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투이 - 루」
학교에서 역사를 필수 과목으로 듣는 것 때문에 불평하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역사 수업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각자 매일매일 살아남느라 너무 바빠서 집단의 역사를 쓸 시간이 없다.
얼어붙은 넓은 호수들이 장엄한 고요 속에 펼쳐지고,
단조로울 정도의 평온한 일상이 매일매일 이어지고,
풍선과 색종이 조각과 초콜릿으로 사랑을 기념하는 그런 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메콩강 삼각주의
내 증조부 무덤 가까이에서 만난 늙은 여인을 눈여겨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늙었고,
너무 많이 늙어서 이마에 맺힌 땀이 마치 땅의 고랑을 적시는 실개천처럼 주름살 사이로 흘러내렸다.
등이 굽었고,
너무 많이 굽어서 계단을 내려갈 때는
중심을 잃고 넘어져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뒷걸음질로 내려가야 했다.
저 손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벼를 심었을까?
저 발로 얼마나 오랫동안 논의 진흙탕 속에 서 있었을까?
지금까지 논 위로 저물어가는 해를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
30년, 40년이 흘러 등이 저렇게 접힐 정도로 굽기까지 얼마나 많은 꿈을 밀쳐냈을까?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리지만,
남편들과 아들들이 등에 무기를 지고 다니는 동안 여인들이 베트남을 짊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자꾸 그 여인들을 잊는 것은,
그녀들이 원뿔형 모자를 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묵묵히 해가 질 때까지 버텼고,
그런 뒤에는 정신을 잃다시피 잠에 빠졌다.
잠이 밀려오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산산조각이 나 있을 아들의 몸을,
혹은 난파선처럼 강 위를 떠다닐 남편의 몸을 떠올렸다.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온 노예들은 목화밭에서 고통을 노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여인들은 하루하루 커져만 가는 슬픔을 그대로 가슴속에 품었다.
그러다 너무 커진 고통의 무게에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슬픔에 짓눌려 굽고 휜 등뼈를 더 이상 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자들이 정글에서 나와 논두렁길을 걸어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여자들의 등에는 여전히 소리 나지 않는 베트남의 역사가 얹혀 있었다.
그렇게 짓눌린 채로 수많은 여자들이 소리 없이 생을 마쳤다.
그중의 한 명,
내가 알던 그 여인은 메기가 가득한 연못가에 만들어놓은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빠져 죽었다.
플라스틱 슬리퍼가 미끄러진 것이다.
누군가 그곳에 있었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늙은 여인의 몸을 간신히 가린,
보호해주지는 못하고 그저 둘러 싸고만 있던 네 장의 나무판 너머에서
원뿔형 모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살던 흙집 뒤편 가족의 분뇨 구덩이에서 두 개의 나무 발판 사이로 머리부터 떨어져 죽었다.
살이 노랗고 살갗이 반들거리는,
비늘이 없고 기억력이 없는 메기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가 죽은 뒤 나는 일요일마다 하노이 교외에 연꽃이 피는 연못에 갔다.
그곳에 가면 나이 든 여자 두세 명이 둥근 바구니 배로 장대 노를 저어 물 위를 옮겨 다니면서
벌어진 연꽃 봉우리 안에 찻잎을 넣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은 이튿날 연꽃잎이 시들기 전에 다시 가서 밤새 꽃술의 향기를 빨아들인 찻잎을 하나하나 걷어 왔다.
그녀들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며칠 밖에 살지 못하는 연꽃의 영혼이 그렇게 찻잎 속에 보존될 수 있다.
※ 이 글은 <루>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킴 투이 - 루
역사 - 윤진
문학과 지성사 - 2019. 11. 29.
[t-23.12.28. 20211212-15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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