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투이 - 루」
라츠지아 연안에서 한밤중에 닻을 올리기 전까지는 배 안의 사람들 대부분에게 한 가지 두려움밖에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두려웠고, 그래서 탈출을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배가 똑같은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로 나온 뒤로
두려움은 100개의 얼굴을 지닌 괴물로 변했다.
그 괴물이 우리의 다리에 톱질을 했고, 다리를 뻗지 못해 근육이 뻣뻣해진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
두려움에 짓눌린 우리는 두려움에 갇혀 굳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머리에 옴이 가득한 아기의 오줌이 얼굴로 날아와도 눈을 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토사물 앞에서도 코를 움켜쥐지 않았다.
누군가의 어깨,
누군가의 다리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각자의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굳어버린 채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대로 마비되었다.
갑판 위를 걷다가 바닷속으로 사라진 어린 소녀 이야기가
악취 나는 배의 배 속에 마취 가스처럼 혹은 웃음 가스처럼 퍼져 나갔고,
그 가스는 우리를 비춰주던 단 하나의 전구를 북극성으로,
엔진 오일이 배어든 딱딱한 빵을 버터 비스킷으로 바꾸어놓았다.
목과 혀와 머리에서 느껴지는 엔진 오일의 맛에 취한 우리는
내 앞에 앉은 여자의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졌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공산주의자들이나 해적들에게 잡힐 경우
청산가리 알약으로 가족 전부를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영원히 잠들게 할 계획을 세웠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째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서 미리 앗아가려고 했는지.
나 자신이 어머니가 되고 나서,
사이공의 저명한 외과 의사이던 빈 씨가 열두 살짜리 아들부터 다섯 살짜리 딸까지
자식 다섯을 다섯 차례에 걸쳐 다섯 척의 다른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그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빈 씨는 공산당 정권의 위협에서 자식들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정작 그의 병원에 발을 들여놓은 적 없는 공산당 동무들을 수술하다 죽였다는 죄목이었기에,
자신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다섯 아이를 배에 태우면서 빈 씨는 그중에 하나라도, 어쩌면 둘까지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그를 어느 성당의 계단에서 만났다.
자신이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다섯 아이가 다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모두 키워준 사제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는 그곳에서 겨울에는 눈을 치웠고 여름에는 비질을 했다.
※ 이 글은 <루>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킴 투이 - 루
역사 - 윤진
문학과 지성사 - 2019. 11. 29.
율동공원 [t-22.12.26. 20211204-16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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