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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그레고리 맥도널드 - 1 플레치

by 탄천사랑 2023. 7. 13.

·「그레고리 맥도널드 - 플레치」

 

1

'이름은'
'플레치'
'정식 이름은'
'플래처'
'성은?'
'어원'
'뭐라고요?'
'어원, 어원 플래처요. 아는 사람들은 보통 플레치라고 부르죠'
'어원 플레처,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일단 애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하면 천 달러를 주겠소.
 그리고 만약 내가 제시하는 얘기를 거절하고 싶다면 그냥 천 달러만 가지고 가시오.
 그 대신 우리끼리 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면 절대로 안 되오. 됐소?'
'혹시 범죄 아닙니까?
 요컨대 내가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소'
'어쨌든 졸습니다. 천 달러를 준다는데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죠.
 도대체 뭡니까?'
'나를 살해해 주시오'

모래 묻은 검은 구두가 동양풍의 양탄자를 가로 질러 왔다.
사내는 웃옷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플레치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그 안엔 백 달러짜리 지폐 열 장이 들어 있었다.


이튿날 사내는 다시 방파제로 나와 플레치를 살폈다.
불과 30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데도 그는 망원경을 사용했다.
****사흘째 되는 날, 사내는 술집에서 플레치를 만났다.

'나를 좀 따라와 주시겠소?'
'왜요?'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있소'
'따라가기 싫은데요'
'나도 당신을 데려가기 싫소. 하지만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단 말이오'
'여기서 말하면 왜 안 되죠?'
'이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잖소'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내 집으로, 당신에게 내 집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고 싶소.
 혹시 해변에 두고 온 옷이라도 있소?'
'셔츠뿐입니다'
'가져오시오. 내 차는 잿빛 재규어 XKE요.
 길가에 주차해 두었소. 거기서 기다리겠소'
'우선 이 맥주부터 마시고요'
'들고 갑시다. 차 안에서 마시면 되잖소.'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해변의 인파 속을 헤쳐 나가는 사내의 모습은 
마치 구식 자동차 경연 대회장의 보험 사정인만큼이나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주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플레치는 모래사장 위에 놓여  있던 플레치의 가방을 셔츠로 덮어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패거리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앉은 다음 
셔츠에 덮인 플라스틱 손가방을 곁에 내려놓았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왼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는 셔츠 밑의 모래사장에 손가방을 넣을 수 있을 만큼 깊게 구덩이를 팠다.

'무슨 일 있어?' 보비가 물었다. 그녀는 하복부를 타월로 가리고 있었다.
'뭘 좀 생각 중이야'  그는 플라스틱 가방을 구덩이에 밀어놓고 모래로 덮었다.
'나 잠시 동안 어딜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오늘 밤에 돌아올 거야?'
'모르겠어'
'가기 전에 한 모금만 줘'

보비는 팔꿈치로 몸을 괴고서 맥주를 몇 모금 받아 마셨다.

'아, 좋다!'
'어이, 이봐'  크리세이가 플레치를 불렀다.
'갈 거야. 햇빛이 너무 강해'

사내의 차 번호는 440--001번이었다.
차에 탄 플레치는 양 무릎 사이에 차가운 맥주 캔을 끼고 앉았다.
사내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차를 몰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왼손에 대학 졸업 기념 반지를 끼고 있었으며,
계기판에 부착된 라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상의 호주머니에서 황금색 라이터를 꺼내 썼다.
차가 해변가 도로를 달릴 무렵이 되자 차 안이 서늘해졌다.
플래치가 차창을 열자 사내는 에어컨을 껐다.

차는 시내에서 북쪽으로 나가는 주도로를 따라서 빠른 속도로 달렸다.
커브길을 멋지게 돌아 더 힐스에 도달하자, 그는 속도를 낮추어 왼편의 호손 방향으로 좌회전 했고,
거기서 다시 우회전하여 버먼 가로 들어섰다.

사내의 집은 버먼 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쇠창살 문 위에 <수유지-출입 금지-스탠윅>이라고 씌어진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도의 연장으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진입로 양편에 2에이커 가량의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플래치는 차창을 통해 잔디밭으로 맥주 캔을 집어던졌다.
그 집의 입구에는 
근사한 두 개의 흰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넓은 베란다가 있어 마치 남부의 대저택 같았다.
사내는 서재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왜 죽으려고 하죠?'

플래치는 오른손 손바닥 위에 사내가 건네준 봉투를 올려놓은 채 물었다.

'나는 지루하고 추악하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 있소'
'이유가 뮙니까?'
'얼마 전 나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소. 여러 차례 재검을 받아 보았소.
 끝장난 게 확실했소. 
 수술도 안 되고 치료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아직 외부적 중상은 없소. 
 일종의 전신 부패증인데, 지금은 초기 단계인 셈이오.
 의사들의 말로는 당분간은 다른 사람이 그 증세를 알아볼 수 없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무서운 속도로 번져 간다고 하오.
'그 기간이 얼마나 된답니까?'
'3개월 내지 4 개월. 
 최대한 길게 잡아야 6 개월 이내라고 했소.
 그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은 지금부터 약 한 달 정도요.'
'그래서요? 그 한 달이 어쨌다는 거죠?'
'당신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 그러니까 당신이.....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당신도,
 음.... 그걸 가능한 한 빨리 결정했을 것이오. 죽어 가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말이오'

사내는 뒷짐을 진 채 프랑스풍의 창문을 마주 보고 섰다.
플래치는 30대 초반쯤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살하면 되잖소. 왜 내 도움이 필요한 거죠?'
'회사에선 내 앞으로 3백만 달러짜리 보험을 들어 주었소. 
 나에겐 아내와 아이가 있소. 
 내가 자살을 해서 보험금을 못 타게 되면, 
 그러니까 내 상속인들이 보험금을 못 타게 된다면, 아까운 일이지 않소.
 그렇다고 해서 3백만 달러 때문에 그 엄청난 고통을 참아낸다는 것도 그렇고,
 나는 내가 정말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믿소'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 플래치에게는 썩 좋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진품들이었다.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했소?'
'당신은 떠돌이니까.
 당신은 이 도시에 불쑥 나타났소.
 그리고 또 그렇게 불쑥 떠나 버릴 것이오.
 그걸 유별나게 생각하여 미지의 살인사건과 당신을 결부시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오.
 당신과 나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당신의 도피 계획도 다 세워 놓았소.
 당신이 무사히 도망치는 게 나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오.
 만일 당신이 잡혀서 모두 불어 버리면 보험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될 테니까'
'만일 내가 단지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이라면....,'
'무슨 말아오? 당신 정말 휴가를 즐기러 온 거요?'
'아뇨'
'나는 지난 며칠간 좀 떨어진 곳에서 당신을 관찰했소.
 당신, 해변의 쓰레기들과 어울리더군.
 주로 약물 중독자들과 말이오.
 난 당신도 그들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소'
'만일 경찰이라면?'
'경찰이요?'
'아뇨'
'어원 플래처, 당신의 피부는 까맣게 그을었소.
 뒷골목의 고양이처럼 야위었고 말이오.
 발바닥에 못이 박힌 걸 보니 오랫동안 길을 걸어 다녔겠고'
'왜 해변의 다른 애들은 다 뇌 두고 하필 나를 선택했죠?'
"당신은 애가 아니고 젊은이지. 서른 살쯤?'
'스물 아홉입니다.'
'당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려 살 수 없는 거 같소.
 내 생각으론 당신도 중독된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마약쟁이들과 어울릴 수 없지.
 그래도 당신은 아직까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그러면 나는 꽤나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떠돌이로군요'
'자만하지 마시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당신을 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플래치가 물었다.

'2만 달러, 
 그리고 당신이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으니까'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실내의 명암에 익숙해지기까진 잠시 시간이 걸렸다.
플래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는 다소 혐오스럽다는 기미가 역력했다.

'당신, 내게 돈이 필요치 않다고 말하진 않겠지.
 마약쟁이들은 언제나 돈이 필요한 법이니까.
 초보자라도 마찬가지이고, 
 이번 일만 잘 해내면 당신은 진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요'
'그럼 이건 진짜 범죄가 아닌가요?'
'이건 자선 살인이지. 결혼했소?'
'했었죠. 두 번이나'

플래치가 대담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거리로 나섰고... 원래 어디 출신이오?'
'시애틀이오'
'이제 당신은 자선을 베풀고, 돈을 벌어 떠나는 거요.
 어때 괜찮지 않소?'
'잘 모르겠소. 도대체 뭐가 뭔지'
'얘기 계속해도 되겠소?'
'무슨 얘기요?'
'이번 계획에 대해서 말이오. 왜 그냥 가겠소?'
'아뇨, 계속하세요'
'나는 일주일 후인 다음 주 목요일 8시 반쯤에 죽고 싶소.
 보통 살인 강도 사건처럼 보여야만 하오.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퇴근할 거고, 집사람은 위원회 모임 관계로 클럽에 가고 없을 거요.
 그리고 이 프랑스풍의 창문들은 잠금쇠가 열려 있을 것이오.
 한심한 하인들은 창문 잠그는 것을 노상 잊어버리거든'

그는 손수 창문을 열어젖혔다가 다시 닫았다.

'나는 그들의 우둔함이 얼마나 유용한가를 모르고 항상 불평을 했었지.
 하지만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기르던 개도 없애 버렸소.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이 방에 혼자 있겠소.
 금고를 미리 열어놓고 말이오.
 그 속엔 10달러짜리와 20달러짜리로 2만 달러가 들어 있을 것이오.
 당신이 날 죽이고 나면 그건 모두 당신 것이오.
 그런데 당신, 금고 문을 여는 기술은 있소?
 보기엔 있을 것 같지는 않는데....,'
'그렇소'
'아쉽군. 전문 금고 털이 강도들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은데,
 아무튼, 최소한 장갑을 끼는 것 정도는 잊지 마시오.
 당신이 붙잡히면 안 되니까 말이오.
 바로 여기 이 서랍 안에 장전되어 있는 권총이 한 자루 있소.

그는 오른쪽 책상 서랍 안에 손을 넣어 더듬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캘리버 38구경 권총이었다.
사내는 풀래치에게 그 권총이 장전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당신이 내 총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그래야만 아무도 당신을 추적할 수 없소.
 강신이 도착하기 전에 강도가 들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방을 조금 어지럽혀 놓겠소.
 당신이 도둑질을 하다가 나에게 들켰는데, 
 이미 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던 당신이 총을 들고 나를 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당신 총 쏠 줄 아시오?'
'네'
'군복무했소?'
'해병대 출신입니다.'
'심장을 쏴도 좋고, 머리를 쏴도 좋소.
 하여튼 신속하게, 그리고 고통 없이 죽게 해주시오.
 부디 완벽하게 해주시오.
 여권은 있소?'
'없습니다'

플래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없겠지, 하나 마련하시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우선 그 일부터 해야만 하겠소.
 지금은 관광철이 아니라서 3.4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일 당장 착수하시오.
 나를 죽이고 나선, 정문 앞에 주차되어 잇는 재규어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시오.
 공항에 도착하면 차는 TWA 항공사 주차장에 두시오.
 당신은 11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여객기를 타게 될 것이요
 내일 내가 당신 이름으로 예약도 하고 돈도 지불해 놓겠소.
 2만 달러면 부에노스에서 1.2년간 즐길 수 있을 거요'
'5만 달러면 더 재미를 볼 수 있을 텐데요'
'5만 달러를 달라는 거요? 살인은 별로 비용이 들지 않아요'
'당신이 희생자가 된다는 걸 잊었군요. 당신은 고통 없이 해주길 원하죠?'

사내는 경멸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이지, 알았소.
 5만 달러 정도는 별 문제없이 준비할 수 있을 거요'

사내는 돌아서서 다시 창문 밖을 응시했다.
그는 플래치를 쳐다보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당신이 붙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장갑과 여권뿐이요.
 권총도 준비되어 있을 거고,
 비행기 좌석도 선불로 예약되어 있을 것이오'

사내가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나를 죽여 줄 거요?'
'그러죠'


2
플래치는 해변 근처의 공중 전화 부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전화 번호를 돌렸다.
'클라라?'
'플레처! 거기 어디야?'
'공중 전화 부스 안이야'
'잘 지내고 있어?'
'물론'
'걱정 많이 했어'
'나도 사랑해. 이 여우야'
'말로만 그러면 뭐해'
'찾을 땐 없고서. 저기. 나 오늘 밤 올라갈 거야'
'사무실로 말이야?'
'그래'
'왜?'
'내 생각에 말야,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그레고리 맥도널드 - 플레치
역자 - 정철호
고려원 - 1992. 06. 01.

[t-23.07.13.  230707-1816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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