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 문학기행」
머리말
3박자 글쓰기의 균형감각
보여 주기, 들리게 하기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런 경지를 오랜 동안 꿈꾸어 왔다.
순수 감각의 길이 그것. 오랜 동안 내가 살아온 '연구자의 논리'에 대한 생명적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울림은 들리지 않는다.
사원에서 나온 울림이 몸에 닿고 몸 주변을 에워싸면서 몸을 울린다.
울림이란 그러기에 함께 울림이되 온몸으로 느끼는 그 무엇이다.
울림에 온몸이 함께 울 때의 그 진동의 폭과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잴 수 있을까.
요컨대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헛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헛것이 시원의 땅을 지나 몸에 닿고 몸 주변을 에워싸면서 몸을 환하게 한다.
헛것이란 그러기에 함께 환하게 하되 온몸으로 환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헛것에 온몸이 환하게 될 때의 그 밝기와 그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잴 수 있을까.
요컨대 들리게 할 수 있을까.
보여 주기, 들리게 하기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런 경지를 오랜 동안 꿈꾸어 왔다.
순수감각의 길이 그것.
오랜 동안 내가 살아온 '연구자의 논리'에 대한 생명적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명적이라 했거니와 이는 '연구자의 논리'가 내게 가한 숨 막힘을 가리킴인 것.
이에 대한 필사적 도주의 길이 모색되었다 해서 괴이한 일이겠는가.
그 첫 번째 숨통 트기가 이른바 현장 비평이었다.
연구자가 피해야 할 늪인 현장 비평이란 대체 무엇이었던가.
내겐 먼저 그것은 '비평가의 사상'을 향한 길이었다.
현장 비평에 줄기차게 나아감으로써 '연구자의 논리' 와 균형감각 모색을 꿈꾸어 마지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지란 지속되지 않았다.
번번이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져 파탄으로 몰아가곤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나는 그 원인을 시대적 탓으로 돌린 적이 있었다.
'역사의 끝장'(헤겔) 의식에의 시달림이 그것,
균형감각 파탄의 틈이 점점 커지자
이번엔 현장 비평이 '연구자의 논리'의 논리에 군림하는 형국을 빚어내지 않겠는가.
숨이 가빠 왔다.
필사적 도주가 다시 시작될 수밖에.
자료 더미에서 벗어나기,
살아 숨 쉬는 작품의 늪에서 벗어나기가 그것.
자료의 시체들에 덜미를 잡히지 않기,
작품이 쳐놓은 그물에서 슬기롭게 벗어나기, 그 길이 내겐 길 떠나기였다.
이 숨통 트기에서 몇 개의 붉은 열매가 맺어졌을까.
나는 그 숨통 트기를 야성의 회복 혹은 순수 감각의 부름 소리라고 여기곤 했다.
'표현자의 감각' 이 그것이다.
사람이 있어 이렇게 물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대가 살아온 '연구자의 논리',
'표현자의 사상' 및 '표현자의 감각'이 어떤 균형감각을 이루었는가라고.
근대문학 연구, 현장 비평, 그리고 학술 - 예술문학 기행의 3박자 글쓰기엔
과연 어떤 리듬 감각이 작동되고 있으며 그것은 얼마만 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라고.
이런 물음에 대해 나는 민첩하지 못하다.
나는 가까스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 <이광수와 그의 시대(1981)>와 <우리 소설의 표정(1981)>,
<초록빛 거짓말, 우리 소설의 정체(2000)> 그리고 <문학과 미술 사이(1979)>,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1999)> 등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책을 만들어 주신 분들, 읽어 주신 분들께 마음속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 2001. 3. 저자.
김윤식 - 문학기행
문학사상사 - 2001. 03. 30.
[t-23.07.16. 210730-07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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