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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호텔 선인장 - 약 속

by 탄천사랑 2023. 9. 20.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약 속

 

이제, 이 이야기는 곧 끝이 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아파트의 주민들은 차례차례 이사해 갔습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이사한 것은 오이였습니다.
공원을 가로 질러 거리 반대편에 있는, 큰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운동기구를 놓아 둘 충분한 공간이 있고, 주방은 대면식이었습니다.
더구나 목욕물도 시원스레 잘 나와서 오이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래층 방에는 속물과의 신혼부부가, 
위층에는 왠지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는 버섯 학자가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것이라고 오이는 생각했습니다.

대층 짐을 옮겨 온 후, 
오이는 그 새로운 방에, 2가 언젠가 직장에서 가져 온 해변의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2의 의자와 모자의 낡은 단지며 재떨이도 놓았습니다.
이 정도면, 언제 어느 때 친구들이 찾아온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뒤이어 이사한 사람은 2였습니다.
거리 한복판, 번화한 장소의 작은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차량의 왕래가 심하고, 
밤이 되면 젊은이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그런 장소였지만, 출퇴근하기에는 편리했습니다.
가까이에  좋은 과일가게가 있다는 점도 2에게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과일가게 주인은 안경을 쓴 온후한 인물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가게를 열어둡니다.
2는 이곳에서 이틀에 한 번, 자몽을 사게 될 것입니다.

2가 이사한 아파트의 옆방에는 머지않아 젊은 여성이 이사 옵니다.
아이가 있는 여성으로, 책방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방은 색다른 책방이어서, 
요가며 페미니즘, 자연식에 관한 서적만을 취급합니다.
2는 이 여성을 위해, 때때로 부탁을 받아 퇴근길에 장을 봐 주게 됩니다.
빵이며, 세제, 그런 류 입니다.
바깥일을 하고, 더구나 어린 자식까지 있다 보니 좀처럼 장 보기가 여의치 않아서일 테지요.

처음 얼마간 2는, 당연히 매일 밤마다 오이의 아파트로 놀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특제 달걀부침개를 먹고, 
라디오를 듣고, 오이의 새로운 친구인 버섯 학자를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2의 직장에서도 아파트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2의 방문은 점차 뜸해졌습니다.


모자는 12개 방, 12가구의 주민 가운데서 가장 늦게까지 '호텔 성인장' 에 남아 있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하나 둘씩 주민이 떠나가는 모습을 거북이들과 함께 창 너머로 지켜보았습니다.

이사할 곳은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거리 남쪽, 강 근처에 있는 외딴 집입니다.
하긴, 모자가 살기로 한 곳은 그 외딴 집에서 떨어진 
(지금까지는 헛간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볕이 전혀 들지 않는)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입니다.
모자는 그곳을 놀랄만큼 싼 값으로 빌릴 수 있었습니다.
해가 비치지 않는 것은 모자에게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의 겉표지가 햇볕에 그을려 상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자는 지금, 그 쓰러져 가는 집에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일은 모자에게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기 위한, 
그리고 덧없음을 곱씹는 모자에 걸맞게, 오랜만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모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낡은 집에 짐을 들인 후 자물쇠를 채우고, 거북이들을 데리고 여행길에 오른 것입니다.

"언제 돌아올 겁니까?"  역의 플랫폼에서 오이가 물었습니다.
"여행인 이상,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2도 다짐해 물었습니다.

모자는 아쉬움을 남긴 채 하드보일드 하게 여행길에 오른다, 라는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생각대로 하드보일드 하게, '언젠가는'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편지, 해 줄 겁니까?" 오이의 질문에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명심해 둘게"라고만 대답했습니다.
"빨리 돌아오는 편이 좋아요.
 ...... 그러니까, 짐도 그대로 놔둔 채이고, 도둑이 들면 안 되니까."

2가 말했습니다.
모자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 모습은, 알았다는 의미로도, 발차 시각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습니다.
마침 기관사가 기적을 울린 참이었으므로.

"돌아오면, 다시 야단법석 떱시다!"

2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열차의 문이 닫쳤습니다.
모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약속하는 겁니다?"

오이의 말에 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모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약속하는 겁니다?"

오이의 말에 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열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이라...., 
 좋고 말고, 약속하지.
 나중 일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모자의 그 중얼거림, 2에게도 오이에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세 사람은 '약속'을 했습니다.
세 사람이 한, 최초의 소중한 약속이었습니다.

모자는 머지않아 돌아오게 됩니다.
세 사람은 재회하고, 약속대로 야단법석을 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고, 왠지 모르게 어색한 일이 되겠지만) 
다시 오이의 방에 모여, 
저마다 겪은 인생의 새로운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술을 마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느 시가의 동쪽 변두리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낡고 허름한 회색의 석조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석조 건물은 안으로 들어서면 제법 선선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도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일찍이, '모자'와 '오이'와 숫자 '2'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는 검은 고양이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운 아파트는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 끝.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역자 - 신유희
소담출판사 - 2003. 04. 15.

[t-23.09.20.  230919-08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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