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난감해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아 거절했지만, 시간을 두고 꼼꼼이 생각해보니 20대와 30대 초반에 읽은 토마스 쿤, 미셀 푸코,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쿤과 푸코는 내 학문적 탐구에 더 많은 영향을 준 반면, 마르크스는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한 몫을 했다.
사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숨쉬기 위한 공기처럼 우리주변에 산재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비과학적인 닫힌 체계라고 비판했던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도
'현대의 모든 사상가는 비록 이를 느끼지 못할지라도, 마르크스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젊은 시절 나는 마르크스를 읽으며 무엇을 발견했던가?
첫번째는 유토피아의 비전이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래 유토피아를 표현한 수많은 비전(vision)중에 마르크스의 이상향,
즉
'아침에 사냥하고,
낮에 물고기를 잡고,
저녁에 가축을 돌보고,
저녁밥을 먹고는 문학에 대한 비평을 쓸 수 있는' 사회만큼 사람둘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이 있을까?
내가 마르크스에서 발견한 두번째 교훈은 경제의 중요성이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물질적 토대와 정신적 상부 구조로 나누고,
물질적 토대가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놀랍도록 과감한 주장을 폈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토대를 구성하는 생산력 발전의 중요성,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한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모순,
사회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높은 수준의 생산력,
결핍을 극복하는 것은 나아가 생산성을 높여 풍요로와질 때 노동의 결과를 둘러 싼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등,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경제활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세번째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봉건 제도를 산산이 부순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힘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미덕', '사랑', '지식', '양심' 과 같이 상품화될 수 없고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마구잡이로 상품화한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것들은
'소통되었지 교환되지 않았고,
줄 수는 있었어도 팔지는 않았으며,
획득할 수는 있었어도 사지는 않았던' 것들인데,
그는 이런 것들까지 사고 팔게 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타락'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네 번째로, 나는 실천가로서의 마르크스에 감명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담론적 실천만이 아니라 직접 변혁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을 변혁시키는 대열에 동참했다.
그의 실천은 20대에 시작해서
1864년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적 조직체인 제 1 인터내셔널을 탄생시키는 데까지 이어졌다.
나는 마르크스식의 사회변혁이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 의식과 삶은 아직도,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는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끌어안고 있다.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 되지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얘기다.
다섯번째로, 나는 마르크스에게서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세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력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150 년 전에 씌어진 <공산당선언>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예전에 확립되었던 국가의 산업은 이미 망했거나 지금 망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들은 지금 국가의 흉망이 걸려있는 새로운 산업에 의해 대체되는데,
이 새로운 산업은 더 이상 자국내의 원료를 가지고 일하지 않으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원료를 가지고 와서 작동한다.
이 산업의 생산품은 일국 내에서만 소비되지 않으며 지구의 모든 곳에서 사용된다.
자국 내의 생산에 의해 만족되는 예전의 필요를 대신해서 지금 우리는 멀리 떨어진곳의 생산에 의해 만족되는 필요를 가지고 있다.
오래된 국지적인, 민족적인 고립과 자족을 대체해서 우리는 지금 모든 방향으로의 소통,
국가들간의 보편적인 상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읽다보면,
자본주의 경제의 국제화를 이렇게 뚜렷하게 서술한 19세기의 문헌이 또 있을까 궁금할 정도이다.
내가 발견한 마지막 교훈은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것이다.
'생산에 대한 지속적인 혁명,
모든 사회 조건에 대한 불변하는 진동, 지속적인 불확실성과 동요는 이 부르조아 시기를 다른 시기와 구분 짓는다.
모든 오래된 관계와 여기 동반되는 편견과 의견이 사라져가고, 새로운 관계들도 그것이 공고화되기 전에 이미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다.
모든 공고한 것은 공기중으로 녹아 없어지고, 모든 신성한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 되며,
사람은 드디어 맨정신으로 그의 진정한 생의 조건과 그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직면하게 되었다.'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정수를 파악한 글을 찾기는 힘들다.
모든 전통적인 가치를 녹여내는 시장, 사회의 구성원이 안정된 직장과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 가치마저도 녹여버리는 자본주의.
오래된 관계를 붕괴시키지만, 안정된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불확실성과 동요' 만을 생산해내는 지금의 세상.
왕년의 운동권 노래 '사계'가 댄스 뮤직으로 둔갑을 하고, 체 게바라의 티셔츠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며,
<자본론>이 공항 서점에 펭귄북으로 꽂혀있는, 급진적이었던 혁명 사상마저 전통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녹여버리고, 상업화시키는 이 괴물 같은 근대성!
지금 21 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사상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상품화시키고, 있는자와 없는자,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격을 한없이 넓히는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제동 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p111)
※ 이 글은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홍성욱 -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안그라픽스 - 2003. 0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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