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 이용범-사과나무/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by 탄천사랑 2023. 4. 9.

「이용범-사과나무」

[230407-174722]

 

운동권 팀장으로 수배자가 된 상은을 보호하기 위해 지훈은 같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 자기집 과수원으로 피신시키고 그곳에서 지훈의 마음을 알게 된 상은은 자수를 결심한다.

 

 

등 푸른 생선을 먹는 아침
1.
눈을 떴을 때 창가에는 투명한 우유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유병에는 아카시아꽃이 꽂혀 있었는데, 나는 꿈인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햇살이 얹힌 아카시아꽃이 눈부셔서 나는 한동안 우유병이 놓인 창틀을 바라보았다.

늦잠꾸러기. 상은이 쪽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향해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이슬방울 같은 물기가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이부자리를 걷었다.

"아침 일찍 산 밑에까지 걸어갔다 왔어.
 아카시아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너무 좋았어."

입 안에 달콤한 물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얼른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부뚜막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청어를 굽고 있었다.

"이렇게 구워도 되는지 몰라."

그녀는 석유 곤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쫓으며 석쇠를 뒤집었다.
가는 석쇠에 묻어 있던 검정이 기름방울처럼 떨어져내렸다.

"너무 태우면 안 돼."

나는 그녀 곁에 다가가서 석쇠를 빼앗아 들고 철사에 묻어 있는 재들을 털어 냈다.
그녀는 물러날 생각도 없이 노릇하게 익어가는 청어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청어를 좋아했어."
"...."

청어는 잘 익어 있었다.
대충 밥상을 차리고, 나는 수돗가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모터로 뿜어올린 지하수에는 땅 속 깊이 묻어두었던 온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웃옷까지 벗어붙이고 머리를 감고는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밥상 앞에 앉았다.
바지락을 넣고 끓인 시금치국이 아주 시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자전거에 상은을 태우고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 펼쳐진 뽕 나무밭은 유난히 푸르렀다.
푸른 오디 열매는 따스한 햇살에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능금 밭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철교로 향했다.
철교는 그대로였다.
아직 학교가 파하지 않았는지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철교 밑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양말을 벗고 강물에 발을 담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에 눌린 모래알들이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상은은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두꺼비집을 지었지만 금세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배가 고파질 때까지 상은과 나는 모래사장에 있었다.
농막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커다란 감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웠다.

"감꽃이 피었어."

나는 옷자락에 감꽃을 담고 감나무 아래까지 뻗어 있는       칡넝쿨을 끊어냈다.
푸르게 보이는 감꽃은 가래 하나 없는 통꽃이었다.

"목걸이야."

나는 칡넝쿨에 꿴 감꽃을 그녀 목에 걸어주었다.
그녀는 잠시 탄성을 내지르고 나서 하와이 처녀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농막 창가에 꽃 목걸이를 걸어놓고 그녀는 두 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사이 나는 양파를 까고 마늘을 다졌다.
그녀의 잠은 깊고 조용했다.
열려진 창을 통해 바람이 불어왔고 싱그러운 사과꽃 냄새가 실려 있었다.
꽃가루가 내려앉은 듯, 잠든 그녀의 모습은 희고 창백했다.
왜 저렇게 여위었을까.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열무 단을 들고 수돗가로 나왔다.
그녀에게 열무김치를 담가줄 생각이었다.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시기 전에 다 먹어치울 수 있을지 걱정했다.
마늘과 양파 냄새 때문인지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나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말한다.

"그렇게 앉아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아냐, 열무김치를 담갔어."
"네가?"
"날씨가 더우니까 금방 익을 거야."

저녁 무렵, 우리는 함께 다녔던 중학교로 향했다.
토요일이라서 어둠이 내려앉은 운동장은 황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넌 달리기를 참 잘했지?"
"잘 뛰진 못했어."
"그래도 넌 항상 이겼잖아."
"고작 네 명이 뛰는 거였는데 뭘."

네 명 중에서 1등을 하기는 쉽지 않은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가슴 앓이를 하던 그 시절, 
그녀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농막으로 돌아왔을 때 감꽃은 시들어 있었다.
그녀는 누렇게 바랜 꽃목걸이를 목에 걸며 몹시 아쉬워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은목걸이를 꺼냈다.

"너한테 줄게."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네 엄마한테 드릴 거잖아?"
"너한테 주려고 산 거야."

나는 상은이 목에 은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녀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아직도 날 좋아하니?"

불을 끄고 바닥에 누웠을 때 그녀의 숨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침대를 바라보았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문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고상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검은 그림자 안에서 은목걸이가 잠깐 빛을 발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대답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그녀의 그림자가 먼저 누워 버렸다.
무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려운 오줌을 제때 누지 못한 아이처럼 나는 몸이 달았다.
그녀가 다시 일어나 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농막에 머무르고 있던 며칠 동안, 우리의 일과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커피를 마셨다.
그런 다음에는 사과밭 주위를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대개 마을 주변이나 읍내를 돌아다녔다.
밤에는 밖으로 나가 늦은 시간까지 바위에 앉아 있었다.
때로는 억새가 우거진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꺾어진 억새에서 스며오는 풀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별자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다.

읍내에 나갈 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날에 읍내 시장으로 구경을 갔다가 주막집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은 있었다.
상은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와 마주칠 뻔했다.

그러나 정작 내 심장을 얼어붙게 한 것은 대수와의 뜻하지 않은 재회였다.
우리를 먼저 발견한 것은 대수였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어느 건물 앞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단한 인파였다.
사람들은 건물 입구를 향해 줄을 지어 몰려들고 있었는데,
건물 벽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대형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별반 유명하지 않은 가수들과 탤런트, 그리고 코미디언들의 얼굴이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 상희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이트클럽이 새로 문을 열었나 봐."

상은이 대형 화환에 쓰인 붓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형 사진 앞에는 먼 길을 달려왔을 연예인들이 일렬로 앉아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 주고 잇었다.
상희가 있어,라고 그녀가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상은의 팔을 잡고 몇 걸음 뮬러 섰다.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손길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웬일이야? 방학도 아닌데."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등 뒤에는 대수가 서 있었다.
검은 색 양복에 붉은 색 넥타이까지 맨 아주 말쑥한 차림이었다.
상은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개업이야.
 그래서 아는 애들을 죽 불러 모았지.
 밤에 한 번 놀러 와.
 화끈하게 술 한 잔 살게."

그는 상은과는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상은이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듯 내 옆구리를 쿡 찔렸다.
나는 저녁에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괜찮을까?"

사과밭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상은은 몹시 불안해 했다.
나는 그녀의 불안감을 지워주기 위해, 
그 친구는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를 거라고 말해주웠다. 
상희가 문제야, 라고 그녀가 대꾸했다.
아, 하고 나는 탄식을 쏟아냈다.
아마 대수는 상희에게 우리를 만났다는 사실을 얘기할 것이고, 
상희는 집에 들르지 않은 상은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구나 경찰은 이미 상은의 집에 다녀갔을 것이다.

한동안 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불안해했다.

"차라리 자수를 할까 봐."

그녀는 뭔가 결심을 굳히려는 듯 혼자서 사과밭을 배회했다.
커다란 장수말벌에 쏘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하루 종일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벌에 쏘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짧은 비명소리를 듣고 사과밭으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머리를 내저으며 벌을 쫓고 있었다.
나는 웃옷을 벗어 그녀의 머리에 뒤집어 씌운 후 농막 안으로 숨어들었다.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때어내고 짧은 머리카락을 들들어 올렸다.
목덜미는 세 군데나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살 속에 박힌 가늘고 긴 벌침이 보였다.
벌침을 뽑을게,라고 말한 다음 나는 그녀의 목에서 은목걸이를를 벗겨내고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의 더운 체온이 입술에 닿았다.
잠시 몸을 움찔했지만, 그녀는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해가 지자 우리는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몹시 침울해져 있었다.
약속한 일 주일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녀가 이곳에 더 있어주기를 원했지만, 아무 것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풀밭에 앉아 그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바위에 묻어 있는 따뜻한 온기를 만지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언젠가는 저 사과나무도 잘려 나가겠지."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라고 나는 대답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보살핌을 받겠지만,
열매가 부실해질 즈음 사과나무는 누군가의 톱에 잘려나갈 것이다.

"서 있는 것들은 그대로 세워뒀으면 좋겠어."
"서 있는 것들은 언젠가 쓰러지게 되어 있어."
"맞아....,
 나도 이제 넘어졌으면 좋겠어. 
 내 안에 길러온 죽음들을 꺾어버리고 편안하게 누웠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있었으면....,
 단 한 번 사랑을 하고, 
 단 한 번 꽃을 피우기 위해 수 천만 년을 화석 속에 갇혀 지낸 씨앗처럼.....,"

그녀는 팔베개를 하고 내 겉에 누웠다.
상은이 달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렸을 땐 달에 토끼가 사는 줄 알았어.
 달에 드리운 얼룩 그림자가 토끼의 그림자인 줄 알았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달은 무척 미끄러울 텐데 토끼는 왜 미끄러지지 않을까.....,"
"계수나무가 있잖아."
"그래, 그걸 붙들고 있었을 꺼야."
"절구도 있고....,"
"그렇담 달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을 거야.
 한 그루는 잘라서 절구를 만들었겠지."

토끼는 외롭지 않게 살았을까, 하고 그녀가 물었다.
한 쌍이 살았으니까 외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대개 무기 하나씩을 갖고 있지.
 이빨이나 발톱, 날카로운 뿔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토끼는 무기가 없어.
 도망가는 기술만 갖고 있지.
 모든 초식동물이 마찬가질 거야.
 우리에게도.... 무기는 없어."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얹었다.

"고마워."
"뭐가?"
"이렇게.... 나하고 함께 있어준 거."

정말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기회를 주고, 곁에서 지켜볼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구속되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 난 네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연약하지 않아.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난 모든 걸 잊었어.
 이젠 가야겠어.
 내일.... 읍내 경찰서에 찾아갈 거야."

경찰서를 찾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치러야 할 고통이라면 먼저 매를 맞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경찰서에 가고 싶지는 않아.
 목욕을 해야겠어."

그녀는 풀밭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검푸른 어둠 속을 걸어 농막으로 돌아왔다.

"목욕물을 데워줄게."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 그녀는 날씨가 더우니까 더운 물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밤이야.
 감기가 들지도 몰라."

나는 농막 뒤쪽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베웠던 능금나무와 썩은 싸리나무 가지들을 농막 뒤쪽에 쌓아놓았다.
아마 어머니는 그 장작들을 아궁이에 집어 넣고, 가마솥에 국수를 끓여 일꾼들에게 먹였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잿더미를 삼태기에 담아 사과밭의 거름으로 썼을 것이다.

장작에 불을 피운 후 가마솥에 물을 채웠다.
그녀는 부뚜막에 걸터앉아 내가 불을 지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싹 말라 있던 장작들은 쉽게 불이 붙였다.
아궁이 속에서 싸리나무 가지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운 물을 고무 통에 담아 수돗가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상은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타월을 든 채 어둠 속으로 번져 가는 따뜻한 김을 바라보았다.
나는 양동이를 엎어놓고 그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아."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타월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했던 말 생각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제자들을 불려놓고 일일이 발을 씻어주었다고 한 말....,"
"생각나."
"그때, 네가 말했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든 무릎을 꿇을 수 있다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발을 씻어주고 싶다고,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험한 발바닥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나도 네 발을 닦아주고 싶어."

그녀는 어둠 속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그녀가 앉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풀썩 양둥이 위에 주저앉았다.
고마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발에서 하얀 양말을 벗기고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찬물을 섞었다.
그녀가 물 속에 발을 담갔다.
나는 물고기 등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발목에 물을 적시고 비누거품을 묻혔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발을 닦기 시작했다.
세숫대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손을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문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찢어진 연처럼, 그녀의 좁은 어깨가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두덩을 바라보았다.
굵고 따뜻한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미안해....,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닌데."

오랫동안 그녀는 울었다.
나는 살갗에 남아 있는 비눗기를 씻어내고, 손톱깎이로 그녀의 발톱을 깎아주었다.

"내가 바보였어.
 난 너무 많은 길들을 스스로 지우면서 살아왔어.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난 내 아픔만 생각하면서 살았어.
 내 상처가 덧날까 봐 근심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잘 목 엉킨 실매듭을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짜고 싶어."
"....... "
"몰랐던 내가 바보였어.
 넌 이렇게 날 좋아하는데.....,
 그걸 몰랐던 내가 잘못이었어."

그녀는 다시 눈물을 보였다.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수건으로 발에 묻은 물기를 닦고, 나는 그녀의 발목을 내 무릎 위에 얹었다.
그런 다음 나는 그녀의 흰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들어갈께, 라고 말한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습기에 젖어 있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녀의 눈부신 어깨가 드러났을 때 나는 눈을 돌려버렸다.
그녀는 하나씩 옷을 벗고는 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녀가 목욕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사과밭을 걸어 다녔다.
어둠 속에서 엇비치는 그녀의 알몸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렸다.
여린 달빛을 받아 양파 속껍질 같은 그녀의 속살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 고운 살결 위에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문양을 찍어두고 싶었다.
살 속 깊이 새겨진 문신처럼 영원히 씻어낼 수 없는 사랑의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녀는 속옷 차림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가 부끄러워 할까봐, 나는 불을 꺼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로 있어도 돼.
 이젠.... 부끄럽지 않아."

그녀는 부끄러움을 잊은 듯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나는 전등을 껐다.
창으로 스며든 달빛이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한동안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어슴푸레한 어둠의 결을 따라 그녀의 둥근 그림자가 드러나 보였다.

나는 희미한 달빛 아래 누워 있는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대로 서서 그녀가 잠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둥그렇게 눈을 뜬 채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리 올라와,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녀의 눈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침대 곁으로 몸을 옮겼다.
그녀는 내가 침대에 올라올 수 있도록 벽 쪽으로 몸을 접었다.
가슴이 떨려서 나는 제대로 몸을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침대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살갗을 맞댔다.
그녀의 살갗 끝까지 손을 뻗고 있을 혈관들이 나의 실핏줄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전해져 오는 떨림이 내 몸을 떨게 하고, 마침내 온몸으로 번져갔다.
그 떨림을 누르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었을 때,
메마르고 숨 가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아줘.
나는 가만히 심호흡을 한 다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지며 나를 입술까지 안내해 주었다.
파리한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나는 가만히 내 입술로 그녀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녀의 체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가 내 머리를 안았을 때, 난 그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주린 아기가 엄마의 젖무덤을 파듯 그녀의 속옷 위로 돋아난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젖꼭지는 금세 딱딱하게 부오 올랐다.

아기를 다루듯, 정성껏 그녀의 몸을 쓸어갔다.
나는 그녀의 몸에 있는 땀구멍과 잔털 하나에까지 타액을 묻히고,
그녀의 몸을 만들어내고 있는 둥근 곡선마다에 지문을 묻혔다.
검 풀더미에 누운 사람처럼, 그녀는 몸을 뒤틀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연장을 든 농부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흰 살을 캐기 시작했다.
땅 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새순은 흠뻑 젖어 있었다.
지표 아래 묻힌 금맥을 찾듯, 나는 칼끝 같은 몸을 집어 넣었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열렸다.
상은은 알고 있을까.
제 몸이 열리는 걸.


3.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나는 새벽을 맞았다.
나는 새벽 일찍 사과밭으로 나가 안개 자욱한 산들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옷을 벗은 자리엔 붉고 여린 햇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난밤에 흘렸던 땀방울처럼, 사과꽃마다 탐스러운 이슬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지난밤의 흥분과 감동이 아직까지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지나간 시간을 병 속에 담아둘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상은과 함께 보낸 지난밤을 담아두었을 것이다.
몸에 돋아난 돌디마다 여운처럼 남아 있는 그녀의 체취와 가쁜 숨소리,
그리고 마지막에 흘린 눈물방울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밤새 뿌려놓았던 습기들은 부챗살처럼 펴져오는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야 할 곳에도 이런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까.
검고 침침한 공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상은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 역시 새벽 무렵에야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에게서 보았던 간밤의 열정과 흥분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몸을 뜨겁게 데웠던 알몸은 담요에 가려져 있고, 땀에 젖었던 머리칼은 잘 말라있었다.

아침밥을 짓고 난 뒤에야 나는 그녀를 깨웠다.

"몇 시야?"
"열 시쯤 됐어."

그녀는 부리나케 몸을 세우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진 후 수돗가로 나가 얼굴을 씻었다.
그녀와 마주한 밥상이 새롭게 느껴졌다.
서러워야 할 마지막 밥상이지만, 내게는 너무나 기분 좋은 밥상이었다.
사랑하는 한 여자의 남자가 되어, 
그녀와 마주 앉아 밥그릇을 비운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그녀는 짐을 챙겼다.
나는 농막 안을 청소하고 군용 침대를 접어 시렁 위에 얹어놓았다.
텅 비어버린 방 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우리는 사과밭으로 향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러 마을로 내려갔다.
먼저 사진을 찍자고 말한 사람은 상은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세워진 '행복사진관'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사진을 찍으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우표 값만 주면 원하는 주소로 사진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단 의자에 앉아 사진기를 향해 고개를 세웠다. 
웃으려 했지만 좀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사잔을 찍고 나서 나는 주인에게 하숙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서울에 가서 자수해도 되잖아?" 
"여기서 헤어지지 못하면.... 내 결심이 흔들릴지 몰라."


버스에서 내려 본 읍내는 오늘이 장날이라 사람들이 부적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나는 할 일을 찾아냈다는 듯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점심을 먹을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화가라서 곳곳에 음식점이 있었다.
나는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 앞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너무 비싸."

상은은 메뉴를 살피다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나는 소고기 스테이크와 포도주를 주문했다.
음식을 먹다 상은이 잠시 손을 멈추고 우수에 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는 그녀에게 나이프를 쥐여주며 그렇게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동안 나이프를 들지 않았다.

"다시 그 사과밭에 갈 수 있을까?"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접시를 비우고 나서 우리는 커피를 마셨고, 다시 맥주를 주문했다.

"돈이 모자랄지도 몰라."  그녀가 다시 한 번 메뉴를 확인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군가 말했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는 마지막 동전까지 다 써버리는 거라고."
"서울에 가야 하잖아."
"차비 정도는 남겨뒀어."

우리는 저녁 무렵이 다 돼서야 음식점을 나왔다.
우리는 시장 골목을 가로질러 경찰서 쪽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그녀는 줄곧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안타까워서 나는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젠 나 혼자 갈게."  그녀는 경찰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옆에 있어줄게."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이대로.... 그냥 가.
 네가 지켜보고 있으면, 난 안으로 들어 기지 못하고 다시 도망치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내게 건네주었다.

"감옥에 가면.... 아무것도 필요 없을 거야.
 이 안에 내 일기장이 있어.
 어렸을 때부터 썼던 일기야.
 경찰들이 내 방을 뒤질 것 같아서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어.
 불에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상은의 입가에 잠시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기장 하나 맡길 데가 없는 게 조금은 서글펐어.
 하지만 이젠 됐어.
 네가 있으니까.....,"

사랑해, 라고 말한 다음 그녀는 발꿈치를 들어 올려 내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고는 경찰서 현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그녀는 잠깐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막 달려가서 그녀를 빼앗아오고 싶었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정을 넘기면서 비는 그쳤지만 내 옷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머리 위에 내려앉은 물기를 털며 일어셨을 때,
자주색 승용차 한 대가 경찰서 현관 앞으로 달려가 섰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자동차의 뒷문을 열었고, 곧이어 상은이 모습을 나타났다.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추워 보였다.
수갑을 차지는 않았지만, 두 명의 건장한 사내에게 팔이 잡혀 있었다.

그녀를 태운 승용차가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나는 정문 앞으로 달려가 승용차 안을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정문을 빠져나온 승용차는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도로 위를 질주해 갔다.
나는 승용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p102)
※ 이 글은 <사과나무>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이용범 - 사과나무
생각의나무, - 2001. 03. 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