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시기행 1 - 유시민 / 생각의 길 2019. 07. 09.
다양성을 잃어버린 국제도시
이스탄불 공항에서 구시가지로 가면서 본 셔틀버스 창밖의 풍경은 상상과 달랐다.
넓고 깨끗한 큰 길, 키 큰 가로수 너머로 잘 지은 빌라와 아파트가 즐비했다.
날이 새기도 전에 보스포루스해협 위쪽 구시가의 작은 호텔에 도착해 일단 짐을 맡겼다.
이른 아침이라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높다란 성벽 아랫길을 걸으며 가랑비 내리는 해협의 새벽 풍광을 보았다.
어쩐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에 도착한 덕에 아직 눈뜨지 않은 이스탄불의 분위기도 맛보았으니, 시작이 좋은 여행이었다.
그렇지만 비 내리는 5월의 아침 공기는 밖에 어래 머물기 앤 너무 차가웠다.
허기를 달래고 몸도 녹일 겸 성벽 위쪽 골목의 동네 식당에 오믈렛과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역사가 무려 2천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 (Byzantium)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Costantinopolis, 영어로는 콘스탄티노폴)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20세기에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된 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실종되었고,
그때 만든 몇몇 건축물만 박제당한 공룡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터키공화국의 수도는 동쪽의 아시아 내륙에 있는 앙카라이지만
경제, 문화, 역사, 관광의 중심은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껴안고 있다.
흑해의 물은 보스포루스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해협, 에게해를 차례로 지나 지중해로 가는데,
이스탄불은 가장 좁은 보스포루스해협의 양안 (兩岸)을 끼고 형성되었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일원이었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놓인 에게해는 문명이 태동한 신화의 바다였고,
보스포루스해협의 언덕에 최초의 도시를 세운 사람들도 에게해를 건너왔다.
이스탄불은 테이터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사람이 많았다.
상주인구가 국민의 20%인 1천 500만 명에 육박하는데,
셋 중 둘은 유럽 사이드에 거주하고 하나는 아시아 사이드에 산다.
95%가 무슬림인 터키 국민은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지만,
더 개방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지닌 알레비파도 500만 명 정도 된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은 무슬림이지만 그 사람들 스스로는 큰 차이가 있다고 여긴다.
무슬림이 아닌 극소수의 터키인과 외국인은 대부분 이스탄불에 산다.
인구를 기준으로 볼 경우, 이스탄불은 유럽 도시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5위권에 든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는 뉴욕, 베를린, 파리, 베이징보다 훨씬 깊고 넓다.
아시아 사이드인 아나톨리아 (Anatolia)에는 8천 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으며 멸종된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유럽 사이드인 트라키아(Thracia)는 3천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했다.
전설에 따르면 B.C.7세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유럽 사이드 '골든 온(Golden Horn)'이라는
만(灣)의 언덕에 처음으로 마을을 세웠다.
그리스 남부 도시 메가라의 권력자였던 비자스 또는 비잔타스가 그 주인공이다.
비자스는 델피 신전에서 '눈먼 자들의 땅'에 도시를 세우라는 선택을 받고
사방을 헤맨 끝에 골든혼 남쪽에 솟은 언덕을 찾아냈다.
비잔티움은 비잔타스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비잔티움은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를 건국해 거대한 제국으로 키운 라틴족의 지배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동로마제국의 권력을 서서히 잠식한 끝에,
6세기에 들어서는 황실의 공용어까지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전과 후를 구분하려고 '비잔틴제국'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 글에서는 비잔틴제국 과 콘스탄티노플을 기본으로 하되,
맥락상 꼭 필요할 때는 동로마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용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답게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을 구현한 국제도시로 발전했다.
기독교가 국교였지만 다른 종교와 민족과 언어를 박해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으며
15세기에 이스탄불이 된 후 에도 그런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이스탄불은 두 대륙의 접점이고 보스포루스해협의 지정학적 요충이라는 경제지리학적 특성 때문에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전략 거점이었고 지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철로의 연결점이 되어 있다.
도시의 성격은 크게 바뀌었다.
예전의 이스탄불이 지녔던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다양성은 거의 다 사라졌다.
터키공화국이라는 그릇은
1천500년 이어진 국제도시 이스탄불의 문화 자산을 담아낼 만큼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이스탄불의 흠을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 도시의 오래된 건축물과 공간을 독해하려면 이런 변화를 고려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 이 글은 <유럽도시기행 1>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5.05.09. 20250507_13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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