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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ㄷ - ㄹ

부서진 가슴에서 야생화가 피어난다-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류시화

by 탄천사랑 2025. 3. 5.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 / 수오서재 2023. 12. 21.

토끼가 새끼를 뱄다. 
귤밭 전체의 공기가 예민해진 것이 느껴진다. 
서귀포 귤밭의 50년 된 돌집을 집필실로 바꾸는 작업이 한창이던 작년 여름, 

귤나무 사이로 이 흰 토끼가 처음 나타났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고 소리쳤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니?’  
토끼도 선글라스에 장발을 한 야수를 보고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다음 날 보니 한 마리가 아니었다. 
조금 어려 뵈는 흰 토끼가 또 한 마리 깡충거리며 뛰어다녔다. 
며칠 후에는 검은 토끼도 모습을 나타내었다. 
 
늘상 반바지에 웃통을 벗고 다니는 이웃 밭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누군가 집에서 키우다

‘귀찮으니까 내다 버린’ 것이라고 말하고는 내가 남자인데도 쑥스러운지 팔짱을 껴서 가슴 부위를 가렸다. 
내 돌집이 위치한 귤밭은 사계절 농약도 치지 않고 제초제도 뿌리지 않기 때문에 
토끼들로서는 맛있고 상큼한 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낙원인 셈이다. 
그래선지 꿩들도 푸드덕 날아들고 뱀허물도 발견된다. 

글 쓰다 문장을 중얼거리며 수시로 귤밭을 거니는 나의 동선 중간쯤에서 토끼들과 마주침이 있다.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지만 배 속에 새끼 가진 어미 토끼로서는 이 야수 인간이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다.
내가 나타나면 아연 긴장해 핑크색 귀를 세우고 토낄 태세이다.
그러다가 배 속의 새끼가 잘못되면 큰일 아닌가!

토끼를 안심시키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내가 토끼로 변신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토끼모자를 구입했다.

아이들 용인지

크기가 작아 꽉 끼는 토끼모자를 얼굴에 동여매고 나타난 나를 보았을 때의 토끼들 표정을 당신이 봤어야 한다!
땅바닥을 엉금거리며 기어 오는, 

자신들보다 귀가 열 배는 긴 돌연변이 토끼를 보자 흰 토끼 검은 토끼 모두 풀 뜯던 동작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저 토끼가 사람인가, 저 사람이 토끼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토끼라고 믿게 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철사 끼운 기다란 귀를 쫑긋 세웠다가 옆으로 늘어뜨리기도 하고 등을 동글게 움츠려 입을 오물거리기까지 했다. 
대성공이었다! 
토끼들은 전과 달리 내가 꽤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토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어미 토끼도 경계가 느슨해졌다. 

귤밭 옆에 시도 때도 없이 우는 닭들만 사는 빈집이 있어서, 
근처 빌라로 이사 간 그 집 할머니가 닭 모이도 주고 달걀도 걷어 갈 겸 하루 한 번씩 들른다. 
닭장으로 직행하기 전에 할머니는 바다를 둘러보러 가는데, 그러려면 내 돌집 앞을 지나가야 한다. 
 
갑자기 이웃에 등장한

낯선 행색의 외지인 정체가 궁금한 할머니는 나에 대해 묻기 전에 먼저 당신의 내력을 말해 주셨다. 
자신이 전직 해녀라는 사실과(그래서 어김없이 바다를 보러 가신 것이다), 
지금은 무릎이 아파 걷기도 힘들다는 것(이 말을 할 때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으셨다), 
닭들은 아들이 사다 놓고 돌보지 않아 자신이 매일 모이를 준다는 것, 
그리고 농사는 이런 식으로 ‘게으르게’ 약도 안 치고 풀도 안 베면 안 된다는 지적도 하셨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나에 대해서는 소개할 기미가 안 보이자 할머니는 구부정하게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날, 토끼모자를 쓰고 철사 끼운 기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서 귤밭에서 걸어 나오는 
나와 맞닥뜨렸을 때의 할머니 표정을 당신이 봤어야 한다! 
강력한 도수 치료를 받은 것처럼 굽었던 허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다문 입이 벌어질 줄 몰랐다. 
토끼들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일을 인간은 왜 그토록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까. 
그날 이후 할머니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벼슬 달린 닭모자를 쓴 할머니와 토끼모자를 쓴 내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은 나만의 상상이었다. 
 
나는 당분간 토끼모자를 고집하며 토끼이기로 했다. 
토끼 새끼들이 태어나면 첫 마주침부터 나를 동족으로 받아들이도록. 

또한 인간의 얼굴을 벗고 싶을 때가 누구나 있지 않은가. 

사실 이 변신술은 인간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다. 
인간은 어린아이와 얘기할 때는 목소리를 약간 코맹맹이처럼 만들고 얼굴도 재미있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한없이 달콤해지며 그 표정과 목소리 그대로 의사를 대하는 이는 없다. 
목사님과 스님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이 겸손해진다. 
코끼리 밑에서와 생쥐 위에서가 사뭇 다르다. 
홀로 있을 때는 본연의 나로 돌아오며 명상하면서 자기 존재의 드넓은 침묵에 다가가기도 한다.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되고 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내가 지금은 토끼모자를 쓰고 토끼들과 놀고 있다.
존재의 근원을 공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능력자라는 의미이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어져서 다른 모습들은 자신으로부터 제외하려는 것은 에고의 고집이고 자기연민이다.
굳어진 돌에는 존재의 다양한 기쁨이 스밀 수 없다. 
그때 우리는 삶의 바깥쪽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게 된다. 
그것을 잘랄루딘 루미는 이렇게 썼다.

단단한 바위에 봄이 어떻게
정원을 만드는가.
흙이 되라. 부서져라.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니.
너무 오랜 세월 그대는 돌투성이였다.
다르게 해 보라.
항복하라.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에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나는 인간이고 토끼이며 토끼 모자를 쓰고 눈 쌓인 한라산을 바라볼 때는 산 그 자체이고, 
돌집 바닷가에서는 흰 파도 그 자체가 된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나 자신이 된다. 
존재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그렇게 매 순간 대상에서 대상으로 하나의 신비에서 또 다른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이 글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5.03.05.  20250303_16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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