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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 이스탄불의 터키화 - 유럽도시기행 1 / 유시민

by 탄천사랑 2025. 5. 5.

 

 

 

유럽도시기행 1 - 유시민 / 생각의 길 2019. 07. 09. 

아타튀르크, 이스탄불의 터키화
외국계 주민들이 이스탄불을 떠난 경위를 살피다 보면 무스타파 케말 또는 '아타튀르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내가 돌마바흐체 궁전 간 것도 술탄들의 허세를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타튀르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궁전의 주인은 건축주 술탄이 아니라 아타튀르크이다.
예외 없이 9시 5분을 가리키며 멈춰 서 있는 시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타튀르크가 옛 술탄의 침실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 시각이 오전 9시 5분이었다.
어떤 사람이었다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이스탄불의 역사에 비잔타스, 

콘스탄티누스 황제, 술탄 메메트 2 세만큼이나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타튀르크를 모르면 오늘의 이스탄불을 이해할 수 없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영국에 넘겨주고 모로코, 튀니지, 시리아와 터키 남동부 지역을 프랑스에 내주었으며,
에게해의 섬 대부분과 에게해 연안 도시들을 그리스에 빼앗겼다.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연합군이 장악했다.

1922년 12월 마지막 술탄이 제국의 해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스탄불을 떠나 망명길에 나셨을 때 

오스만 제국은 공식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 제국의 폐허 위에 아타튀르크가 터키공화국을 세웠다.

아타튀르크는 1880 년대 초 
그리스 북부 마케토니아 주의 테살로니키에서 말단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姓)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의 평범한 백성답게 흔하디 흔한 '무스타파'를 이름으로 받았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 무스타파는 고향의 군사 예비학교에서 
이름이 같은 선생님한테 '케말'이라는 새 이름을 받아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다.
이스탄불 사관학교 보병대를 졸업하고 1902년에 소위로 임관한 무스타파 케말은
1905년 시리아에서 근무할 때 비밀 정치 조직에 가입했다.

오스만제국은 패배했지만 다르다넬스해협의 차나칼레에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낸
무스타파 케말은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 직후 그는 오스만 제국 장군 계급장을 버리고 정치와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연합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상황에서
터키의 민족주의 정치결사였던 대국민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021년에는 앙카라에서 터키공화국 헌법을 선포하고 터키군 총사령관자리를 맡았다.

무스타파 케말은 그리스를 물리쳐 에게해 연안의 영토를 되찾았고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 탈환했으며,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고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해 터키공화국을 국제사회에 데뷔시켰다.
터키공화국은 1923년 7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과
로잔 평화조약을 체결해 국제사 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연합국 군대가 이스탄불을 떠난 직후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취임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인물과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을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 민족주의 혁명가, 대통령, 계몽 군주,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독재자였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이스탄불 여행자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는 없는 것을 본다. 
시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지만 수많은 자미들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과 개신교회가 끼여 있다. 
여성들은 적어도 법적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머릿수건을 쓰지 않고도 사회생활을 한다. 
거리에서 매를 때리는 형벌이 없으며, 하루 다섯 번 해야 하는 예배를 빠뜨려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정표와 상점 간판의 글자는 알파벳이다. 
이 모두를 무스타파 케말이 만들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16년 동안 대통령으로 일하면서 터키 공화국을 확실한 '세속국가'로 만들었다.
헌법에서 이슬람 국교 규정을 삭제했고 정치권력자를 종교 지도자로 세우는 '칼리프제도'를 폐지했으며,
오스만 황실의 후손을 추방하고 종교 학교와 종교 법정을 없애버렸다.
공공장소에서 남자는 모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여자는 머릿수건을 두르지 못하게 했다. 
또한 정치제도와 교육제도를 현대화하고, 유럽의 과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었다.
성평등법과 시인법을 제정해 여성에게 평등한 법적 권리를 주고 여성 판사를 임명했다.
그의 집권 기간에 20여 명의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인구조사를 시행해 창립 시기 터키공화국 인구가 1천360만 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아랍 문자를 버리고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뱃을 채택했으며,
현대적인 형법과 상법을 제정해 낡은 이슬람 율법을 대체했다.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국제도량형을 도입했으며, 유럽식 휴일 제도를 실시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국립학교를 열어 알파뱃을 보급하는 한편, 

터키역사협회와 터키어협회를 설립하고 이스탄불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 기관을 세웠다.   

그는 반대파의 폭동에도 개의치 않고 터키어를 예배 공식 언어로 쓰게 했고,
이슬람 성직자들이 자미 밖에서는 평복을 입게끔 했으며,

500년 동안 자미로 썼던 아야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성 을 쓰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은 '‘아타튀르크 (Atatürk 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때부터 아타튀르크가 되었다.
이런 성을 감히 선택한 동기가 애국심인지 자신감인지는 알 수 없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아타튀르크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순적인 인물이다.

※ 이 글은 <유럽도시기행 1>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5.05.05.  20230519_16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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