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식주의자 (큰 글자도서) - 한강 / 창비 2024. 11. 01.
채식주의자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 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 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 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환 느낌을.
[t-24.11.27. 20241127-135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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