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그의 기록 2
그날 나는 오전 10시 무렵의 텔레비전 뉴스를 귓가로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주부 대상의 시간대라서 그런지 앵커는 30대 후반의 여자 아나운서였지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나는 누나가 걸레를 들고 가까이 다가와 바닥을 닦으려 하자
두 발을 모두 소파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내 앞에 엎드린 누나의 오른쪽 어깨가 문득 눈에 들어 오더군요.
습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는 그 우울한 어깻죽지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마흔이 넘어버린 누나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때, 브라운관 안에서 초등학교 교사처럼 이상 고온 현상을 친절히 설명하던
부드러운 목소리를 제치고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 것입니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해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좇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여자..... 이 아파트에 살던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습니다.
누나는 걸레질을 계속하며 무심히 말하더군요
"어, 아나운서가 바뀌었구나.
맞아. 여기 사는 여자야. 너도 봤니?
요 앞 동에 제이비에스 아나운서들이 모여 산다고 하던데....,"
그리고 또 무어라고 덧붙이는 누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내게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기자 리포트가 끝나고 다시 당신의 얼굴이 나올 때를 기다리며
나는 화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지요.
당신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당신의 짙은 화장이 잘 드러나지 않더군요.
조명 아래서 당신의 얼굴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그 얼굴은 정말 완벽하게 연희를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연희의 증명사진이 눈앞에 재현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장식장 근처로 다가간 누나는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고 라디오를 켜고 있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리모컨을 찾아 들었지요.
누나의 놀림 속에 JBS로 텔레비전 채널을 맞추고
JBS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나날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시간들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지난 한 달 내내 당신을 지켜보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당신이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보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집중했고 어느 때 보다도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금방 지나가 버리는 것을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것 같습니다.
나는 뉴스를 진행하는 당신이 좋습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조금은 도도한 목소리로 기사를 전하기만 하는 당신의 모습이 진짜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요일 저녁에 보게 되는 당신의 얼굴은 아직 내게 낯섭니다.
풍부한 표정과 함께 밝고 상냥한 목소리로
리포터 역할을 해내는 당신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에도 그런 목소리가 나오긴 하지만
조명 아래의 얼굴을 함께 보는 것이 아니 어서인지
그건 또 그것대로 당신의 다른 한 모습처럼 여겨지는데 말이지요.
그날 처음 뉴스에서 당신을 발견한 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을 챙겨 보고 들으면서
나는 점점 더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저 여자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무슨 말이든 나눠보고 싶다.
내 앞에서 말하는 표정과 몸짓을 지켜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가요 데이트의 주말 특집 공개 방송이 진행되는 곳,
시내 한 백화점의 특설 무대로 말입니다.
그곳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나는 겨우 앞으로 다가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더군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은 내가 본능적으로 외면하는 장소입니다.
무대는 사람들이 앉은 의자 바로 앞에
둥글게 공간을 만들어 마이크 세 개를 세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바닥에 어지럽게 깔린 전선들과
그 뒤쪽으로 유리로 작게 만든 공간 속에서 엔지니어인 듯한 사람들이
각종 기계를 만지는 모습 정도가 방송국 시설 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지요.
시간이 꽤 흘렸는데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진행하는 것인가 싶어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같은 5월이었지요.
온몸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불현듯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러나 나는 이미 낯선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작게 쪼그려 앉은 나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식은 땀마저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문득 당신을 향한 알 수 없는 분노가 맹렬히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호홉마저 편안히 할 수 없었던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따금씩 눈앞이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당신이 나타나더군요.
틀림없는 당신이었지만 거기서는 또 달라 보였습니다.
청취자가 직접 참여해서 노래자랑을 벌이는 형식의 방송이라서 그런지
당신은 거기서 무척 친근감 있게 보였습니다.
리허설을 할 때에는 더욱 그렇더군요.
출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때로는 수다스러운 새댁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차분하게 정돈된 분위기와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말끔함으로 요약되던 당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흐트러지는 느낌이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연희를 닮아 있었고,
나는 당신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었습니다.
어떤 게 저 여자의 진짜 모습일까....,
누나 집으로 돌아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 갔습니다.
나중에는 당장이라도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지더군요.
가슴을 옥죄는 초조감 때문에 그날 밤엔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나는 변함없이 편지만 쓰고 말았지요.
만나기는 커녕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고 말입니다.
하나의 얼굴만을 가진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양면성이라는 것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 다른 표정과 행동을 보이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진행하는 프로그램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먼발치에서 바라 보아도 또 그때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면 오로지 연희를 닮았다는 점 뿐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런 모습대로 저런 모습은 저런 모습대로
당신에게는 연희의 이미지를 꼭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게 진짜 당신의 모습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마치 연희처럼 당신도 나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당신, 혹시 잉에 브르크 홀름을 알고 있는지....,
소년 토니어의 사랑이었던 잉에는 파란 눈과 금발을 지닌 밝은 유형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나는 그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상적인 사람들을 늘 부러워합니다.
인식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던 토니오 크뢰거처럼 말입니다.
연희에게서도
또한 당신에게서도 나는 처음부터 잉에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토록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희는 그 평범한 부러움조차도 내게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다시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 역시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군요..
애초에 내가 당신에게서 보았던 잉에의 모습은 이제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당신의 이마에서 흐릿한 낙인의 흔적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명 가운데에 섞여 있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낙인.
토니오 크뢰거가 말했던
그러한 낙인을 지닌 당신은 분명 불타오르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당신은
그토록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지금 그렇게 밖에는 당신의 다변적인 얼굴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시작되었지만 당신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는 요즘,
나는 여태 당신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오로지 편지만 써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을 준 채 쓴 글들을 당신이 진행하는 정오의 가요 프로그램 앞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이 내 편지를 방송에서 읽어 주는 그날,
나는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합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벌써 오후 7시가 되어가는군요.
오늘은 당신이 TV 매거진의 리포터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날입니다.
이제 당신을 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 이 글은 <아름다운 여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ebook21 - 2016. 05. 21.
[t-23.08.01. 210803-062615-3]
'작가책방(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텔 선인장 - 약 속 (0) | 2023.09.20 |
---|---|
호텔 선인장 - 계기 (0) | 2023.09.15 |
그레고리 맥도널드 - 1 플레치 (0) | 2023.07.13 |
아름다운 여름 - 푸른 노트 (0) | 2023.07.12 |
120% COOOL - 다이어트 코크 (0) | 2023.07.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