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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후기/세상의 길 위에서

by 탄천사랑 2023. 6. 17.

·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후기
세상의 길 위에서

이 책에 담긴 원고는 각 장 서두에 적혀 있는 것처럼, 2005년 여름부터 2006년 가을에 걸쳐 쓰인 것이다.
단숨에 간추려서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면서 짬을 내어 조금 조금씩 써나갔다.

'자,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가면서,
그래서인지 그다지 길지 않은 책이지만 쓰기 시작해서 다 마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쓰고 난 다음에도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여행기나 에세이집은 몇 권 냈지만,  이처럼 하나의 테마를 축으로 해서, 

나 자신에 대해 정면으로 이야기했던 경험이 별로 없으므로, 그만큼 정성을 들여 글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을 정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처럼 이런 책을 쓴 의미를 잃게 되고 만다.
그 언저리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은,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원고를 되풀이하여 읽지 않으면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

나는 이 책을 내 '회고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개인사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에세이라는 타이틀로 매듭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문에서도 썼던 것을 되풀이하는 모양새가 되지만,
나로서는 '달린다'라는 행위를 매개로 해서 내가 이 사반세기 남짓한 세월 동안을 소설가로서,
또 한 사람의 '어디에나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나 나름으로 정리해 보고 싶었다.
소설가가 어디까지 소설 그 자체에 집착하고 얼마만큼의 육성을 세상에 공개해야 하는가 하는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일률적으로 정할 수도 없다.

나로서는 가능한 한 이 책을 쓰는 것을 통해,
나 자신에게 있어서의 그 기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와 같은 점이 생각만큼 잘 나타났는지 어떤지, 나로서도 아직 그다지 자신이 없다.
그러나 다 쓰고 난 현재의 시점에서, 
오랫동안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라고 하는 
자그마한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글을 쓰기에 딱 알맞은 인생의 좋은 시기였을 것이다.

이 글을 일단 다 쓰고 나서, 몇 번의 마라톤 레이스에 참가했다.
2007년 초의 마라톤 풀코스 하나, 
일본 안에서 달릴 예정이었지만, 참가 직전(드물게) 감기에 걸려버린 탓으로 달리지 못했다.
달렸더라면 스물여섯 번째 레이스가 되었겠지만 결국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에 걸친 시즌은,
마라톤 풀코스를 한 번도 달리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미련이 남기는 하지만, 다음 시즌에 분발하려고 기대하고 있다.

그 대신 5월에는 호놀룰루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했다.
올림픽 규모의 대회였지만, 즐겁고 만족스럽고 순조롭게 완주할 수 있었다.
기록도 종전의 레이스보다 얼마간 향상되었다.
또 1년쯤 호놀룰루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현지에서 열리고 있는 트라이애슬론 수련 모임 같은 데에 참가해 일주일에 세 번,
3개월쯤 호놀룰루 시민과 함께 트라이애슬론 수련에 매진했다.
이 프로그램은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 이 그룹에서 친구(트라이애슬론 친구)를 사궐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이 추운 시기에는 마라톤 레이스를 하고 여름철에는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한다는 것이,
내 생활의 사이클이 되어가고 있다.
시즌오프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모저모로 분주한 일이 되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나로서는 인생의 즐거움이 늘어가는 데 대해서 고층을 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언맨 규모의 
본격적인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분발해서 도전하는 일에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깊이 들어가면 매일매일의 수련에 시간을 빼앗겨 (틀림없이 빼앗긴다) 
본업인 작품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내가 울트라 마라톤 쪽으로 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 경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비교적 온건한 단계에 나 자신을 머물게 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사반세기 동안 매일같이 계속 달렸기 때문에 그 과정에 수많은 추억이 서려 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1984년 작가 존 어빙 John Irving 씨와 함께 뉴욕 센트럴파크를 달렸던 일이다.
그 당시 그의 장편소설 <곰을 풀어주다>를 번역하고 있던 나는 뉴욕에 갔을 때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들지만,
 아침에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니까,
 그때 함께 달리면서 대화를 할 수 있다"라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함께 이른 아침의 공원을 달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녹음도 할 수 없고 메모도 할 수 없었지만, 
상쾌한 공기 속을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던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1980년대의 일인데, 
도쿄에서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있을 때, 한 멋있는 젊은 여성과 자주 스쳐 지나갔다.
수년간에 걸쳐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그동안 자연히 낯익은 사이가 되었고,
만날 때마다 서로 방긋이 미소로 인사를 하곤 했지만,
결국 말을 걸어본 적도 없고(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상대의 이름도 물론 모른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그녀와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은, 그 무렵 나의 작은 기쁨 중 하나였다.
조금쯤 그런 기쁨이 없었다면, 여간해서 매일 아침마다 달리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아리모리 유코 씨와 콜로라도 주 보울더의 고지를 함께 달렸던 것도,
추억 어린 체험의 하나였다.
물론 가벼운 조깅이었지만, 일본에서 표고標高 3.00미터에 가까운 고지로 가서 급하게 달렸던 해프닝이었다.
따라서 폐가 비명을 지르고 머리가 어찔어찔해지고 목이 칼칼해져서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리모리 씨는 무심한 눈으로, 그런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왜 그러세요. 무라카미 씨?"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프로의 세계는 냉엄한 것이다(실제로 아리모리 씨는 친절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3일쯤 지나자, 
산소가 희박한 공기에도 몸이 점점 익숙해져서, 로키 산지에서의 상쾌한 조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와 같이 달리기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알게 된 것도 나에게 있어 하나의 기쁨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거나 격려해 주었다.
제대로 하자면 여기서 아카데미상 수상식 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지만,
일일이 이름을 들자면 끝이 없을 것 같고,
많은 독자들과는 아마도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접고 싶다.

나의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levie Carver의 단편집 타이틀인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을 이 책 제목의 원형으로 쓸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 준 테스 갤러거 Tess Gallagher 부인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또 10년 이상 원고가 완성되기를 
죽 기다려준 인내심 강한 편집자 오카 미도리 씨에게도 깊이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이제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스쳐 지나며 
레이스 중에 추월하거나 추월당해 왔던 모든 마라톤 주자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 2007년 8월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



※ 이 글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역자 -  임홍빈 
문학사상 -  2009. 01. 05.

[t-23.06.17.  230616-1910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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