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브래셰어즈 - 파이어 아일랜드」
[230412-171556-2-3]
난생처음 겪는 불공평함을 쉽게 극복하는 이는 없다.
유일한 예외는 피터 팬뿐이다.
피터 팬은 자주 불공평함을 맞다뜨렸지만 늘 잊어버렸다.
내가 보기에 이 점은 피터 팬을 다른 이들과 구분해 주는 잔정한 차이점이다 - J. M. 베리
1. 기다림
앨리스는 페리 선착장에서 폴을 기다렸다.
폴은 활기찬 목소리로 자동응답기에 오후 배로 도착한다는매시지를 남겼다.
참 폴다운 짓이었다.
폴은 1시 20분 배나 3시 55분 배라고 꼭 집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폴의 말뜻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페리 운항 시간표를 오래도록 째려보았다.
분명 폴이 탔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앨리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을 억누른 채,
1시 20분에 떠난 첫 오후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앨리스는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다고 자신을 달래며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반원형의 선착장 군데군데에 놓인 벤치에 맨발로 올라 앉은 채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있었지만 책 내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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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를 알아봄과 동시에 알아보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
두뇌에 이상한 과부하가 걸린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폴은 그동안 애써 잊고 있었던 감정과 생각들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안녕.”
폴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앨리스는 폴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얼굴은 등대를 향한 채로 그를 껴안았다.
과거와는 약간 다른 행동이었다.
친근함을 강하게 표현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폴을 더는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앨리스는 폴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할 수 없었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온몸이 무감각했고, 눈의 초점도 흐려졌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들킬까 봐 얼른 포옹을 풀었다.
앨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가리켰다.
"그게 다야?"
"이게 다야."
폴의 목소리는 거의 슬픔에 잠긴 듯했다.
앨리스는 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쳐다보고 있어서 그렇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그냥 폴이 온 것뿐이야! 옛날과 변함없는 폴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폴은 여전히 앨리스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지만 한편으로 가장 낯선 사람이기도 했다
"무거워?" 혼잣말을 하듯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괜찮아."
폴이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언뜻 웃음기가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조심하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아주 옛날 폴은 맛았는 시리얼을 차지하려고 아침마다 잠옷 바람으로 그들의 집으로 건너왔다.
앨리스는 늘 이기기만 하던 폴에게 그 일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드문 싸움이었다고 회상했다.
중요한 건 폴이 아침 일찍 그들의 집으로 쳐들어왔다는 점이다.
폴의 집은 그들의 집과 바다 사이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두 집은 너무 가까워서,
바다가 잠잠한 밤에는 양쪽 부모가 부부 싸움을 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방이 일곱 개나 되는 폴의 깨끗한 집에는 TV도 있고,
부엌 선반에는 온갖 종류의 맛있는 시리얼 상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돌이켜보아도,
열대 과일 맛이 나는 시리얼을 차지하려고 싸우기는 커녕
아침을 먹으려고 그 집을 찾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큰 집보다는 작은 집에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걸,
앨리스는 본눙적으로 알아차렸다.
폴은 늘 하던 대로 자기 집 뒷문에서 앨리스 집 뒷문으로 들어왔다.
정식으로 오려면 현관에서 인도로 나가 최소한 150걸음쯤 걸어야 했는데,
물론 앨리스의 경우라면 걸음 수가 더 많아질 테고,
폴이 거짓말을 섞는다면 훨씬 더 적은 걸음 수가 될 터였다.
하지만 갈대숲을 거쳐 백사장 길로 걸어오면 기껏해야 30걸음 거리였고,
덤으로 바깥 사람들에게 왕래를 전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 먹었어?”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앨리스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아니. 근데 괜찮아.
네가 날 먹여 살릴 필요는 없어.”
폴은 약간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앨리스는 쌀로 만든 시리얼 상자와 그릇, 숟가락을 폴이 있는 쪽으로 밀었다.
폴은 방금 자기가 했던 말을 잊은 듯 그릇에 시리얼을 따랐다.
'우유 줄까?" 앨리스가 말했다.
"고마워."
앨리스는 식탁에 팔꿈치를 얹고 한 손으로 턱을 고인 채 폴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9. 예쁜 아이
폴은 TV 앞에서 잠든 어머니를 내버려든 채 동이 트자마자 갈대숲으로 나왔다.
미리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속였지만,
폴은 라일리가 6시가 되기 직전에 일을 하려 집을 나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전에 계획했다고 해도 역시 방충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며
참 모모한 짓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앨리스의 방에 들어가서 무얼 하려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고 먼저 마음의 결정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런 권리도 없음을 알면서 폴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앨리스는 자고 자고 있었다.
머리칼을 사방으로 흩뜨린 채 고개를 벽쪽으로 돌리고 잠들어 있었다.
폴은 침대로 올라가 앨리스 옆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올려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온가를 느끼고 싶어진 폴은 아주 조심스럽게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주저하며 한 팔을 느슨하게 앨리스의 허리에 둘렀다.
워낙 착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앨리스의 몸은 아주 따뜻했다.
폴은 앨리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팔다리를 겹치고 싶었다.
"사랑해"
폴은 앨리스의 머리칼에 입을 댔다.
앨리스가 듣지 못할 때는 폴도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가수면 상태에서 걱정스러운 꿈을 반복해서 꾸듯 줄곧 폴을 괴롭히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을까?
험난한 사춘기의 굴곡을 거치며 어린 시절의 사랑을 어른이 될 때까지 깨뜨리지 않고 이어갈 수 있을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사랑이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만 바뀌었을 뿐,
어른 세상에서도 조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탄생할 수 있을까?
혹시 두 가지 사랑은 전혀 다른 종류여서 서로 절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당혹스러운 것은 단순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수천만 종류의 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딱 하나뿐이거나.
하지만 어쨌든 지금 폴은 앨리스를 안고 있다.
앨리스를 깨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는 잊어버렸다.
앨리스는 눈을 감은 채로 그에게 몸을 돌리고는 기대 왔다.
앨리스가 폴의 가슴에 빰을 대자 머리칼이 목덜미와 코 밑에 닿아 간질간질 했다.
폴이 눕기에는 침대가 너무 작았는데도, 앨리스는 그를 작은 침대에 딱 맞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가슴이 풍만해지고 굴곡있는 긴 다리가 예전과 다르기는 해도,
앨리스는 여전히 똑같은 그의 앨리스였다.
앨리스가 눈을 떴다.
슬쩍 옆을 훔쳐보았다.
폴은 앨리스가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폴의 포옹이 느슨해졌다.
폴은 앨리스 한테서 몸을 떼었다.
폴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고 앨리스도 따라 일어났다.
폴은 앨리스가 그곳에 있는 게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앨리스는 자기 침대에 앉아 있는 폴을 쳐다보았다.
최소한 곁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심술궂게도 앨리스는 지금 당장 부모님 중 한 분이 방으로 걸어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폴은 뭐라고 변명을 할까?
10. 네 인생을 누려봐
앨리스는 가다렸다, 또다시.
왜 일을 이런 식으로 꾸몄을까?
폴이 엘리스를 미워하는 만큼, 앨리스도 자신을 미워했던 것일까?
앨리스와 폴, 두 사람은 바퀴가 돌아가는 2인승 자전거였다.
좌우 연타로 치는 편치 같기도 했다.
앨리스는 달을 쳐다보았다.
보름달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의 달은 거의 기울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해낸 거니?"
앨리스는 홍합 껍데기에 대고 물은 뒤, 바닷물에 던져버렸다.
앨리스는 시계를 차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않았다.
'5분만 더 기다려보겠어' 앨리스는 결심했다.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제일 예쁜 브래지어와 레이스가 팔랑 거리는 속옷에,
한 벌뿐인 좋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서 폴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완전히 속 보이는 짓이라는 생각에 모멸감마저 느껴졌다.
앨리스는 남편이 우체국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는 '우편 주문 신부'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는 확실히 자정이 지났을 터였다.
폴은 오지 않고 있었다.
섹시해 보이려던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끝나고 말았다.
"죽어버리고 싶어." 앨리스가 바다를 향해 말했다.
"앨리스?"
비참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잡생각에 시달리느라 앨리스는 등 뒤에서 다가온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안녕, 앨리스." 앨리스는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늦었지? 미안해."
앨리스가 돌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보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안 가서 정말 다행이야."
말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폴인가?
폴처럼 보이지만 말하는 게 영 폴 같지가 않았다.
앨리스는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억눌렸다.
"막 가려던 참이었어." 앨리스가 자동인형처럼 대꾸했다.
"제발 가지 마, 나는 방금 왔잖아."
앨리스는 폴이 찡그린 얼굴로 머뭇거릴 거라고 생각했다.
폴이 변명을 늘어놓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왜 얼굴 표정이 저리도 편안한 것일까?
폴은 아주 가까이 다가왔지만 앨리스에게 손을 뻗거나 입맞춤 인사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품고 있는 마음을 스스럼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 데 깜박했어."
폴이 작은 비닐에 든 네모난 물건을 두어 개 손에 들고 보여주었다.
콘돔이었다.
앨리스는 즉각 얼굴이 붉어졌다.
앨리스는 폴만큼 현실적이지 못했다.
정말이지 앨리스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너무 놀라워서 앨리스는 자기가 허세를 부렸던 것인가 의아했다.
이건 마치 폴이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잖아?
"가게 문이 닫혔더라.
뭍에 주문해서 페리선으로 배달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도 끝났더라고,
더 일찍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야."
"그런데 어떻게 구했어?" 앨리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요트 클럽에 사서 돈 론타노한테 빌렀어."
"설마" 별안간 앨리스는 열두 살 소녀처럼 깔깔거렸다.
"정말이야.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앨리스는 더욱 까르륵 웃어댔다.
"이유는 없어."
"다른 것들도 가져왔어."
폴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단호했고, 단호하면서도 가벼웠다.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폴이란 말인가?
폴은 한 아름 들고 온 물건들을 백사장에 내려놓았다.
폴이 담요를 펼치며 말했다.
"이걸 가져왔어. 깔고 누우려고."
앨리스는 폴이 민망한 표정을 지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시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좋은 생각이네."
폴은 진심으로 이러는 것일까?
정말로 해치울 마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교묘하게 반대 심리를 이용하려는 술수일까?
계락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닌지 폴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왔어. 나중을 위해서."
그것은 맛있는 초콜릿 쿠키 한 봉지였다.
나중을 위해서, 앨리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도 있어. 이건 나 말고 널 위한 거야."
와인 한 병이었다.
앨리스는 감동하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긴장 되니?
좀 마실래. 코르크 따개도 가져왔어."
"난 괜찮아."
폴이 앨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앨리스의 귓가에 멀굴을 가까이 댔다.
폴은 담요를 폈쳤다.
백사장에서 담요를 펼치는 건 전쟁이나 다름 없지만, 오늘 밤에는 바람이 없었다.
폴은 양쪽 모래 언덕으로 가려지고 두 마을 사이라 사유지가 아닌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이라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앨리스는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고 폴은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폴은 자신만만한 자기의 태도 때문에 앨리스가 겁먹고 달아 나는 건 바라지 않았다.
폴은 갖고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서 담요에 앉았다.
"와서 앉아."
폴의 말에 앨리스가 곁에 와 앉았다.
달이 구름을 벗어나자,
하늘색과 자주색의 앙증맞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드러났다.
폴은 받을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떠올렸다.
다만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폴은 앨리스의 아룸다움에서 고통이 아닌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앨리스의 아름다움은 선의의 권력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폴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긴장되더라도 걱정하지마. 강요하지 않을게." 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죠? 폴을 어떻게 한 거야?" 앨리스가 속삭여 물었다.
"여기 데려왔어, 폴은 지금 바로 여기 너랑 함께 있어."
그랬다.
폴은 스스로 느끼고 있는 확신이 너무 낮설어 주춤하기는 했지만, 이제 마음이 확고했다.
두 사람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나타난다 해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결심하고 나니 오히려 미래가 더디 오는 것만 같았다.
'서두르지 말자' 폴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폴은 곧 진기하고도 어마어마한 기쁨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될 것을 알았다.
평생 단 한 번 맛볼 수 있는 기쁨이어서,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멍청하다는 뜻이었다.
폴은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준비됐어?"
폴이 말했다.
너무 어두워서 앨리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간신히 보였다.
폴은 모든 걸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앨리스도 자신을 똑똑히 보기를 바랐다.
"나 때문에 억지로 이러는 거야?" 앨리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가 억지로 이러는 것 같니?"
"아니, 하지만 오빠가 솔직하면 좋겠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나 화 안 낼게, 앞으로도 내 침대에 와서 자도 좋아."
"난 당연히 네 침대에서 자고 싶어."
폴이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앨리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앨리스의 빰에 폴의 입술이 닿았다.
이어 폴은 앨리스의 턱에 키스했다.
"나는 아주 많은 일들을 하고 싶어."
오래도록 앨리스를 사랑하면서도, 이제껏 그는 단 한 번도 앨리스에게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어쩌면 속마음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폴은 앨리스의 목덜미에 키스한 뒤, 십자가 목걸이 바로 왼쪽에 입을 맞추었다.
쇄골과 귀에도 키스했다.
이건 바로 앨리스였다!
입술이 닿은 곳들은 그가 너무도 잘 알지만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곳이었다.
폴은 앨리스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입술끼리 만나면 거의 감당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역시 짐작대로였다.
앨리스는 열렬히 입맞춤에 응했고, 두 사람의 친밀감은 거의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폴은 자기를 잃어버렸고, 그런 자기를 되찾을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폴은 난생처음 입맞춤을 하는 사람처럼 앨리스에게 키스했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첫 키스였다.
그리고 어느면에서 앨리스뿐 아니라 그도 동정童貞이었다.
폴은 그런 생각과 더불어 다른 중요한 이야기를 앨리스에게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키스의 황홀경에 빠져 있던 터라 이야기를 하려면 입맞춤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내 포기했다.
폴은 지금까지 눈으로만 알고 있던 앨리스의 몸 구석구석을 손가락과 입술로 탐험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안에 감추어져 있는지 감히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제는 앨리스가 입은 원피스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 안에는 그가 보지 못했던 여러 부분이 감추어져 있었다.
폴은 문득 열네 살로 되돌아간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심을 담아 연인을 안으려니 모든 것이 달랐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해져 영원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앨리스가 원피스 어깨 끈을 내려 엉덩이 밑으로 끌어 내린 뒤 옷을 발로 차버리자,
갈피를 잡지 못해 앞뒤로 방황하던 마음이 중심으로, 현재로 향했다.
앨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폴의 셔츠를 벗기고는 이내 바지 단추를 움켜잡았다.
무척이나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옷임에도 폴 역시 순식간에 포장을 벗고 알맹이를 드러냈다.
폴은 앨리스를 자기 몸 위로 끌어 올리며 등 밑의 모래가 좀더 깊이 파이는 것을 느꼈다.
해변은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물론 앨리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앨리스가 몸을 밀착시키자 폴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해졌다.
폴은 황홀하면서도 참담한 갈망을 느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쾌락이었다.
고통의 몸부림과 편한 안식 사이의 자잘한 파장을 따라 온갖 부분을 두들기는 뼈져린 갈망.
앨리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고, 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사랑을 나눌 때는 수줍어해야 한다는 진부한 전통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 곳이 없었다.
폴이 앨리스의 콧날에 입을 맞추려고 다가가자,
앨리스의 두 눈이 외눈 괴물 키클롭스의 눈처럼 하나로 뭉쳐보였다.
그들은 둘 다 이 순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앨리스가 폴의 몸에 다리를 들렀다.
폴이 잘 알고 있다시피 앨리스는 힘이 넘쳤다.
그들은 멈출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활주로는 끝이 났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비록 둘 다 엔진이 멈추더라도 이제는 날아올라야 했다.
앨리스는 떨고 있었다.
아니, 떨고 있는 쪽은 폴인가?
"나중에 해도 돼."
진심이 아니었으므로 폴은 얼마간 거짓으로 말했다.
폴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정신이 아득했다.
앨리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번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이건 처음일 뿐이야"라고 앨리스가 말했기 때문이다.
아득한 쾌감 속에서 최소한 폴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앨리스의 몸으로 들어가며 폴은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동시에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폴은 앨리스를 붙잡았다.
아마도 너무 세게 붙잡았을 것이다.
그의 눈에 예전에 흘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눈물이 맺혔다.
폴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앨리스의 입에 키스했고, 앨리스도 화답했다.
전에는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너는 앨리스야."
폴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오랜 새월을 보낸 뒤 드디어 앨리스가, 그들이 여기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기쁨 가운데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 자체로도 매우 뿌듯한 일이기는 했지만
폴은 지금 단순히 앨리스와 사랑을 나누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폴은 자신과 화해하고 있었다.
얼마 후 앨리스는 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많은 느낌이 스치고 지나가, 그게 무엇인지 더는 하나하나 헤아릴 수가 없었다.
폴은 담요를 반으로 접어 덮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는 알몸을 드려내도 세상이 둘을 훔쳐보지 못하도록 감쌌다.
땀 난 팔다리를 겁친 채 누워 있으니 따뜻하고 아늑했다.
언제 깨질지 모를 평온을 망치게 될까 봐 두려워서
앨리스는 갑작스래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허락된 일이라고 믿기에는 이 순간이 너무 달콤하고 행복했다.
세상이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다면 어떨까?
어쩌면 그들은 그냥 이렇게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러왔고, 달도 짙게 낀 구름을 벗어나 자리를 옮겼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그들은 그 세상에 누워 있었다.
새벽이 밝으면 전혀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이것이 진정 현실이라면,
그리고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낚아채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남자가 추억을 지워버리려 들지 않는다면,
내일은 단순히 다른 하루일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시작일 것이다.
그들은 쿠키를 먹었다,
앨리스는 손에 묻은 모래 때문에 쿠키와 함께 모래가 씹히는 걸 느꼈다.
익숙한 그 느낌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폴을 쳐다볼 때마다 앨리스는 폴이 사라져버리거나 눈길을 피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단잠에 빠져들었다.
앨리스는 가슴에 와 닿은 폴의 입술 감촉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어 그들은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좀더 길고 좀더 달콤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폴이 앨리스의 몸 위로 올라왔다.
폴의 얼굴이 앨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떠오른 솔직하고 스스럼없는 기쁨은 지금껏 앨리스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사랑해."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숙인 폴과 빰과 빰을 맞대고 함께 절정과 나락의 파도를 맞이하며,
앨리스는 폴의 발목 위를 발가락으로 간질이면서 말했다.
"늘 사랑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거야."
앨리스는 자신이 너무 많이 앞서 가고 있으며
어쩌면 말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실이고,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앨리스는 밤새 자기가 없어진 걸 라일리가 알아차리기 전에 침대로 돌아가고 싶었고,
그러려면 서둘러야 했다.
둘 다 새벽같이 서핑이나 조깅하러 나온 사람들과 맞닥뜨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앨리스는 부모님이 시내에 계서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참 많은 것들이 짜릿하면서도 묘하게 느껴졌다.
폴 앞에서 옷을 입는 일,
똑같이 그가 옷 입는 걸 지켜보는 일,
이제는 폴의 옆에 있는 게 어쩐지 당연하다고 느끼는 일,
한편으로 늘 자기는 폴의 소유라고 느끼며 살았지만
이제는 그뿐 아니라 폴도 자기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들은 손을 잡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모래사장을 나와 그들의 집까지 이어진 짧은 산책로를 걸었다.
먼저 손을 잡은 사람은 폴이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폴이 걸어가는뒷모습을 지켜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앨리스는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 돌아보고야 말았다.
'나를 떠나지마, 이대로 곁에 있어줘.''
방에 돌아와 침대에 앉은 앨리스는 벽을 쳐다보며 제멋대로 재생되는 전날 밤의 기억을 회상했다.
기억은 나름대로 힘을 갖고 있다.
이미 기억은 날것의 느낌을 편집하고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기억의 재생 과정이었다.
폴의 기억은 어떻까, 앨리스는 궁금했다.
앨리스는 소중한 경험을 지워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 샤워하기가 꺼려졌지만,
그래도 샤워를했다.
무의식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을까 봐 잠을 자기도 두려웠다.
하지만 역시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자 이내 즐거운 기억이 이어졌다.
대게 앨리스는 꿈이 현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민했는 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꾸었다.
그것은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었어, 그렇지?
온 몸의 감각들이 그렇다고 앨리스에게 말해 주었다.
앨리스는 배가 고팠다.
거의 숨 쉴 새도 없이 시리얼 세 그릇을 먹어치웠다.
속옷 안의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옷을 입었다가 이내 앨리스는 문 앞에서 외출을 망설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사물로 가득한 세상에 나가면 마법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지 않고 어떻게 달걀 샌드위치를 산단 말인가.
폴이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앨리스는 가능한 한 오래동안 자기가 구상한 대로 지난밤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여,
주머니 같은 것에 모조리 처벅아 쉽게 어디론가 치우고 잊어버릴 기회를 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어승렁거리며 집에 돌아오니 폴이 집 앞에 서 있었다.
앨리스는 폴을 보자 초조하면서도 뛸 듯이 기뻤다.
너무 오래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건 아닌가,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일까?'
왜 그의 얼굴에서 해답을 찾으려드는 것일까?
현실임을 잘 알면서!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으로는 춤분하지가 않았다.
낭만적인 사랑에서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좌절감은 사랑은 결코 혼자서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폴의 따라오라는 시늉에 앨리스는 비밀 통로로 폴의 집으로 들어가 뒤쪽 계단을 올라갔다.
창문들을 활짝 열어놓아 바다가 방 안으로들어온 듯했다.
그들은 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둘 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대롱거렸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주 눈빛을 주고 받았다.
"있잖아. 그거 정말 있었던 일이야?"
이윽고 앨리스는 소리 내어 묻고 말았다.
앨리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디 '뭐?'라고 말하지는 마. 얼버무리지도 마.
이번에는 제발 잘못된 대답은 하지 마.' 앨리스는 속으로 폴에게 말했다.
폴은 앨리스가 본 적 없는 낯선 미소를 지었다.
폴은 유연하게 책상에서 내려서 손을 뻗더니, 한 팔은 앨리스의 어깨 아래,
다른 한 팔은 무릎 아래로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폴은 앨리스를 안고 침대로가 헝클어진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재빨리 앨리스의 반바지 허리춤을 붙잡았다.
"확실히 해두자." 폴이 말했다.
이틀 뒤 앨리스는 요트 클럽에서 밤 근무를 마치고 흥분과 조바심에 마음을 졸이며 집으로 걸어갔다.
앨리스는 퇴근하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 세수하고 나서 가법게 화장을 했다.
곧장 폴의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폴은 놀라는 시늉을 하겠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앨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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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시 세상과 함께하기
앨리스는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았다.
헬렌과 보니의 집과 함께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는 자리를 일부러 고른 터였다.
앨리스는 두 손을 모으고 발을 대롱거린 채,
허벅지에 난간 자국이 깊이 파일 만큼 오랫동안 거기에 앉아 있었다.
앨리스는 태양이 바닷물에서 솟아나와 파랑게 변해가는
하늘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폴은 깨어 있었다.
폴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내린 채 양팔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앨리스는 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폴은 앨리스에게 두 팔을 뻗었고, 앨리스는그의 무릎으로 미끄러졌다.
그들은 그렇게 포용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그를 꼭 꺼안았다.
다시 폴에게 안겨 있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말을 타듯 앨리스가 무릎에 걸터앉았으므로, 폴은 다리 사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감추기가 어려웠다.
앨리스는 더욱 폴을 꼭 껴안으며 그 끼쁨을 만끽했다.
"미안해, 앨리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네가 비켜야 할 것 같아."
절반은 목구멍이 막히고 절반은 웃는 목소리로 폴이 말했다.
"오빠가 뭘 어쩌길 바라지 않아.
그리고 난 비키고 싶지도 않아."
폴도 기억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자세는 일 년 전 그들이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체위였다.
앨리스는 하체를 들어 올리고 폴의 반바지를 끌어 내렸다.
폴은 앨리스의 셔츠를 머리 위로 벗기고 드러난 나신을 자기 몸에 밀착시켰다.
"여기서..... 해도 될까?" 사랑스럽게 눈을 크게 뜨며 폴이 속삭였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집을 부수기 전에 해치우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
속삭일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앨리스 역시 속삭여 대꾸했다.
폴은 불시에 착륙한 곳이 못 미더워, 너무 앞서 가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는 남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폴의 신중함에 앨리스는웃음이 나왔다.
앨리스의 속옷을 잡아 내리던 폴이 이내 멈추었다.
"그게 없잖아....,"
앨리스는 폴이 멈추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폴이 그만큼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잠깐만, 하나 있을지도 몰라." 앨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 있다고?" 폴은 앨리스의 말에 절반만 기쁜 표정이었다.
"응, 전에 쓰던 거. 오빠가 두고 갔잖아."
"내가 그랬던가?" 앨리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귀에서도 막 꺼내곤 했잖아."
"정말 그랬다. 그렇지?"
"금방 올게."
앨리스는 콘돔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혹시 어린 두 소녀가 이른 아침을 먹으러 나타날 경우를 대비하여 테라스로 이어지는 뒷문을 잠갔다.
폴은 성마른 표정으로 앨리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앨리스가 발꿈치를 들고 거실로 돌아오자마자 폴은 앨리스를 잡아 끌어 마저 옷을 다 벗겼다.
폴은 앨리스를 소파에 눕히고 진지한 표정과 기쁨에 찬 몸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여름 이후 처음으로 그들은 거추장스러움을 모두 벗어던졌다.
앨리스는 폴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번에 그들은 도망자나 경계심 가득한 분리론자들처럼 그들만의 다른 우주에 숨어 있었다.
지난번에 나눈 정사는 일종의 반란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다시 세상과 함께하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느낌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세상은 그들을 미래로 연결해 주었다.
폴은 앨리스와 함께 페리선에 올랐다.
폴은 페리선을 타는 것도, 이 섬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자꾸 생각했지만,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만만치 않게 들었기 때문에 그냥 결론을 열어 두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탄 페리선은 노동절 오후 늦게 떠나는 전통적인 작별의 배였다.
폴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십대들을 바라보며 자기도 그 기분에 젖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곁에 앨리스가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지만 배를 타고 있는 동안 줄곧,
그리고 배에서 내릴 때에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을 것이라는
현기증 나는 현실 속에 폴은 앨리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은 과거에 단 한 번도 함께 섬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앨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폴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섬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폴은 지금 데려가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못 견딜 만큼 극심한 통증은 아니니 차츰 익숙해질 것이다.
그들은 상갑판으로 올라가 난간 옆의 뒺자리에 앉았다.
폴은 앨리스의 허벅지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폴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소박하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폴은 낮에 뜬 희미한 달을 찾아보았다.
폴은 이 섬 이외의 장소에서는 어디서도 낮달이 뜬 것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페리선의 엔진음이 묵직하게 되살아나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폴은 앨리스의 손을 잡았다.
앨리스는 인생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 거듭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일까?
그 순간인지 아닌지 과연 내가 알 수 있을까?
그때가 오면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그 변화를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혹시 겁쟁이처럼 물러서지는 않을까?
과거의 삶에 작별 인사를 고할 때가 언제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두고 떠난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아볼 수 있을까?'
앨리스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때가 오면 자기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로 변화가 그런 식으로 찾아올지 의아했다.
어쩌면 멍하니 생각만 하고 있는 사이에,
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수만 가지 방식으로 변화가 찾아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뛰어넘어야 할 틈도, 단절도 없을지 몰랐다.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주변을 둘러보며 한두 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라'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리선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힘겹게 후진을 시작하자,
폴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앨리스도 따라 일어났다.
앨리스는 선착장 끝에 서서 고함과 비명을 질러대는 친구들을 보며
배 안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는 십대들을 바라보았다.
폴은 앨리스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자기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둘은 선착장에 남아 있던 한 때의 십대들이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일제히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끝 .
※ 이 글은 <파이어 아일랜드>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앤 브래셰어즈 - 파이어 아일랜드
역자 - 변용란
노블마인 - 2008.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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