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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아름다운 여름 - 푸른 노트

by 탄천사랑 2023. 7. 12.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푸른 노트
이 스튜디오에 처음 들어서던 날의 그 어둠을 기억한다. 
한낮의 햇살 같은 조명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데스크, 
그 주변을 포위해 들어오는 검은 실루엣,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말없이 나를 압도하던 어둠…… 

그때 그 시간을 기록해둔 필름에 크로마키 기법이 사용된 걸 보면 
데스크 뒤에 파란색 배경 판이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엔 감감하기만 하다. 
묵직한 카메라와 모니터 따위가 어울려 자아내던 금속성의 분위기 역시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때 본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뿐이다. 

9년 전 입사 시험 때였다.
TV 주조 성실의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스튜디오의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나는 그 빛과 어둠을 보았다.
시험지처럼 주어진 뉴스 원고를 읽기 위해 크고 작은 조명이 집중되고 있는 
데스크 앞에 앉았을 때에도 불빛은 내 상반신까지 쏟아져 내렸다.
내 얼굴을 비추던 커다란 렌즈의 카메라도,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바퀴 달린 받침대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엔지니어의 모습도 모두 어두운 실루엣일 뿐이었다.

그 어둠의 질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명 아래에 앉아 있어도 빛보다 어둠을 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이 아침. 무언가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
9년 전 스튜디오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9년 전 스튜디오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존재하는 것.

저것들일까....,
부메랑처럼 휘어진 데스크의 어두운 한쪽 끝에서 아까부터 내 시선을 끌어 당기던 꽃들을 바라본다.
녹화 때 사용된 꽃이 스튜디오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조명 아래서 헐떡이다가 이윽고 시들고 말라버린 그 모습은 어쩌면 내게 익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금 조명등의 빛살 아래에 앉은 나는 먼발치 어둠 속의 꽃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수반 안에서 물을 흠뻑 머금어 꽃들의 가짜 오아시스가 되어주었을 녹색 스펀지도 
이제는 버석하게 말라붙어 있을 것이다.

스펀지는 지금 오히려 흡혈귀처럼 꽃과 줄기의 마지막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송 진행자의 얼굴을 가리지 않기 위해 한껏 낮춰 장식된 꽃들은 
지쳐 시들어서도 여전히 저마다의 얼굴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 몸을 비틀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또다시 작은 움직임 하나가 내 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아침이 있다.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난 것만 같은 아침,
혹은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아침,
그러나 그 기미는 번번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무언가 기대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세상은 변함없이 견고할 뿐임을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그런 아침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생각했다.
창문을 열면서 감지한 공기의 흐름,
거울 속 내 얼굴에 깃들인 아침의 표정,
세면대에서 느껴본 물의 촉감,
그 모든 것에 작은 움직임이 일렁거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움직임의 하나가 기어이 이곳까지 따라 들어와 
지금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정면의 빨간 램프가 켜지면서 
동시에 카메라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모니터에 내 얼굴이 떠오른다.
자료 화면에 맞춰 뉴스 원고를 읽다가 중간 중간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언가에 붙들려 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내 마음의 평정을 방해하고 있는 움직임,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관자놀이를 따라 땀이 흘려내리며 뉴스 리허설이 끝나갈 무렵,
나는 비로소 눈을 크게 뜬다.
원인은 공기다.
땀을 흐르게 하는 이 무더운 공기는 분명 조명 탓만이 아니다.
어느새 겨울의 바닥을 뚫고 새로운 봄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계절이 자리바꿈하는 시기의 공기, 
그 특유의 색깔과 냄새가 불러들이는 기억의 시간은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리허설이 끝나고 서울 뉴스가 방송되는 사이의 짧고 긴장된 대기 시간 동안 어쩔 수 없이 그를 생각한다.
지난해 봄,
함부로 내 삶을 침범해 왔던 사람,
그리고 여름 내내 내 삶을 간섭했던 사람.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빛이 명멸하던 그의 노트를 생각한다.
역시 그였는가.
그가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가볍게 고개를 흔든다.
모니터를 바라보니 그 사이에 땀이 흘러 흐트러진 내 모습이 보인다.
옆에 놓아두었던 손가방을 끌어당겨 파우더 콤팩트를 꺼내는 동안에도 
데스크의 어두운 한쪽 끝에 엎드려 숨죽인 꽃들이 자꾸만 내 사선을 부르는 것 같다.
그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번들거리는 얼굴에 파우더를 덧칠한다.

서울에서 전국으로 방송되는 뉴스는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외신을 전하고 있다.
적당한 선에서 자르고 들어가 지역 뉴스를 내보내야 할 시간이다.
어김없이 인터폰이 열린다.

"네임 사인 받고 들어갑니다."

지금 외신을 전하고 있는 기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신호로 
화면은 가차 없이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어깨를 똑바로 편다.

저 카메라의 빨간 램프가 켜지는 순간,
이 도시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작은 도시의 전경을 배경으로 
화면에 떠오를 얼굴은 어쩌면 땀으로 번들거리며 잔뜩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소리 없이 아에이오우를 발음하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워싱턴에서 케이비에스 뉴스 김정욱입니다."

내 귀에 들려오던 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지며 온 에어 램프가 빨갛게 눈을 뜬다.
오로지 나 혼자서 떠안아야 할 생방송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오프닝이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곧 자료 화면이 나가고 뉴스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다행히 생방송 특유의 긴장감에 힘입어 상황에 몰두하고 있다.
긴장감이 아니라 습관의 힘이라고 해도 좋다.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 작고 집요한 움직임을 물리치고 있는 그것은
아마도 9년 동안 내 몸과 정신에 들러붙은 습관의 관성일 것이다.

"이상으로 뉴스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카메라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후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얕은 한숨을 내쉰다.
내 머리 위로 조명이,
그의 시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또다시 미묘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데스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멍한 눈길로 뉴스 원고를,
그의 노트를, 내려다 보고 있다.
※ 이 글은 <아름다운 여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ebook21 - 2016. 05. 21.

[t-23.07.12.  230710-1843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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