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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

아름다운 여름 - 샐비어의 꽃

by 탄천사랑 2023. 12. 1.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 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실제로 여름이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내게 진득진득한 소문의 그림자까지 들러붙는 바람에 
더더욱 그렇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스스로 마네킹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 까닭이었을까
사람들은 뒤늦게 내게 소문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내가 단순한 마네킹의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쓸데없이 작은 소리에는 민감해지는 반면 꼭 들어야 할 중요한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것이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집중력과도 관계되는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순간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허 선배가 들어오기 직전에 엔지니어들이 이상한 얘길 했었어요.
  여자 아나운서들의 목소리에 대한 거였는데....,
  기계적인 측면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면서......, 그런 얘기 안 했어요?"

그는 그제야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웃음을 지었다.

"응, 그건 말이지. 그냥 농담으로 평소에도 엔지니어들이 하던 말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애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하기 힘든 말인가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전부터 어떤 엔지니어가 자주 하던 이야기었는데,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처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런 웃기는 소리였어.
  결혼을 하고 나면 음색이 변하는 게 콘솔 계기판의 바늘이 아래로 달라붙는 걸로도 보인데.
  그거야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목소리가 굵어지는 현상일 뿐인데,
  괜히 그러는 거지 뭐."

그럼 결국 무슨 얘긴가.
미영이나 내 경우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음색이 변했다는 것?
그런 애길 심심풀이로 떠들어대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런 얘길 허 선배도 함께 했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저절로 미소까지 지어졌다.
그래,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평상심을 유지할 것.

"아니. 방송 들어가면서 다시 얘기하진 않았어.
  그냥 엔지니어들끼리 농담으로 하던 얘기였다니까. 나도 농담으로 들었고....,"
"그런데 말이죠, 
  그 사람들이 앞서 얘기할 때 화제의 주인공은 미영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건 미영이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비웃는 소리였는데....
  허 선배도 함께 그 농담을 즐겼나요?
  이젠 나하고 상관없는 여자라는 생각으로?"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뜻밖에도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

전화기가 벨 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수림이 받아서 내게 전해준 수화기에서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 들국화의 노래들을 신청했던....,"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고쳐들었다.

"저, 오늘 가요 데이트에서 하신 말씀 때문에.....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어떤 얘기 말인가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삶의 다양성? 제가 그런 얘길 했던가요?"

되묻고 나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전해 듣다 보니
참 장황하게도 이야기를 했다 싶었다.

시계 초점을 바라보며 애드리브를 할 때에는 
말의 내용보다 시간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므로 
나중에 무슨 말을 했던가 싶어질 때가 많았다.
심오한 내용은 고사하고 
그저 문장의 아귀만 맞아 떨어지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10초 혹은 20초 안에 딱 끝내야 하는 말이란 그야말로 시간에 종속된 공허한 말들이었다.
그 공허한 말을 그 남자가 멋대로 해석하고 덧붙여서 
내게 다시 전해주었다 해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그저 수화기에 귀만 대고 있었다.

"----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라고 토니오 크뢰거가 말했죠.
  저는 아직 작가 지망생에 불과하지만 당신은 이미 방송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며 
  작가로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마음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역시.... 그러셨군요. 작가 지망생이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그동안 왜 그토록 턱없이 내 마음을 교란시켰는지 비로소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휘말려 들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서들러 급한 일을 핑계 대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

어쩌면 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봄꽃의 현란함이 나를 유혹했고 여름꽃의 강렬함이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슬도 현실 참여도 내게는 모두 벅찼다.
가을이 되면서 나는 가까스로 서클을 탈퇴했고 
시간이 흘러가주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원했던 시험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고 
3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맞선 권유도 끈질기게 피해나갔다.
나는 그때 오로지 준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준처럼 단순하고 명확하게,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움직이는 몸으로만 살고 싶었다.
스무 살에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보태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우를 만나 어두운 서클룸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
정말이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새 다가온 졸업을 앞두고 
서둘러 선택한 어정쩡한 절충의 결과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주체 못 할 생동감으로 나를 떠밀던 대학 캠퍼스의 꽃이 아니라 
화병 속의 뿌리 잘린 꽃들을 바라보는 자리,

"왜요? 다시 전화가 걸려올까 봐 그래요?"

수림이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인 모양이었다.

"아냐,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느라고...."
"열성 팬인 모양이죠? 걱정 말고 촬영 준비하세요.
  또 전화가 오면 내가 적당히 처리하죠, 뭐."

잔뜩 날이 선 상태로 TV 뉴스와 '가요 데이트'를 마친 나는 
점심시간에 집으로 들어와 손을 씻다가 그대로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세수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오후의 촬영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수도꼭지를 잠근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젠 환청까지 나타나는군.

어이없어하며 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세수를 마쳤다.
물소리인지 전화벨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뒤섞여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러나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이번에는 정말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미영과 수림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실 전화기가 아니라 내 방의 전화기였다.

"여보세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설렘이 찾아들고 있었다.

"집에 있었구나. 휴대폰은 왜 꺼놨니?"

찬물을 끼얹듯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웬일이야?"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왜? 또 누구랑 헤어지기라도 했니?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니?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그런 물음이 오히려 준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것만 같아서였다.

"잘 지내지?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서울엔 또 언제 올라오니?"

내가 덤덤한 태도를 보이자 준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내가 초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이처럼 쉽게 대하게 된 것은 
그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받아 들이기만 했던 내 탓이었다.

"언제 한번 내가 거기로 내려갈게."

내가 계속 예사롭게 대꾸하자 준은 급기야 그런 소리까지 했다.
이 도시에 내려온 이후로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든지. 미리 전화만 하면 기다릴게."  

준과의 짧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화장대 위에 놓인 전화기에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는 잠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전화벨 소리가 들여오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전화벨 소리가 가져다줄 전환 같은 것이 아직도 내 인생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문득,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감지되던 어떤 기미가 아니라 분명한 기척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나는 결국 욕실로 들어가 간단한 샤워까지 마친 뒤 젖은 머리카락에 헤어컬을 감았다.

헤어컬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립스틱을 바르자 아나운서 이경운의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랐다.
등 뒤로 손을 돌려 원피스 지퍼를 힘겹게 올리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나는 서둘러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어느새 성큼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동욱의 우스개에 과장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스태프들과 합류하면서 일에 몰두하려고 애썼다.
강이 흐르는 이 도시를 떠나 또 다른 강을 촬영하러 가는 길이었다.
섬진강, 은어 낚시, 은어를 이용한 요리 밥.... 
큐시트를 한 번 살펴본 후, 나는 구성 작가가 써준 오프닝 멘트를 외우기 시작했다.
 
휴가철로 접어들면서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사무실에 꽃다발 하나가 배달되었다.

"이거 정말 굉장한데요! 아마 백 송이가 맞을 거예요."

공익광고 녹음을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였다.
수림이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말하며 꽃다발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었다.

"이것 봐요. 여기 리본에 이경은 아나운서에게 라고 쓰여있죠?
  보낸 사람 이름은 없어요. 하지만 그 스토커가 보낸 거 맞겠죠?"

하동욱까지 내게 달려들며 말하는 바람에 잠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수림의 손에서 하동욱의 손으로 옮겨간 꽃다발은 바싹 마른 드라이플라워였다.
초록색 망사에 둘러싸인 장미 송이들은 
말린 꽃잎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크기가 골프공 만큼씩은 했다.
말리기 전에는 그 크기가 상당했을 듯 보였다.

수림에게 이끌러 가까이 코를 대고 맡아본 장미 향은 아닌 게 아니라 아찔할 만큼 독했다.
성장을 멈춘, 이미 죽은 꽃에서 나는 향기란 어차피 산뜻할 수 없는 것이겠지.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린 여자처럼 천박해. 
  자연스러운 게 좋은데.... 혹시 이건 무슨 약품을 써서 말린 게 아닐까?
  색깔이나 모양이 지나치게 선명하잖아.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건조하기도 한다던데..... 잔인해."

말하며 나는 그 꽃다발을 책상 한 컨에 밀치듯 놓아두었다.

"그런데 정말 스토커예요. 지난번에 전화 왔던 그 사람?"

수림의 말에 나 대신 하동욱이 대꾸했다.

"또 전화가 왔었어? 그럼 진짜 스토커 맞네.
  생화도 아니고 이렇게 바삭바삭 말린 꽃을 보내고 말이야.
  이런 건 애완동물 시체를 보내는 것하고 같은 맥락 아니야?"
"하동욱 씨! 생방 들어갈 시간 다 되지 않았어?'

나는 그만 턱없이 화를 내고 말았다.
새로 사 온 하얀 꽃들로 꽃꽂이를 하던 수림에게 물었다.

"그 꽃은 이름이 뭐니?"
"칼라예요. 난 결혼식 때 이 꽃 한 송이만 손에 들고 싶어요. 요란한 부케는 싫어."

어느새 꽃꽂이를 마친 수림이 네게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 정말 스토커예요?" 
"그런 건 아냐,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스토커보다 더 지독해.
  자꾸만 집요하게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거든.
  혹시 나도 몸 안에 철사 따위를 찔러 넣고 유연함을 자랑하는 건 아니냐고 캐묻는 것 같아."


그날 밤 그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꽃을 보냈으니 무언가 연락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방송국이 아닌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동안 보내준 편지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리고 혹시 마른 꽃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마른 꽃이 아니라 말린 꽃입니다.
  제가 보낸 꽃들이 당신 곁에서 시들어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가 하나하나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말린 꽃이죠. 마른 꽃이 아닙니다."

장미 하나하나를 말리는 남자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야, 네. 그렇군요. 말린 꽃.... 고맙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괜찮으시다면.... 내일 가요 데이트의 첫 곡은 저를 위해 골라주시겠습니까?
  당신이 권해주는 노래는 무엇이든 좋을 것 같군요."
"네, 그건 어렵지 않아요.
  사연을 다 소개도 못해드리고 신청곡도 제대로 내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편지가 뜸한 것 같던데...."

괜히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뭐가 부담스럽냐고 물었고 그는 그저 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오히려 내 쪽에서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내 방송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들어온 것이었다.
시시껄렁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내가 하는 방송을 모두 보고 듣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끈끈한 것이 온몸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핑계로 전화를 끊어야 하나 궁리하는 동안 그가 갑자기 우울증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우울감에 심하게 빠지는 편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얘기였다.
나는 언젠가 잡지 기사를 인용해서 방송 원고를 쓴 적이 있던 터라 전문가처럼 말해주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은 거예요.
  그만큼 흔한 병이고 치료도 쉽다는 얘기죠.
  꼭 심리적인 것만도 아니어서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제를 사용하면 쉽게 나을 수도 있대요.
  궁정적으로 생각하고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 큰 병을 만들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우울감에 빠져 있지 말고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네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엔 웬일인지 그가 먼저 서들러 전화를 끊었다.
말린 꽃을 서랍장 위에 장식해 준다고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수림이 내게 물었다.

"누구예요? 이 사람?"

수림은 꽃다발에서 떼어낸 초록색 리본을 흔들어 보였다.

"응, 이번엔 우울증이라고 그러네.
  전에는 무슨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서 매일 엽서를 보내오던 청취자가 있었는데....,"

말하며 나는 쓸쓸히 웃었다.
그러나 다음날 '가요 데이트'의 첫 곡으로 그를 위한 노래를 내보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예쁘게 말린 꽃들과 함께 이 노래를 청해오신 분이 있습니다.
  유제하의 가리어진 길....,"

노래가 흐르는 스튜디오 안에서 나는 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레코드실에서 유제하의 음반을 골라들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며칠 전의 통화 때 그가 이 도시에 내려오겠다고 말한 것이 쉽게 잊히지 않은 까닭이었을까.

언제 한번 내가 거기로 내려갈게......,
그 목소리는 아주 오래 전 어느 날의 목소리를 꼭 닮아 있었다.
우리 이다음에 결혼하자.......,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다.
이런 것도 청혼일까,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가까운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플레이보이들의 낡은 수법이야."

우리의 만남을 지켜보았던 친구는 간결하고도 확신에 찬 분석을 해주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만나는 여자가 열두 명쯤은 될 걸?
  그리고 그 여자들 모두에게 그렇게 프러포즈를 했겠지."

시니컬한 말이긴 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언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까운 이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부이면 보일수록 
나는 점점 더 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어졌다.
엉뚱한 청혼 이후에도 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특히 육체적으로 너무도 신사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더욱더 조급해졌을 것이다.

이듬해 겨울에 나는 결국 준과 함께 시내의 한 작은 호텔을 찾아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동안 머뭇거렸고 나는 그 머뭇거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했다.

"나 다음 주에 맞선을 봐야 해.
  이제 곧 졸업반이니까 슬슬 시작해 봐야 한다나, 엄마 때문에 정말 미치겠어."

내 딴에는 비장한 마음으로 꺼낸 얘기에 준은 뜻밖에도 그러라고 했다.
이제 너도 결혼 준비를 해야 할 게 아니냐고, 나 같은 놈 말고 좋은 신랑감을 만나라고.

"그럼 나랑 결혼하겠다고 한 얘긴 뭐야?"
"그거야 내 욕심이지."
"내 욕심도 그거야. 그리고 더 욕심을 내자면 지금 당장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머뭇거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줘."

낯선 호텔 방에 들어가 어두운 커튼을 열었을 때, 바깥 세상은 아직도 태양 아래 환했다.
늘 나의 귀가 시간을 챙기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행여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절부절 나를 변명해 주던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태양 아래서도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졌다.
하지만 준의 입술이 처음으로 내 입술에 닿았을 때, 나는 분명 떨고 있었다.
떨림 속에 비로소 안도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이제 나는 완벽한 몰두에 이르렀다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은 준에게 몰두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완전히 내던지지 않았는데 어찌 그것을 몰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곧 끝날 거야, 조금만 참아. ...... 이렇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어떡해?
  긴장을 풀어야지. 그래, 그렇게......,"

나는 준에게 이끌려 준에게로 몰입해 들어가면서 비로소 준을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나이답지 않게 능숙한 그의 몸짓을 느끼면서 
왜 그가 그동안 내게 그토록 신사적일 수 있었는지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그동안 그가 만나왔을 , 
어쩌면 그가 나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믿어왔을 수많은 여지들의 모습이 꼭 감은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곧 내 몸을 꿰뚫는 아픔에 힘주어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로 나서서 준과 함께 택시를 탔을 때,
FM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의 체온을 느끼면서 
나는 아주 간단히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생, 내 몸, 내 꿈, 
그 모든 것을 준에게 떠넘기고 명확하게 정해진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늙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 내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감당하기 싫었다.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어진 나의 길....."

노래가 끝나고 CM이 나가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말린 꽃다발을 보낸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어쩌면 그에게도 이 노래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곡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감정에 빠져서 엉뚱한 사람을 내 인생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음 곡을 소개하기 직전에 나는 마이크를 끌어 당기며 중얼중얼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그 길을 찾고, 개척하고, 
  걸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또 흔히 누군가에게 힘을 얻기를 기대하기도 하죠.
  때로 그것은 타인을 향한 비정상적인 몰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반드시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가려진 길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삶도,
  때로는 그 길을 포기하고 주변을 배회하는 삶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p189)
※ 이 글은 <아름다운 여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고은주 - 아름다운 여름
ebook21 - 2016. 05. 21.

광교호수공원  {t-23.12.01.  20221201-133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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