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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126

재연 스님 - 함평댁 ·「재연 스님 - 입산」 탄천 종소리를 멀리 내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일주문 앞에 열 아홉 살을 내려놓고 다시 한 걸음, 마음을 다 하여 마음 없는 곳에 이르기 곳에 이르기 위하여, 거칠 것 없는 대자유를 얻기 위하여, 새벽 공기처럼 싸아한 청년 행자의 상처와 각오가 초발심을 잃고 부유하는 삶의 어깨를 향하여, 때로는 죽비소리처럼, 때로는 새벽 숲을 일깨우는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스며든다. - 책 뒷면 표지에서. 함평댁 후원 한 쪽에서 공양주 보살 함평댁이 울고 있었다. 부목 처사는 홀애비 김 씨가 늦여름 이래 지금까지 해다 주는 나뭇단이 온통 가시투성이란다. 손바닥에 박힌 맹감나무 가시를 뽑아들고 훌쩍거리며 말했다. "썩을 놈에 인간, 그저 오기만 그득해갖고. 시방 내 나이 쉰이 다 되어서.. 2007. 11. 3.
친정엄마 - 엄마와 나의 생일 · 「고혜정 - 친정엄마」 엄마와 나의 생일 엄마의 생신이 돌아오면 늘 우리 가족들은 시골로 향한다. 생신이 겨울방학 기간이어서 부담도 없고 움직이기가 좋다. 그런데 폼 나게 엄마 생신을 축하하러 가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엄마를 힘들게만 하고 온다. "엄마는 현금을 더 좋아하지?" 하고는 잘난 봉투 하나 내밀어놓고 그때부터 며칠간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꼼짝하지 않고 뜨뜻한 온돌방에서 뒹굴뒹굴한다. 엄마는 그 잘난 봉투 하나를 생일 선물로 받고, 딸, 사위, 외손주들의 수발을 죽어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생일날 아침에도 누가 생일상을 차려주기는 커녕 당신 손으로 준비해 자식들 깨워서 먹이고 당신도 미역국에 한술 말아 들었다. 그게 미안해서 남편이 한마디 하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2007. 10. 30.
어린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 「한상복. 전지은 - 어린이를 위한 배려」 어린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 시인 김용택 우연한 기회에 『배려』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이런 책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어린이를 위한 배려』가 세상에 나오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배려는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에서 늘 일등만을 강요받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자란 아이는 무조건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고, 내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좁고 차가운 세상에 갇혀 자랍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아끼고 보살필 것이 많다는것을 '배려'를 통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2007. 10. 21.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 21세기에 다시 읽는 칼 마르크스 홍성욱 -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난감해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아 거절했지만, 시간을 두고 꼼꼼이 생각해보니 20대와 30대 초반에 읽은 토마스 쿤, 미셀 푸코,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쿤과 푸코는 내 학문적 탐구에 더 많은 영향을 준 반면, 마르크스는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한 몫을 했다. 사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숨쉬기 위한 공기처럼 우리주변에 산재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비과학적인 닫힌 체계라고 비판했던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도 '현대의 모든 사상가는 비록 이를 느끼지 못할지라도, 마르크스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젊은 시절 .. 2007. 10. 20.
구멍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 구멍(장혜련)」 구멍오늘 또 한 개의 구멍을 뚫는다. 살갗을 파고드는 금속성의 차가움.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텅스텐 조각은 눈썹 위에서 반짝인다. 언제나 이곳에 달고 싶었다. 드디어 뚫었다는 희열감에 녀석의 이름까지 날려 버린다.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지만 이 정도 위치쯤에는 뚫어 줘야지. 눈썹 위에 작은 구멍만을 남긴 채 H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얼음을 띄우고 소금을 조금 뿌린 코카콜라를 단 숨에 들이킨다. 언젠가 녀석을 만나면 웃으면서 콜라 한 잔쯤 같이 마실 수 있으리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액체 속에 묻어 비릿한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른 갈증이 혓바닥에 달라붙는다. 얼음 알갱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J에게 고맙다는 윙크를 해준다.. 2007. 10. 5.
존재는 눈물 흘린다 -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3)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연살구빛, 소매가 없는 수수한 파티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대리석 조각이 장식된 테라스 난간에 서 있다. 뒷모습으로 선 여자의 시선 너머로는 북국의 흰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시선이 닿는 먼 끝도 숲이었다. 숲의 끝은 수평선처럼 넓고 곧았다. 우리나라의 작은 숲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위엄이 넓은 어깨를 쭈욱 펴고 펼쳐져 있는 듯 했다.태양이 자작나무처럼 희고 길쭉한 그 여자의 팔 위로 쏟아져 내렸다.여자는 지금 1989 년의 모스끄바에 서 있다. 그때까지는 쏘비에뜨 연방이었던 그 나라의 수도,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찌의 물결이 아직 파도치던 그곳, 넓은 이마에 지도처럼 긴 반점이 박힌 대통령이 있던 나라에서 여자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유학생이었다.무엇인가 기척.. 2007. 9. 23.
조선의 얼굴-고향(현진건) (단편 소설) 현진건 -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무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 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 2007. 9. 16.
구렁이들의 집 - 봉천동, 그 찬란하던 날 ·「최인석 - 구렁이들의 집」 봉천동, 그 찬란하던 날 목욕탕 털이범 상구가 감옥에 간 사이에 아내 영주는 이혼서류를 보내고, 그가 악착같이 모은 돈을 가지고 아이와 사라졌다. 아내를 응징하기 위해 아내의 뒤를 쫓지만 다른 사내와 살고 있는 아내는 여전히 불행하고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형수 한주선은 사람을 죽이던 순간 또 사형집행을 당하는 순간 '푸른 송아지'가 보인다고 했다. 나라에선 불행한 사람의 몫을 빼앗은 죄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골라 처형하겠다는 법을 만든다고 떠들썩한데, 조그마한 행복조차 짓밟은 아내를 나라의 법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려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푸른 송아지가 상구의 눈에도 보인다. "아이가 죽었다구요?" 수희는 깔깔거렸다. 누가 죽었대요? 상구는 다시 물.. 2007. 9. 10.
개벽-운수 좋은 날(현진건) (단편소설)개벽 / 48호 - 「운수 좋은 날」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문 안 - 서울의 사대문 안. 첫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2007. 9. 2.
깊이에의 강요 -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 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 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소묘를 들여다 보고 낡은 화첩을 뒤적거렸다. 완성된 .. 2007. 8. 26.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지혜를 찾는 기쁨 ·「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지혜를 찾는 기쁨 살아갈수록 지혜의 덕이 필요함을 나는 날마다 새롭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에 대한 글귀나 그림을 모은다고 했더니, 나의 정다운 친구는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wisdom'이라는 단어가 적힌 아름다운 돌을 하나 구해다 준 적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 돌을 만지작거리며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요즘은 '지혜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고 덕이란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라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말을 자주 외우고 다닙니다. '주님 제가 바꿀 수 있는 일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게 하시며, 이 둘의 차이점을 아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버의 이 말은 책갈피에 적어.. 2007. 8. 16.
제35회 천마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창문은 열고 싶다 「영대신문 - 2007. 08.02.」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새벽 거리를 저미는 저 별녹아 마음에 스미다가파르륵 떨리면나는 이미 감옥을 한 채 삼켰구나유일한 문밖인 저 별      - 장석남“즐거운 아침이 되고 계십니까? 아침 바람이 상쾌하군요…”흔들리는 버스에 아나운서의 말이 또록또록 하게 울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버스의 진동음 속에서도 선명하게 승객들을 향해 제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는 막 주유소 사거리를 우회전했고 예술회관 거리를 달렸다. 차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 잠들기가 일쑤라 오프닝 멘트 외에는 그다지 들어 기억나는 내용이 없는 프로였다. 하지만 제목만은 그럴 듯 했다.“무지개를 타고 오는 아침”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싱그러운 목소리는 여전.. 2007. 8. 8.
사평역-창작과비평사/임철우, 이창동 외 사평역, 아버지의 땅 외 - 임철우, 이창동 외 / 창작과비평사 2019. 05. 04. 사평역沙平驛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시 십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 2007. 8. 6.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 만남을 위하여 ·「유안진 -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머리말 만남을 위하여 길 가다가 문득 경쾌한 걸음걸이, 티없는 웃음이 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뒤 귀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웃음소리도 듣고 싶어집니다. 한가로이 거니는 여유 있는 뒷모습, 땀방울이 송송 돋은 이마도 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길 가다가 문득 정갈한 찻집에 들러 담백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쌉쌀한 커피 맛, 향그런 홍차, 은은한 녹차, 때로는 매콤한 칵테일도 맛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길 가다가 문득 옛 민속품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선인들의 손때가 절어든 다식판, 사기 호롱, 자물쇠나 벼룻집도, 길 가다가 문득 인형가게, 장난감 가게, 화랑의 그림도 구경하고 싶어지고, 벤치에 그냥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구경도 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 2007. 8. 4.
여명-벙어리 삼룡(나도향) 「여명 - 1925. 07 (단편소설)」 1 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 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연화봉(蓮花峰)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려다보면은 오정포(午正砲)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아니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 갔었다. 여기에 그중 큰 과목밭을 갖고 그중 여유 있는 생활을 하여.. 2007. 7. 30.
친정엄마 - 우리 엄마가 사는 이유 · 「고혜정 - 친정엄마」 여는 글 '아들네 집에 가서는 앉아서 밥상을 받고 딸네 집에 가서는 손수 밥상을 차려 딸 앞에 대령한다'라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딸네 집에 놀러 와서도 이불빨래며, 대청소에 쉴 새 없이 바쁜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식탁의자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주방 싱크대 앞에서 물 말아 밥 한술 후루룩 드시고 다시 걸레를 드십니다. 친정엄마 눈에는 늘 애기 같던 딸이 시집가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이 항상 안쓰럽기만 하답니다. 이렇게 떠나 보낼 딸, 품 안에 있을 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답니다. 첫아이를 낳던 날,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 엄마도 나 낳을 때 이렇게 고생하셨겠구나!' 그리고 애를 키우면서 조금씩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어 혼자.. 2007. 7. 22.
문학과 지성-他人의 房/최인호 「최인호 - 타인(他人)의 방(房)」 [190701-183958]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 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 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 오던 담배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 버렸다. 그는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맞아주기를.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남은 담배에.. 2007. 7. 17.
톨스토이 단편선 2 - 일리야스 · 「L.N. 톨스토이 - 톨스토이 단편선 2」 일리야스 우파현 縣에 일리야스라는 한 바슈키르 인이 살고 있었다. 일리야스는 아버지에게서 큰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가 장가를 들고 나서 딱 일 년째 되던 해에 죽어버렸다. 그때 일리야스의 재산이라고 암말 일곱 마리, 암소 두 마리, 양 스무 마리뿐이었다. 그러나 일리야스는 깐깐한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 살림을 늘려 나갔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고, 아침에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부유해졌다. 일리야스는 서른다섯 애 동안을 일 속에서 지냈으며 마침내 큰 재산을 만들었다. 일리야스는 말 이백 마리, 소 백오십 마리, 양 천오백 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머슴들이 일리야.. 2007. 7. 13.
톨스토이 단편선 2 - 세 가지 물음 · 「L.N. 톨스토이 - 톨스토이 단편선 2」 세 가지 물음 언젠가 황제는 한 번 이런 것을 생각했다...., 만일 자기가 언제나 모든 일을 언제 시작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때를 안다면, 또 어떤 사람들과 일을 하여야 하고 어떤 사람들과는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언제나 모든 일 가운데서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지를 안다면, 무슨 일에 있어서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황제는 자기의 나라에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언제가 가장 좋을 때인가, 어떤 사람들이 가장 필요한가, 어떻게 해야 그러한 일을 그르치지 않는가, 모든 일 가운데서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자에게는 크게 포상 하겠노라고 방을 붙였다. 그러자 .. 2007. 7. 11.
알베르 카뮈 -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 결혼·여름」 티파사에서의 결혼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 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 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벌써 바닷가로 가슴을 열고.. 2007. 6. 21.
보시니 참 좋았다 - 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보시니 참 좋았다 성수, 성미 남매는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하룻밤을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고 돌아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얼마 안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 살고 계십니다. 아빠하고 엄마는 할아버지가 혼자 사시는 것 때문에 늘 마음 편치 않아 합니다. 아마 남들이 불효자라고 할까봐 겁이 나나 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저희 마음 편하자고 늙은 아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효라고 하시며 막무가내 혼자 사시기를 고집하십니다. 할아버지가 사시는 마을에는 정든 이웃도 있고, 또 돌아가신 할머니하고 같이 가꾸던 채마밭도 있고 기르는 개와 고양이, 닭하고 오리도 있습니다. 한번은 성수가 할아버지께 이렇게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리보다 복돌이,.. 2007. 6. 19.
문학사상-겨울 나들이(박완서) (단편소설) 박완서 - 「겨울 나들이」 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아하기 전에, 이 온천물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고작 이런 주접스러운 생각부터 했다. 2류여관 특실의 평범한 타일 욕조에 달린 냉수· 온수 두 개의 수도꼭지와 샤워는 여느 허름한 목욕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더운물이 수도물 데운 게 아니고 땅에서 솟은 진짜 온천물이란 증거가 어디 있냐 말이다. 꼭 온천물에 몸을 담가야 할 만한 특별한 지병(持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대로의 온천물의 효험 따위를 믿어온 바도 없거늘 나는 그런 트집이라도 잡아 나를 더더욱 처량하게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재미있으려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어긋난 데서 시작된 여.. 2007. 6. 19.
보시니 참 좋았다 - 찌랍디다 ·「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찌랍디다 어린이가 자라서 자신의 책임을 질 만한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이란 남남이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제 몸같이 사랑하며 함께 사는 일이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 책임을 진다는 건 책임을 나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남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나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옛날 옛적 우리나라엔 여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된 색시를, 스스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기는 커녕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도 아직 먼 어린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나쁜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풍습은 남자의 집에는 매우 유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손이 부족한 집에서 열한 살.. 2007. 6. 11.
문예중앙-우리들의 祖父님/현길언 「문예중앙 (1982년 가을호)」 1 할아버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엊저녁부터였다. 여든 다섯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무엇을 하면서 지냈다. 집 주위 자잘한 일들을 손보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들이나 밭에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이긴 하나 할아버지까지 일해야 할 처지는 아닌데도 늘 그렇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지냈다. 닷새 전에는 손자인 나를 데리고 마을 안을 한 바퀴 돌면서 가을 곡식과 감귤 밭들을 돌아보고 오더니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집안에서는 노인이 무리를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다가, 이틀을 넘기면서부터는 나이도 나이어서 세상을 뜰 때가 가까웠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래도 읍내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경운기까지 준비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끝내 듣질 않았다. 그뿐이 아니.. 2007. 6. 3.
이청준-눈길/1 - 2 「이청준 전집 13 - 눈길」 1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본다. “내일 아침 올라가다니. 이참에도 또 그렇게 쉽게?” 노인은 결국 숟가락을 상위로 내려놓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친걸음이었다.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될 바엔 말이 나온 김에 매듭을 분명히 지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 내일 아침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 온 학생 팔자도 아닌데, 남들 일할 때 저라고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나요. 급하게 맡아 놓은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요.” “그래도 한 며칠 쉬어 가지 않고… 난 해필 이런 더운 때를 골라 왔길래 이참에.. 2007. 5. 17.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 소녀와 늑대 · 「유리 나기빈, 외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소녀와 늑대 에이빈트 욘손 저녁 어스름이 사라지자, 하늘에는 별빛을 희미하게 하는 엷은 흰 구름만 남았다. 구름 사이로 별들이 빛을 내쏜다. 이렇게 별들이 빛을 내쏘는 것은 그들 자신 너무도 작고 어두운 것이 두려워 짐짓 용기를 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물론 나는 어두운 것쯤은 두렵지 않다. 힐데와 나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꼬마지만, 그래도 힐데에게는 삼촌이 된다. 힐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녀다. 이건 내가 힐데의 삼촌이라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른 소녀의 삼촌이 된다고 해도, 그러니까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이나 소련 소녀, 아니면 흑인이나 에스키모 소녀의 삼촌이 된다고 해도 세상에서 힐데가 가장 예쁜 소녀라는.. 2007. 5. 16.
유리 나기빈-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두 노인(알퐁스 도데) (단행본)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내게 온 편진가요, 아장 영감님?" "네....., 파리에서 왔군요." 사람 좋은 아장 영감은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아침 일찍 장 자크 가에서 날아와 내 책상을 놀라게 한 이 편지가 오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내 생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다음은 그 편지 내용이다. - 자네에게 부탁이 한 가지 있네. 하루쯤 예정으로 풍차 방앗간을 닫고 에이기예르로 가주지 않으려나? 에이기예르는 자네 있는 곳에서 3~4리쯤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니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면 될 걸세. 거기 도착하면 고아원을 찾게. 그 고아원 바로 옆에 나지막한 지붕, 회색 문에 작은 뒤뜰이 있는 집이 있네... 2007. 5. 8.
· 현대문학-박경리/불신 시대 「(단편 소설) 박경리 - 불신 시대」 [200520-154254] 9·28 수복 전야에 진영(塵纓)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 도로(京仁 道路)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臨終)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년 병은 물 한 모금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行人)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년에게 주었더니 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숨이 지더라는 것이다. 남편은 마치 자신의 죽음의 예고처럼 그런 이야기를 한 수 시간 후에 폭사하고 만 것이다. 남편을 잃은 .. 2007. 5. 1.
대한사이버문학 - 고독한 합창 · 「대한사이버문학 2005. 05.」 (1) “아, 왜 이렇게 지랄을 한댜아~~ 어련히 알아서 줄까 봐 그랴? 에구! 쯔쯔쯧...” 음폭이 고르지 못한 옥천댁의 탁한 음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구정물 속으로 흡수되고, 밖은 이유없이 질러대는 돼지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다스려지지 않는 돼지의 본능은 끼니때마다 온 집안을 뒤흔들었고 옥천댁의 입힘도 나날이 좋아져갔다. 그 실랑이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나는 코끝을 맴도는 싸한 바람을 피해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덮고 잠에서 깨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옥천댁은 평소대로 돼지와의 소란스런 대화를 끝냈고 난 모자란 잠을 채우려 여전히 이불 속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일 계속된 야근 때문이었다. 벽지 생산량이 주문량에 못 미쳤다. 생산 방법이 후진한 탓이.. 2007. 4. 28.
· 정채봉. 류시화-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터는 어머니입니다. 「정채봉. 류시화-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210404-151016]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터는 어머니입니다. 먼저 내 방을 설명드리지요. 서울 젊은이들이 파도처럼 들고나는 4호선 지하철의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오면 4층 빨간 벽돌 건물(담쟁이가 유명한)이 있습니다. 1층에 사람들이 훨훨 지나다니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는 작은 돌마당이 있는 이 건물이 샘터 집인데, 내 작은 방은 3층의 남쪽과 서쪽 2면이 유리창인 두 평 남짓한 공간입니다. 남쪽 창으로는 대학로 큰길이, 그리고 서쪽 창으로는 여든 살 정도를 넘은 은행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는 골목갈이 훤히 내다보입니다. 큰길에는 자동차들이 줄지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골목길로는 젊은이들이 강물처럼 흘러다니는 것을 볼 수.. 2007.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