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 류시화 / 수오서재 2023. 12. 21.
당신 책을 읽다가 졸려서 베고 잤다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과 함께 생활한 인류학자 리처드 B. 리가 전하는 일화가 있다.
연구 기간이 끝날 무렵 리는
그동안 부족민들이 베푼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축제 날에 소 한 마리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 전부터 소들을 살피며 다닌 끝에 다른 부족 마을에서 550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의 황소를 발견했다.
그 지역 부시맨 150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소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면서 축제 때까지 소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리가 축제를 위해 소를 샀다는 소문이 돌자 부시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찾아와 정말로 소를 샀는지 확인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온타, 당신은 우리가 그 삐쩍 마른 소를 먹기를 원해?”
'온타'는 부시맨 말로 '흰둥이'라는 뜻이다.
그 부근에서 가장 큰 소라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온타, 여기서 3년이나 살았으면서 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군.
소가 크다고 살이 많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아."
"온타, 왜 그런 실수를 한 거야?
그 늙어빠진 소로는 이 지역 부시맨은 고사하고 한 가족도 제대로 먹일 수 없어.
먹고 배탈이 나서 뒹굴지도 몰라."
한 노인은
"그렇게 적은 고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인류학자는 다시 살찐 암소를 구하러 동분서주 다녔지만 허사였다.
결국 축제일이 되어 그 '늙고 삐쩍 마른' 소를 대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시맨의 방식대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나는 뭘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너무 늙고 야윈 소를 고르긴 했지만, 아무쪼록 즐겁게 드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막상 소를 잡고 보니
'뼈밖에 없어서 국이나 끓여 먹어야겠다'던 사람들의 말과 달리 고기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부족민 전체가 춤을 추며 이틀 밤낮을 배불리 먹었다.
아무도 배고픈 채 귀가하지 않았고,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학자가 다가가면 사람들은 여전히
"소가 너무 말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거나
"온타가 형편없는 판단력을 갖고 있다."라는 둥 떠들며 웃어댔다.
조롱당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며칠 후, 부시맨 문화를 잘 아는 이웃 부족 남자로부터 뜻밖의 설명을 듣고 인류학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렵 생활을 하는 부시맨들에게 동물은 지방과 단백질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따라서 큰 동물을 사냥한 사람은 우쭐해지고,
자기가 추장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이 된 양 행동하기 쉽다.
자만과 교만은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언젠가는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시맨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큰 사냥감을 잡아 오면
"아니, 이렇게 살이 없고 뼈만 많은 걸 옮기려고 우리를 고생시킨단 말이야?
정말 한심하군. 형편없는 사냥감인 줄 알았다면 아예 오지 않았을 텐데..."하고 말한 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자만심이 깃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 보잘것 없는 사냥감 때문에 내 좋은 하루를 망치다니!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배는 고프겠지만 최소한 시원한 물을 마실 순 있지 않았겠나"하고
투덜거리면서. 사냥한 사람 자신도
"내가 아주 큰 놈을 잡았어!" 하고 허풍쟁이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다.
침묵한 채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오늘 숲에서 뭘 보았나?" 하고 물으면 그제야 조용히 대답했다.
"특별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어. 쬐그마한 놈 하나 겨우 잡았을 뿐이야."
그러면 사람들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가 아주 큰 놈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부시맨들과 생활하면서 그 인류학자는 종종 자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그는 담배를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자만심에 차 있었으며, 부족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친 것이다.
황소를 선물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보여 주려다가 뜻밖의 교훈을 얻었다.
부시맨들은 그를 깨우쳐 주기 위해 익살극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명상서적 한 권을 번역 중이다.
내 번역은 얼마나 서툴고 형편없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체이기는커녕 살점을 다 발라낸 뼈처럼 무미건조하다.
그런데도 독자가
'누워서 읽다가 졸려서 베고 잤다.'라거나
'읽었지만 제목과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거나
'책이 두꺼워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면 안성맞춤'이라고 하면 왜 에고가 상처 입고
움푹 파인 그루터기처럼 얼굴 표정이 변하는가?
그 말들을 부시맨들의 익살극 속 대사로 새겨들어야 하지 않은가?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은 진정한 '나'가 아니다.
※ 이 글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4.04.11. 20240109-1657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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