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순옥 -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제 동생입니다. 자, 옥아 인사드려라.
이분은 황금찬 씨 되시고 여긴 천상병 씨라고....,"
오빠의 소개에 따라 꼬박꼬박 고개를 숙인 후에 자리에 앉은 나는 그분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 시인 천상병 씨는 인상이 좀 독특했다.
함께 있을수록 괴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못 생기도 했지만 행동도 우스웠다.
콧구멍을 후비면서 앉아 있다가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다방이 떠나갈 듯 깔깔깔 웃어대니
사춘기 여고생의 눈에 예쁘게 비칠 리가 없었다.
이것이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38년 전 명동의 갈채 다방 한 모퉁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상주 여자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오빠에게 놀러와 있던 참인데 <교육 주보>라는 신문의 편집장이던 오빠는
나를 친구 문인들과 만나는 자리에 데리고 가서 인사시켰던 것이다.
그 시절 예술가란 예술가, 예술가 지망생들이란 지망생은 모조리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갈채, 돌체, 르네상스, 은성, 쌍과부 집, 송원 기원 등은 대표적인 아지트였다.
문인, 음악가, 화가들은 끼리끼리 아울려 예술을 논하고 동인지를 만들고 청춘의 열정을 발산했다.
그때의 다방이나 술집은 지금의 그것과는 다르다.
예술가들에게 술과 차를 팔아서 먹고 살았지만 그 대신 예술가들의 사무실로 한몫을 했고,
때로는 재정적인 보탬까지 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낭만과 인정이 넘치던 곳이었다.
예술가도, 예술가 지망생도 아니었으나 나 역시 많은 젊은 날들을 이곳에서 보냈다.
문인은 아니었어도 많은 문인들을 오빠로 친구로 동생으로 여기며 어울렸다.
그들처럼 내가 '명동시절' 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오빠의 이런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인연의 첫 가닥을 쥐게 된 우리는 그 후 오빠, 동생처럼 스스럼없이 지냈다.
알고 보니 시인 천상병 씨는 유망한 시인이자 평론가로도 이름을 날리던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오빠는 늘
'상병이 그놈이 참 천재는 천재다'라며 칭찬했고 돈이 생기면 은성의 외상 술값을 대신 갚아 주기도 했다.
-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것은 남편의 첫 추천 시 <강물>이다.
남편은 마산중학교 5학년 때 <문예>지에 이 시로 유치환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다.
추석날 마을 뒷산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남편은
무덤 앞에서 절하며 우는 사람들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사람은 죽게 마련이구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덧없는 인생을 표현해 보았던 시라고 했다.
그때의 담임선생님이 뒷날 한국 문단의 원로 시인 김춘추 씨였는데
남편은 김 선생님의 시집 <구름과 장미>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도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강물>을 담임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얼마 후
한반 친구가 와서 '책에 너랑 똑같은 이름이 나와 있더라'라고 남편에게 일러주었다.
서점에 가서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자신의 이름과 함께 <강물>이 게재되어 있어 정식으로 등단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뒷날 평론까지 추천이 되어 나를 만나던 당시에는 평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던 중이었다.
'평론 하나 써달라'라며 천상병 씨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천상병 씨는 친구라고 해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놓고 욕을 했다.
"야 이 새끼야, 그게 뭐 표절이지 니가 쓴 거냐. 그걸 작품이랍시고 발표를 했냐."
남편의 이런 모습만은 말년까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새로운 시집들이 부쳐져 오면 읽어본 후에 꼭 평을 했다. 어렵게 쓰는 시인들이 있으면 무척 싫어했다.
"도무지 이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쌍놈의 새끼! 이게 시냔 말이야.
시는 사람이 쉽게 느껴야 되고 알아보게 써야 되는데.
니도 봐라 이게 무슨 말이냐 말이다."
그러고는 책장을 탁 덮어버리거나 휙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무척 좋아했다.
"참 좋지? 이거는 나보다 더 좋은 얘기를 해놨는데.
참 좋지?" 하면서 나의 동의를 구하곤 했다.
"시는 어렵게 쓰면 안 돼."
말년의 남편은 늘 그렇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쉬운 말로 시를 썼다.
가끔 내가
"너무 이렇게 쉽게 쓰면 어떡하느냐"라고 하면
"생활 시인데 뭐"라고 답하곤 했다.
남편은 '믿음'과 '생활'이 시의 근본이라고 말해왔다.
너무 외로우면 시를 못 쓰는 법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고 했다.
또 생활을 사랑하기에 하찮은 일상사에서도 무엇인가를 느끼고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생활은 넓다.
가만히 혼자 있어도 시는 있는 것이다.
눈을 뜨는 한 시는 언제나 구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잡기만 하면 시는 태어난다.
(중략)
나는 맑은 눈으로 생활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찮은 것들에서 나는 시를 찾고 있다.
그래서 생활은 나의 시인 것이다.'
시작노트에서 밝혔던 것처럼 남편은 정말 생활 시를 사랑했다.
장모님, 처조카 딸, 강아지 두 마리 등
집안 식구들이 모두 시의 소재가 됐고 어휘도 말하듯이 쉽게 써 내려갔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쓰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떠오르거나 청탁을 받았을 때에는
한참을 말도 않고 혼자 머릿속에 썼다간 지우고 썼다간 지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일단 펜을 들면 원고지에 내리달아 쓰는데 고치지도 않고 단숨에 써 내려갔다.
시를 쓴다는 게 중요하지 일체의 형식은 무시하는 버릇도 끝내 고치지 않았다.
원고지도 새 것이 아니라 맥주를 흘려 축축해진 데에 그대로 쓰는가 하면
연필이던 볼펜이든 손에 잡히는 데로 쥐고 썼다.
맥주를 쏟아 아예 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고치려 들지 않았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게 뭐예요. 다시 쓰세요."
"안 쓴다. 니가 베끼든지 그대로 주든지 나는 이제 안 본다. 모른다!"
한 번 손을 떠나면 끝이었다.
한 번 쓴 건 두 번 고쳐 쓰지 않았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도 스스로 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읽어보면 '됐나? 됐냐?'라고 물어보는 정도였다.
때로는 '제목을 뭘 하지? 뭘 하지?' 고민하면 내 생각을 말해주기도 했다.
만일 그게 마음에 들면 칭찬이 쏟아졌다.
"아, 그게 좋다.
너는 어찌 그리 잘 아냐?" 하고
남편이 시를 쓰는 경우는 일정치 않았다.
청탁 원고의 마감이 다 되어서 부랴부랴 준비할 때도 있었고 심심해서,
혹은 시상이 막 떠올라서 써 내려갈 때도 있었다.
간혹 심심해서 '귀천'으로 전화를 할 때면 내가 시를 좀 쓰라고 권한다.
알았다며 전화를 끊은 남편은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전화를 했다.
'시 한 편 썼다' 하고
시를 쓴 날이면 남편은 원고를 머리맡에 둔 째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퇴근해서 들어온 나는 시부터 읽어보고는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저 왔어요'하며 인사를 건네면 그때서야 알은 체를 했다.
"왔구나, 왔구나. 시 써 놨다. 봤나? 되겠더냐?"
내가 고치라고 해도 절대 고치지 않을 것이면서도 여전히 남편은 내 의견을 물어보곤 했다.
남편은 시인이라는 데 대해 어떤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는 문학의 왕이요 문인 가운데에서는 시인이 최고라고 했다.
시는 마음에 있는 대로 느끼는 대로 정직하게 쓰지만
소설을 쓰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므로 시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물론 '시인이 최고'라고 한 것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일컫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인데, 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그 자긍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들 가운데 서정주 씨를 '시인 중의 제일 시인'이라며 존경했던 남편은 그의 서정시들을 무척 좋아했다.
남편의 시 중에 <소릉조>라는 시가 있다.
도연명과 같은 대시인이 되고 싶어서 도연명의 호를 제목으로 붙였노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이 '누구처럼'을 꿈꾸었던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에 퍽 인상에 남던 시이다.
소릉조
- 70년 추석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나는 영영 | 가지도 못하나?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남편이 도연명과 같은 대시인이 되었든 못 되었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편은 힘들게 시를 쓰면서 행복해했고 감사해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나는 가난하고 슬퍼도 행복하다. 그 나의 행복과 결과가 이 시집으로 태어난 것이다.'
언젠가 시작노트에 이렇게 쓴 것을 읽고 나는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데 행복한 기분으로 시를 쓰기 위해 남편이 곧잘 필요로 했던 것이 있었다.
맥주와 오이 새끼가 그것이다.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든가 시가 나올 듯 말 듯 할 때 곁들이면 슬슬 시를 나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 것이었다.
시와 맥주와 오이 새끼는 남편의 생활 중 삼위일체로 잘 어우러지는 한 부분이었다.
남편은 오이를 무척 좋아했다.
때때로 '귀천'에 전화해서 '오이 좀 사 오라'라고
'오이가 없어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다'라고 투정할 정도였다.
이렇듯 좋아하는 오이와 맥주를 곁들여서 먹을 수 있으면 절로 행복해져서 시가 막 나오려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작은 오이와 맥주 한 잔을 주면 즉시 내게 전화를 했다.
"이것 봐라. 엄마가 오이 새끼를 줘가지고 맥주 한 병하고 먹으니까 참 좋다.
시가 나올라고 한다. 고맙대이, 고맙대이."
시를 쓰다가도 막힐 경우에도 약처럼 찾는 것이 오이 새끼이다.
"내가 도저히 오이 새끼가 없어서 시를 쓸 수 없다. 엄마한테 맥주 한 병을 더 얘기해 도고.
시를 쓸 수가 없단 말이다."
"알았어요. 내가 사가지고 갈게요."
시를 쓸 때마다 오이 새끼를 찾던 남편이
그러나 정작 가장 좋아하던 자작 시는 오이 새끼 없이 썼던 <귀천>과 첫 추천 시 <강물>이었다.
오이 새끼가 정말 시를 쓰기 위한 준비물이었는지,
아니면 장수를 쏘려면 말을 먼저 쏜다는 전법대로
맥주를 마시기 위한 애교스러운 핑계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오이 새끼가 있음으로 해서 남편은 행복해했고
진짜 한 편의 시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p72)
※ 이 글은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목순옥 -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타임비 - 2012. 05. 03.
[t-23.07.28 220719-1704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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