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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49~77)

by 탄천사랑 2022. 1. 30.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8월 14일, 일요일. 아침나절에
칼라 토머스(Carla Thomas)와 오티스레딩(Otis Redding)의 음악을 MD로 들으면서 1시간 15분간 달렸다.
오후에는 체육관의 풀에서 1,300미터를 수영하고, 저녁에는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다.
그 뒤에 하나레이 거리의 입구 근처에 있는 돌핀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시고, 생선 요리를 먹었다.
'왈루(waiu)'라고 하는 흰 살 생선이었다.  숯불구이로 주문해서 간장을 쳐서 먹는다.
생선에 곁들인 것은 야채 케밥. 커다란 샐러드가 따라 나왔다.

 

....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진구 구장은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나는 그 당시부터 꽤 열성적인 야쿠르트 구름 스왈로스의 팬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봄바람은 따뜻하게 스쳐 지나가는 더 바랄 것 없는,

아주 기분 좋은 봄날의 하루였다.

 

....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때가 봄이었는데, 가을에는 400자 원고지로 200매 정도의 작품 한 편을 다 썼다.
다 쓰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다 쓴 작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몰라, 내친김에 문예지의 신인상에 응모해 보았다.
응모할 때 복사본을 만들어두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낙선하고 원고가 그대로 어딘지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현재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는 작품이다.
나로서는 작품이 햇빛을 보게 될지 못 보게 될지 하는 것보다,

그걸 다 써낸 일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 초봄, 문예지 <군조(君像)>의 편집부로부터
"당신 작품이 최종 심사 후보에 올랐습니다"라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내가 신인상에 응모했던 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날의 분주한 생활에 너무나도 쫓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들어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네?' 하고 의아스럽게 여긴 그런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 작품은 신인상을 받았고, 그해 여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서른 살이 되어,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꼭 소설가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신진 소설가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 그 후 카페를 경영하면서
두 번째 작품으로 <1973년의 핀볼>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장편소설을 써내고,

그 사이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써냈다.
스콧 파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변역까지 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은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고,
두 작품 모두 유력한 후보작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결국 상은받지 못했다.

 

....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장편소설의 집필에 들어가,

그해 가을에는 소설 취재를 위해 일주일 정도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4월까지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써냈다.
여하튼 나중이 없으니까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어 글을 썼다.
있지도 않은 힘까지 총동원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 전업 소설가가 되고 나서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게를 그만두고 소설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은 나와 아내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생활 패턴을 일신하는 것이었다.
해가 뜰 때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되도록 빨리 자도록 하자,라고 정했다.
그것이 누구나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방식이었다.

 

.... 우리 부부는 7년 간의 '열린 생활'에서 '닫힌 생활'로 크게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러한 열린 생활이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어느 기간 존재했던 것은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많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 시기는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종합적인 교육 기간 같은 것이었고, 나에게 있어 진정한 학교 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었다.
학교라는 데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배운 후에는 나와야 하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아침 5시 전에 일어나 밤 10시 전에 잔다고 하는,

간소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면,
나는 '오늘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하고 생각했을 때는 항상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너는 일단 소설가로서 생활하고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시간에 집에서 혼자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원 전철에 흔들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할 필요도 없고 따분한 회의에 참석할 필요도 없다.
그건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에 비하면 근처를 1시간 달리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지 않는가?
만원 전철과 회의의 광경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의지를 북돋아 러닝슈즈의 끈을 고쳐 매고 비교적 매끈하게 달려 나갈 수 있다.
'그렇고말고,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하루 평균 1시간 달리는 것보다 혼잡한 전철을 타고

회의에 참석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락(凋落)은 그 나이 언저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분기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p77)

 

 

※ 이 글은 <달리기를 말할 때...>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역자 - 임홍빈
문학사상 - 2009. 01. 05.

 [t-22.01.30   220130-17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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