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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ㅅ - ㅇ

날씨를 선물하는 일기예보-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서동욱

by 탄천사랑 2024. 5. 16.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 서동욱 / 김영사 2024. 01. 12.

프롤로그 / 날씨를 선물하는 일기예보
비가 오면 젖은 흙 속에서 깨어난 나무 향기가 밀려온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탯줄을 통해 몸에 스며들었던 것 같은 그 내음은, 
내가 어떤 방황을 하더라도 결국 대지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툭 툭 소리가 점점 커지는 하늘을 겨우 가린 우산 아래서, 
비가 부딪치며 짙은 색이 천천히 번지는 산책로 담벼락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하루라는 낱말은 아주 가볍고 보드라운 어떤 생명 같아서 발음할 때마다 선물처럼 반갑고, 
어제의 시간으로 보내야 하는 일이 아쉽다.

또 커다란 잎사귀가 자신에게 입혀진 황금 도금의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떨어질 때 
잎사귀의 그 느린 동작을 큰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리 집 가을 강아지와 함께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것도 좋다. 
어떤 제식에 초대하는 것처럼 걸음마다 나무들이 길을 열어주면, 
우리는 숲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를 미안해하며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가을이 그토록 금색을 잘 입혀놓으면 모든 것은 무거워져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지는 모든 것의 쇠락과 갑자기 누리는 화려함 때문에 그저 고요하고 처연할 뿐이다.

조금 있으면 변덕스러운 추위도 찾아오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영하도 달래야 한다. 
추위의 볼모였던 따뜻한 바람이 한 번 두 번 풀려나 거리를 두리번거리게 되면, 
마침내 감동적인 툭 툭 소리가 어느 해 지는 거리에서 다시 내 우산아래 들어설 것이다. 
이렇게 날씨가 있다. 
반팔 티셔츠와 목도리와 외투와 우산과 장화가 늘 곁에 있으니 인간은 날씨 인간이고, 
그러니 날씨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 

날씨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 또한 철학도 날씨가 만들어낸다. 
독일의 검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오두막을 눈으로 덮어 따뜻하게 만드는 날씨는 생각의 알을 암탉의 체온으로 데우는 부화기이다.

중요한 것은 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날씨가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 날씨를 만드는 사상은 없는가? 
고대 민족이 먼 옛날 마음에 담았던 '레인메이커'의 꿈을 철학은 간직하고 있는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날씨의 언저리를 맴돌며 거기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캄캄한 불빛과도 같다고 모순을 동원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매력적인 철학자는 
이렇게 날씨를 만드는 착상을 최초로 사상사에 끌어들인다. 
물음의 수신자가된 그 누구도 그의 전의를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니체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부의 <해뜨기 전에>)에서 날씨를 바꾸고자 한다.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로, 
그러니까 구름 뒤에 숨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원리들로부터 자유로, 
나는 자유와 하늘의 청명함을 푸른색 종처럼 모든 것 위에 펼쳐놓았다고 자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날씨는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땅을 정복하거나 나라를 세우듯 날씨를 바꿀 수 없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날씨는 늘 인간에게 겸손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스를 정복하려 했던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투스 해협에 다리를 놓아 군사들을 전진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완성되자마자 바람이 불어와 다리를 쓸어가버린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에 대해 분노해 바다에다 채찍 삼백 대를 때리고, 
족쇄도 한 쌍 던져넣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7권이 전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날씨는 위대한 대왕을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할 뿐이며, 
날씨를 굴복시키려 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미련함만을 뽐내게 될 뿐이다.

<삼국지>가 종말을 향해 치닫는 103회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갈량은 상방곡 전투에서 비로소 위나라 사마의에게 마지막 승리를 빼앗을 기회를 얻는다. 
골짜기 깊은 곳으로 사마씨 삼부자를 유인하고 불 공격을 하자 
사마의와 두 아들은 부둥켜안고 우리 삼부자가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하며 통곡한다. 
그때 소나기가 퍼부어 불을 꺼주고 삼부자는 달아날 수 있게 된다.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결론은 날씨가 내린다.

<삼국지>의 이 진리는 이후 모든 세대의 소풍과 야유회와 운동회가 늘 절실하게 확인한다. 
날씨는 인간이 동원하는 모든 계산으로부터 달아나 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고삐 풀린 말이다. 
오랜 경전도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날씨의 이 비밀을 잘 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요한>,3:8, 공동번역). 

우리는 날씨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없다. 
날씨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조차 영원한 좌절을 친구로 삼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켜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 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의 눈은 삶에서 어디에 햇살이 깃들고 어디에 반가운 여름비가 오는지 찾아주어야 한다. 
삶의 구석구석을 응시하면서 말이다. 
삶에 햇살을 찾아주는 것도, 
가뭄 속에 간직된 비 향기를 기억해 내는 것도 생각의 노력에서 시작한다.

나는 정말 날씨를 만들어내던 그 행복한 여름을 간직하고 있다. 
정원에서 태양을 향해 분무기로 빗방울을 날려 보내면 경이로운 무지개가 나타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물보라가 솟구치면서 잠시 잠깐 내 머리엔 곡면이 매우 아름다운 부메랑 같은 무지개가 생겼다. 
우리 가족이 이사 오기 오래전에 
이 집에 살던 누군가가 정원에 숨겨둔 뜻하지 않은 보물을 꺼내는 듯한 기적 같은 놀이였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날씨를 선물했다. 
이제 막 태어난 여신처럼 

하늘로 오르는 무지개가 힘을 잃고 떨어질까 봐 혼자서 그녀를 어깨로 떠받치는 어린 사제처럼, 
분무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어린 손으로 태양을 향해 계속 빗방울을 뿌렸다.

그 정원을 오래전에 떠나온 나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날씨를 선물할 수 있을까? 
지금은 타인에게 건네는 글만이 무지개를 꺼낼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축제일인 듯 그 무지개 아래로 다가오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좋다. 
마치 누군가의 셀카의 배경에 우연히 찍힌, 
멍하게 무지개를 올려다보며 셀카의 주인공이 누리는 행복을 편들어주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날씨를 선물로 주는 일기예보 스크립트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일기예보는 날씨를 알려줄 뿐 아니라, 
이미 파산한 이를 위로하며 구제책을 조언하듯 옷을 따뜻하게 입어라, 
우산을 잊지 말고 출근하라 말한다. 
그런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비와 바람과 햇살과 추위와 더위가 넘쳐나는, 
울고 괴로워하며 웃고 또 씁쓸해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계에 대한 체험은 계획적인 공부거리가 될 수 없다. 
세계안에 나 있는 심연들 때문에, 
우리가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없고 파편들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계의 탐색자를 재촉하기보다 여기서 그냥 쉬라고 말한다. 
보라, 세상은 깨어졌다. 
그 파편들이 아름다우니, 이제 조개껍데기들이 빛을 반사해 우주로 돌려보내는 아침이면 하나씩 주워보자. 
그리고 조각들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보자. 
하나의 세계가 당신의 손 안에서 꼬리가 아름다운 별처럼 태어나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기분 좋은 궤도를 만들 때까지. 
그 별이 궤도를 다 돌면 하루가 지나는 이 세계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희망하는 '읽기'이다.

사랑하는 이의 웃음은 태양 아래 마개를 연 환타 한 병처럼 세상을 오렌지 빛깔로 만든다. 
분명 두 사람 위를 지나간 것은,  기상청의 예보를 바꾸고 갑자기 자신의 항로를 만들며 나타난 태양이다. 
탄산수 한 병이 분무기처럼 뿌려대는 입자의 우주 속에 물처럼, 
빛처럼 나타난 태양. 
삶은 곧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그것을 응시하며 웃고 싶다. 
모든 장애물을 걷어내고 자신의 날씨를 찾게 된 순간에. 
일상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는 그 놀라운 순간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2024년 봄을 건너다보며
서동욱


※ 이 글은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4.05.16.  20240516-160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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