 9. 豫言者 - 2 사랑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 豫言者 예언자」 2 -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말했다.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 위엔 잠시 정적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안을 땐, 전신全身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할 땐 그 말을 믿으라, 비록 북풍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들의 꿈을 흐트러 놓을지라도. 왜?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 2023. 7. 2. 청소부 밥 - 03 삶에 지쳤을 때는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로저는 컴퓨터 모니터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그 청소부를 만날 시간이었다. 로저의 머릿속으로 지난 일주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청소부를 처음 만났던 지난주 월요일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경영진 접대로 골프장에서부터 칵테일을 곁들인 저녁식사까지 동행하느라 주말에도 쉬지 못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퇴근 전까지 급한 이메일을 완성하려면 아무래도 청소부와의 약속은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로저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로 향했다. 청소부 밥은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해 녹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밥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그냥 그렇죠. 뭐." 로저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저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2023. 6. 28. 파이어족을 꿈꾸는 당신에게-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고명환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 고명환 / 라곰 2023. 06. 15.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들은 스스로 창의적인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생산을 하기에 생산활동 자체가 즐겁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창의적인 생산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파이어족을 꿈꾸지 않는다. 은퇴할 생각이 없다. 창조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면 일하지 않고 편하게 즐기며 살아야지'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어도 당신이 지금 털어버리고 싶은 그 힘든 상태, 그 혼돈은 계속된다. 종류만 달라질 뿐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혼돈은 계속된다는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다. - 조던 B. 피터슨의 '질서 너머' 중에서 파.. 2023. 6. 19.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후기/세상의 길 위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후기 세상의 길 위에서 이 책에 담긴 원고는 각 장 서두에 적혀 있는 것처럼, 2005년 여름부터 2006년 가을에 걸쳐 쓰인 것이다. 단숨에 간추려서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조금 조금씩 써나갔다. '자,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가면서, 그래서인지 그다지 길지 않은 책이지만 쓰기 시작해서 다 마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쓰고 난 다음에도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여행기나 에세이집은 몇 권 냈지만, 이처럼 하나의 테마를 축으로 해서, 나 자신에 대해 정면으로 이야기했던 경험이 별로 없으므로, 그만.. 2023. 6. 17. 칼릴지브란 - 豫言者 / 배가 오다. · 「칼릴지브란 - 豫言者예언자」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 받은 자, 또한 시대의 여명黎明이었던 그는, 올펄레즈 시市에서 열 두 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이윽고 열 두 해째 되던 해, 수확의 달 이엘룰Ielool 초이렛날에 그는 성벽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안개에 싸여 그의 배가 오고 있는 것을. 그러자 그의 마음의 문은 활짝 열리고 기쁨은 바다 멀리 날아갔다. 두 눈을 감고 고요한 영혼으로 그는 기도했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자 그는 문득 슬퍼져 마음 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평화로이 슬픔도 없이 떠날갈 수 있을까? 아니, 영혼의 상처 하나 없이 나는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으리라. 내 여기.. 2023. 6. 12. 청소부 밥 - 02 고독과 피곤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고독과 피곤 로저 킴브로우는 부엌으로 연결된 뒷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어둠이 집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로저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지만 너무 피곤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보고서 숫자들과 오늘 오갔던 수많은 대화, 이매일 내용들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잠을 자두지 않으면 분명 내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요즘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생각할 때 늦잠을 자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로저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알람을 6시에 맞추고 수면제를 찾아 한 알 삼켰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두 딸 중 누군가 숨이 넘.. 2023. 4. 20. 청소부 밥 - 한국의 독자들에게. 「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 청소부 밥」 이미지 다음에서 추천의 글 '청소부 밥'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거울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경쟁과 승리라는 도그마에 빠져 앞만 보고 질주하다 지쳐버린 우리들의 모습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부 밥'은 일상의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 고 '남들이 질주해가니까, 낙오될까 봐, 불안해서 쫓아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대답하는 우리에게 청소부 밥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서두를 필요 없다" 고 '청소부 밥'은 커다란 변하를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 강요하며 몰아세우는 법도 .. 2023. 4. 16. · 앤 브래셰어즈-파이어 아일랜드 「앤 브래셰어즈 - 파이어 아일랜드」 [230412-171556-2-3] 난생처음 겪는 불공평함을 쉽게 극복하는 이는 없다. 유일한 예외는 피터 팬뿐이다. 피터 팬은 자주 불공평함을 맞다뜨렸지만 늘 잊어버렸다. 내가 보기에 이 점은 피터 팬을 다른 이들과 구분해 주는 잔정한 차이점이다 - J. M. 베리 1. 기다림 앨리스는 페리 선착장에서 폴을 기다렸다. 폴은 활기찬 목소리로 자동응답기에 오후 배로 도착한다는매시지를 남겼다. 참 폴다운 짓이었다. 폴은 1시 20분 배나 3시 55분 배라고 꼭 집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폴의 말뜻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페리 운항 시간표를 오래도록 째려보았다. 분명 폴이 탔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앨리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을 억누른 채, 1시 20분에 떠.. 2023. 4. 14. · 이용범-사과나무/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이용범-사과나무」 [230407-174722] 운동권 팀장으로 수배자가 된 상은을 보호하기 위해 지훈은 같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자기집 과수원으로 피신시키고 그곳에서 지훈의 마음을 알게 된 상은은 자수를 결심한다. 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1. 눈을 떴을 때 창가에는 투명한 우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유병에는 아카시아꽃이 꽂혀 있었는데, 나는 꿈인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햇살이 얹힌 아카시아꽃이 눈부셔서 나는 한동안 우유병이 놓인 창틀을 바라보았다. 늦잠꾸러기. 상은이 쪽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향해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이슬방울 같은 물기가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이부자리를 걷었다. "아침 일찍 산 밑에까지 걸어갔다 왔어. 아카시아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너.. 2023. 4. 9. · 짐 해리슨-가을의 전설 「짐 해리슨-가을의 전설」 - 이미지 다음에서 1914년 10월 말, 러드로우 집안의 세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1917년이 되어서야 참전했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몬타나의 초토를 출발하여 앨버타의 캘거리로 향했다. '한번 찌르기'라는 이름을 가진 샤이엔족의 늙은이 하나가 그들과 동행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한 뒤 말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들을 신통찮은 조랑말에 태워 보낼 수는 없지, 자네가 따라갔다가 말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작별의 날 새벽에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 말들은 순종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이른 시간, 들소가죽을 둘러쓴 아버지는 호롱불을 든 채 마굿간 안에 서 있었고,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들을 차례.. 2023. 3. 25. 이전 1 2 3 4 5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