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해리슨-가을의 전설」
- 이미지 다음에서
1914년 10월 말,
러드로우 집안의 세 아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1917년이 되어서야 참전했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몬타나의 초토를 출발하여 앨버타의 캘거리로 향했다.
'한번 찌르기'라는 이름을 가진 샤이엔족의 늙은이 하나가 그들과 동행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한 뒤 말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들을 신통찮은 조랑말에 태워 보낼 수는 없지,
자네가 따라갔다가 말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작별의 날 새벽에 그들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 말들은 순종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이른 시간,
들소가죽을 둘러쓴 아버지는 호롱불을 든 채 마굿간 안에 서 있었고,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들을 차례로 끌어안으며 작별 인사를 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와 마굿간의 서까래 밑으로 피어올랐다.
네 사람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황야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한번 찌르기'는 북부 로키 산맥에 있는 모든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동 틀 무렵 거센 바람이 불어와 누르칙칙하게 빛이 바랜 사시나무에 부딪쳤다.
떨어진 잎사귀들은 높은 목초지 위를 날아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져 갔다.
그들이 집을 떠난 이래 처음 만난 여울을 건너고 있을 떄,
바람에 흩날린 사시나무 잎들이 바위 위에 마구 들러붙였다.
그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첫눈에 쫓겨 낮은 산기슭으로 내려온 대머리독수리 한 마리가
숲 속의 청둥오리떼를 쫓다가 허탕치는 꼴을 바라보았다.
계곡을 휩쓰는 사나운 바람이 수목 저편의 차디찬 바윗돌에 부딪쳐 대는 높고 또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오쯤 되어 일행은 주 경계선을 통과했다.
산맥을 넘으면서 그들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목장을 바라보았다.
쌀쌀한 바람에 맑게 개인 공기 사이로 이미 2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목장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가깝게 보여 삼형제는 넋을 잃은 채 잠시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러나 감상적인 것을 두려워 하는 '한번 찌르기'는 달랐다.
일행이 노던 퍼시픽의 철길을 건널 때도
그는 경멸하는 듯한 시선을 똑 바로 앞쪽에다 고정시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낮이 되어 쏟아지는 햇살이 제법 따뜻하게 느껴질 무렵,
그들은 하늘을 가르는 음울한 늑대 울음 소리를 들었다.
한낮에 그런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도 가장 나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척했다.
둘째 트리스탄이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며 말에 박차를 가해 알프레드와 '한번 찌르기' 곁을 지나쳐 갔다.
맏이인 알프레드는 기도를 드렸고,
막내 새뮤얼은 주위의 식물과 동물들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식구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새뮤얼은 올해 열여덟 살이었다.
그는 1년째 하버드에 다니면서,
피바디 박물관에서 아가시라는 동물학자가 개척한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새뮤얼을 기다리느라 '한번 찌르기'는 대평원의 한쪽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길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은 바람이 다소 누그러졌다.
날씨는 한결 따뜻해졌고, 가을 아지랑이 속에서 태양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트리스탄이 암사슴 한 마리를 쏘아 잡았다.
본능과도 같은 예의 때문에 마지 못해 사슴 고기를 입에 넣으면서 새뮤얼은 구역질을 했고,
알프레드는 평소와 다름없이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명상에 잠긴 채, '한번 찌르기'와 트리스탄은 어떻게 사슴 고기를 그토록 많이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쇠고기를 더 좋아했다.
'한번 찌르기'와 트리스탄은 사슴의 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새뮤얼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난 잡식성이지만 결국은 초식을 하게 될 것 같아."
그러나 트리스탄은 진짜 육식성이었다.
그는 한꺼번에 고기를 많이 먹은 후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일하고 잠자고 여자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남은 사슴의 몸통 고기를 그는 부근의 농장 주인에게 주었다.
그날 밤을 그들은 농장의 허름한 헛간에서 묵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새뮤얼의 눈길은 줄곧 그 집 맏딸에게 머물러 있었다.
왠지 그 소녀에게 마음이 끌려,
새뮤얼은 그녀에게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를 그녀의 모국어인 독일말로 들려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고, 소녀와 어머니는 부끄러워하며 식탁을 떠났다.
다음 날 새벽 그들이 길을 떠날 때, 소녀는 밤새 뜨개질한 목도리를 새뮤얼의 목에 감아 주었다.
새뮤얼은 소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금으로 된 주머니 시계를 풀어 그녀에게 주면서 말했다.
'언녕! 이 시계가 당신을 지켜줄 거야."
'한번 찌르기'는 가축 우리 안에서 말에 안장을 얹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여자들이 가져오는 가장 심각하고 어두운 불행을
집어들기라도 하듯 새뮤얼의 안장을 집어들었다.
초봄같이 화창한 가을 날씨 속을 달려 그들은 다시 캘거리로 향히는 남은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먼지 낀 목을 축이기 위해 맥주라도 한 잔 들이킬까 하고 들어간 선술집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술집 주인이 '한번 찌르기'에게 술을 주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새뮤얼과 알프레드는 좋은 말로 술집 주인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말에게 물을 먹이느라 한 걸음 뒤쳐져서 들어온 트리스탄이
그 뚱뚱한 술집 주인을 흠씬 두들겨 패버렸다.
주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이,
트리스탄은 권총을 빼든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짐꾼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주고는
선반에 있던 위스키병을 집어들고 맥주를 양동이에 가득 채워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바깥의 나무 아래 앉아 소풍을 즐겼다.
트리스탄의 거친 행동에 익숙해져 있는 알프레드와 새뮤얼은 어깨를 한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번 찌르기'는 술로 입을 행군 후 땅에 뱉어 버렸다.
그들은 은연중에 샤이엔족의 풍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세 살 때부터 '한번 찌르기'와 가까이 지내온 탓에
그를 잘 이해하고 있는 트리스탄은 웃지 않았다.
이윽고 캘거리에 도착한 그들은 참전 지원자라고 해서 흔치 않은 환영을 받았다.
그 지방의 기병대를 이끄는 소령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콘월 지방 출신이었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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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나를 매장한 지 몇 주 후인 10월 중순의 어느 따뜻한 일요일 아침,
새뮤얼과 3세는 현관 앞에서 안장을 얹어 울타리에 비끄러매 놓은 어린 망아지를 타면서 놀고 있었다.
러드로우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이사벨이 아침 식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그가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리면서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한 일들>을 읽어주고 있었다.
이사벨은 멜빌이 넌더리나는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러드로우는 그 작가를 정말 좋아했다.
부엌에서는 페트가 트리스턴과 아이들이 소풍을 가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데커와 트리스탄이 나누는 대화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단순한 복수심에서 아일랜드인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트리스탄은 헌번 기지개를 켜고는 페트에게 다가가 그녀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제일 걱정이며,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3세가 와서 아빠의 팔을 잡아당겼다.
트리스탄은 아이에게 키스하고 나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딱 10분이예요, 아빠!"
3세는 귀엽게 소리치며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데커는 트리스탄에게 쿠바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몇 해 전 트리스탄은 그곳에서 작은 농장을 구입했는데, 지금은 두 명의 쿠바인 선원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선원들은 작년에 몬타나에 와서 접을 붙이기 위해 좋은 암말 두 마리를 실어간 적이 있었다.
트리스탄이 큰 소리로 아이들 교육 문제가 걱정이라고 말하자
데커는 아이들 아버지의 생명이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고 대꾸했다.
그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페트는 순간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경찰 아저씨들이 왔다고 소리지르는 새뮤얼의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을 놓았다.
트리스탄이 밖으로 나갔다.
데커는 그 뒤를 따라나가 그가 쿠페형 포드 자동차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경관에게 다가가는 것을 손자와 함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트리스탄은 마음을 푹 놓고 좀 따분한 기분으로 경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득 그들 중 한 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본 그 품위 있는 아일랜드인이며,
다른 한 명은 제복 차림이 어색해 보이는 악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갈바뼈 밑에서 심장이 펄떡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난 형제 둘을 잃었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남자가 말했다.
트리스턴은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쳐다보았다.
데커가 '한번 찌르기'와 함께 새뮤얼과 3세를 데리고 서 있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현관 앞에서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저쪽으로 같이 가 주시겠소?
아이들이 보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트리스탄이 말했다.
아일랜드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옷차림에 들소가죽을 두른 러드로우가
메마른 갈색의 잔디밭을 맨발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 분은 내 아버님이오."
트리스탄은 별다른 표정을 내비치지 않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지만
러드로우는 백발이 된 머리를 흔들더니
"뭘 하자는 거요?" 라고 쓴 석판을 쳐들어 보였다.
아일랜드인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죄송하지만 아드님은 오랫동안 감옥에 들어가 사회에 진 빛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러드로우는 몸을 떨었다.
그의 몸이 사냥감을 덮치는 매처럼 홱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옷 사이로
허벅지에 차고 있던 그의 20구경 권총이 두 아일랜드인을 영원의 세계로 보내 버렸다. (p150)
-끝.
※ 이 글은 <가을의 전설>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짐 해리슨 - 가을의 전설
맑은소리 - 1995. 03. 01.
에필로그
내 의도대로라면 그 10월의 아침은 트리스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이다.
러드로우는 총을 쏜 직후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그날 저녁 의식을 되찾았다.
트리스탄은 아이들을 끌어안았고,
페트는 나중에 아이들에게 나쁜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죽이려 했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사벨은 신경증이 도졌다.
데커와 크리족 일꾼,
그리고 노르웨이인이 시체를 파묻었고,
그날 밤 크리족 일꾼은 그들이 타고 온 차를 미주리 주 위쪽의 깊은 연못 속에다 밀어넣어 버렸다.
그러나 총성의 메아리가 사라진 후 미친 듯 행동한 사람은 '한번 찌르기' 였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체 주위를 맴돌다가
몸을 활처럼 휘게 해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낮은 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을 굽혀 기절한 러드로우를 끌어안얐다.
만일 그들을 죽인 사람이 러드로우가 아니고 그 자신이었다면 흥분한 '한번 찌르기'는
분명 그들의 머릿가죽을 벗겨냈을 것임을 트리스턴은 알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트리스탄은 아이들을 범선에 태워 쿠바로 데리고 갔고,
23년 후 그곳에서 혁명이 시작되자 3세와 그녀의 남편이 살고 있는
앨버타 주맥레드 근방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초토 근처에 가서 알프레드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살고 있는
대농장 옆으로 난 랜셤 가도를 달리다 보면 출입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장치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이지만,
그곳의 협곡 안에는 이 땅에 남은 몇몇 사람들에게 뭔가 의미를 주는 무덤들이 있다.
샘 근처에 새뮤얼과 '둘째'의 무덤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진정한 두 친구 '한번 찌르기'와 이사벨 사이에 누워 있는 러드로우의 무덤이 있으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데커와 페트의 무덤이 있다.
언제나 홀로 떨어져 왠지 고독했던 트리스턴은 앨버타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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