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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호텔 선인장 - 계기

by 탄천사랑 2023. 9. 15.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선선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아주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예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습니다.
열세 살 먹은 수고양이로 건물 주인이 기르는 녀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상당한 멋쟁이로 방탕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낮잠만 자는 늙은 고양일 뿐입니다.

이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면, 실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공간이 있습니다.
우측 벽에 우편함이 늘어서 있고, 한쪽 구석에 철재 접이식 도어가 달린 엘리베이터가 있고,
그 앞으로 좁은 통로가 나 있으며 막다른 곳이 마당이었습니다.

현관 홀의 바닥은 검정과 흰색의 타일을 발라 놓았기 때문에 
고급 구두를 신은 사람이 들어오면 또각또각 하고, 소리가 울려 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고급 구두를 신은 사람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파트는 3층 건물로 한 층에 4개씩, 모두 합쳐 12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그중 3층 한구석에 '모자',  2층 한구석에 '오이', 그리고 1층의 한구석에 숫자 '2'가 살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오이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어울렸습니다. 

그럴 때면 모자는 늘 위스키를 마시고, 오이는 맥주를 마셨습니다.
숫자 2는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자몽 주스를 마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이의 방에는 언제나 위스키와 맥주, 자몽 주스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오이의 고향에서 딸기를 잔뜩 보내온 적이 있었습니다.
오이가 숫자 2를 위해 신선한 딸기 주스를 만들려고 했는데, 2는 난처한 듯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이윽고 결심한 양, '........ 그만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자몽 주스를 마시는 데는 이유가 있어. 
 자몽은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안심이 되는 거야. 
 그렇지 않고 복숭아였다고 가정해 봐. 
 가을이 되면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아. 
 요컨대 과일가게에만 가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해.” 

오이는 이와 같은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하지만 지금, 보다시피 딸기를 손에 넣었잖아."라고 반론했습니다.

그러나 숫자 2에게는 소용없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며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해. 
 자네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숫자 2의 성격은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친구로서 마음을 트는데도 시간이 가장 많이 걸렸습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2는 처음에는 모자와 오이가 꽤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지금처럼 허물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는지,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계 기
세 사람 중 이 아파트의 최고 고참은 모자였습니다.
숫자 2가 이사 왔을 때 모자와 2는 서로 상대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자는 대부분의 일에 무심한 편이었고,
반면에 2는 모든 일을 의심하다 못해 두려움마저 느끼는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며 가며 마주칠 때면 인사 정도는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2는 내심, 모자에 대해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오이가 이사를 왔는데 2는 이번엔 마냥 무관심하게 지낼 수만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오이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방안에 온갖 운동 기구를 들여놓고 매일같이 몸을 단련했습니다.
그런데 오이의 방 바로 아래층에 2가 살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는가 하면
(이때 오이는 줄넘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삐걱삐걱 차르르 차르르' 하는 소리에 새벽녘의 수면을 방해받기 일쑤이고
(그때 오이는 헬스 사이클을 타고 있었지요)
'꽈당!'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이 흔들리는 등.....
(오이가 바벨을 떨어뜨렸습니다)

여러모로 괴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숫자 2는 고충을 호소하기 위해 오이를 찾아갔습니다.
워낙 옥신각신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낯을 가리는 2로서는 실로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현관문을 연 오이는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2의 눈길을 끈 것은 오이의 땀도, 거친 호홉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이가 목에 감고 있던 금빛 쇠사슬이었습니다.
취미 한번 고약한 녀석이군, 하고 2는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2는 예의 바르게 '운동 중에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오이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오이는 '아니, 아닙니다.'라고 싱글싱글 웃으며,

"거기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 좀 들어오시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멀리 이곳 (호텔 선인장)으로 갓 이사 온, 사람 좋은 오이에게 2는 첫 번째 방문객이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2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먼지도 떨어집니다.
게다가 방이 흔들리는 바람에 벽에 걸어 둔 달력이 늘 비뜰어집니다.
등등, 2는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서 벽의 달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듯하게 걸어 두어야 했습니다.

"그거 큰일이군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미안합니다."라며 오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원래 순수하고 솔직한 성격을 가진 오이였던 것입니다. 

"뭐든,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덧붙여 말하며, 오이가 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는 바로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상대의 기세에 말려든 것만 같아 석연치 않았습니다.

"어쨌든 좀 들어오시죠?"
"아니, 괜찮습니다."  2는 재차 사양했습니다.
"그러세요? 이거 섭섭한데요. 다음에 시간 날 때 꼭 오셔서 천천히 놀다 가세요.
 다행히 이곳은 조용하니까요."

이 말에 2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오이가 자신의 물음에 전혀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앞으로 운동은 그만둬 주시는 겁니까?"

2가 강한 어조로, 이번에는 분명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이 쪽에서 놀라며,

"운동을 왜죠?"라고 되묻는 꼴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2는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범한 바닥에서 자라나 애초부터 대범하게 생겨먹은 오이는,
2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행운 뒤에 불운이 따르기 마련이듯, 
조용한 집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란스러운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이의 부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이 곧 세상사'이며, 
모친의 말을 빌리면 "신이 정하신 일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라는 진리였습니다.

"함께 갈 데가 있습니다."

몹시 불쾌해진 2가 오이를 데리고 모자에게 상담하려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자의 방은 오이의 방 바로 위였기 때문에 모자 역시 피해를 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2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2가 모자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오이는 뭔지 이유는 잘 모르면서도 어쨌든 미안한 심정으로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이의 부모님은 아들을 엄하게 키웠습니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에도 일가 친척이 모인 오이의 송별회 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유야 어찌 됐든,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기 때문이었습니다.

"난 상관없어요."

설명을 다 듣고 난 모자가 시원스레 대답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모자의 반응에 2는 무척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오이 쪽은 다시 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쁜 나머지,

"저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버릴 정도로 말입니다.

오이는 용감하고 예의 바르며 심성이 곧은 젊은이였지만, 이런 저런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신경이 쓰일 테지?"

모자의 물음에 2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괴롭다 보니, 
오이의 운동은 어찌 되든 좋으니까 어서 방으로 돌아가 두통약을 먹고 싶다는 것이 2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자가 빙긋이 웃으며 다음처럼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방안의 천장을 청소해서 먼지가 떨어질려야 떨어질 수 없도록 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방바닥에 두터운 카펫을 깔아요.
 나중 일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마지막 말은 그저 모자의 입버릇일 뿐이었지만, 오이도 숫자 2도 이 때는 이직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좋은 생각인데요?"  오이가 말하며 모자에게 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이 분 방으로 놀러 가지 않겠습니까?"

2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이라고 말할 때, 오이의 나머지 한 손이 자신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좋지, 술도 가져갑시다."

2는 한층 당황하는 가운데 모자는 그렇게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날, 모자와 오이는 동이 틀 무렵까지 2의 방에 있었습니다.
2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술안주를 준비하고, 모자가 흘린 담뱃재도 닦아가며, 자몽 주스를 마시면서 어울렸습니다. 

2에게는 친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모자와 오이는 2의 첫 방문객이었습니다.
2는 자신의 방에 손님이 있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모자와 오이는 2의 방을 칭찬했습니다.

"정돈이 참 잘 돼 있군요."라는 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와~ 정말, 누워서 자기 딱 좋은 소파잖아?"라고 오이가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칭찬받는 기분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신이 난 2는 엉겁결에, 주산 대회에서 받은 상장이며 어릴 적 사진들이 담긴 앨범까지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그래! 내친 김에 청소를 도와드리죠." 하더니,
자신의 방에서 사다리를 가져와 금세 천장을 깨끗이 닦아 주었습니다.


오이는 아크로바트(곡예)를 연습하고자, 통신 판매를 통해 그 사다리를 구입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모자와 2가 재촉하는 가운데, 사다리 꼭대기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능숙하게 균형을 잡아 보임으로써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의외로 괜찮은 녀석이잖아?' 2는 오이를 한결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밝아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돌아가버렸습니다.
2는 무척 쓸쓸해졌습니다.  (p23)
※ 이 글은 <호텔 선인장>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역자 - 신유희
소담출판사 - 2003. 04. 15.

[t-23.09.15.  230914-11242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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