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연살구빛, 소매가 없는 수수한 파티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대리석 조각이 장식된 테라스 난간에 서 있다.
뒷모습으로 선 여자의 시선 너머로는 북국의 흰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시선이 닿는 먼 끝도 숲이었다.
숲의 끝은 수평선처럼 넓고 곧았다.
우리나라의 작은 숲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위엄이 넓은 어깨를 쭈욱 펴고 펼쳐져 있는 듯 했다.
태양이 자작나무처럼 희고 길쭉한 그 여자의 팔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여자는 지금 1989 년의 모스끄바에 서 있다.
그때까지는 쏘비에뜨 연방이었던 그 나라의 수도,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찌의 물결이 아직 파도치던 그곳,
넓은 이마에 지도처럼 긴 반점이 박힌 대통령이 있던 나라에서 여자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유학생이었다.
무엇인가 기척을 느낀 듯
여자의 어깨가 조금 굳어지는 것이 보이고 이윽고 망설이는 듯한 여자의 머리가 이쪽을 향해 돌아선다.
목덜미가 파진 여자의 드레스 앞쪽에 달린 자줏빛 코사지도 여자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이윽고 여자의 입술이 마치 고통을 참는 듯이 얇게 뒤틀린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그 여자의 커다란 눈쪽이다.
제정 러시아 시절 한 귀족의 별장으로 지어졌고, 이제는 고급 장교들의 휴양지로 쓰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오렌지색 웨딩케익 모양의 건물 테라스에서
운명처럼 다가서는 남자를 환희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시나리오에 의하면 이 여자는 이제 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귀국해서는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장면은 그 여자의 고난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는 한 길목이 되는 셈이다.
여자는 지금 행복을 향해서 천천히,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사람이 갑작스런 행복에 마주설 때처럼 정말일까 하는 마음에 겁먹어서,
그토록 열망했으나
평생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체념했던 그 행복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여자가 얇게 입술을 뒤틀며 이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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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엇, / 여자의 연기에 몰두해서였을까,
남편은 여자의 감정을 다치지 않으려는 듯 낮은 소리로 컷을 불렀고,
조용히 돌아가고 있던 아리플렉스 4 카메라도 소리를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여자와 카메라의 뒤쪽에 초승달처럼 진을 치고 있던 스텝들의 입술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오우케이, 좋아요.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입니다. / 남편의 입술이 둥글게 모아지자
이번에는 둘러선 스텝들 사이에서 더 큰 환성이 퍼져나왔다.
자아 이제 한국 식당으로 갑시다.
이번에는 한국관이에요.
빨리빨리들 정리합시다.
오늘 메뉴는 일인분에 만이천원이나 하는 비싼 김치찌개라구요.
제작부의 말이 떨어지자 촬영부와 조명부 그리고 연출부를 포함한 스텝들의 얼굴에는
벌써 김치찌개의 시원하고 매콤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여배우는 피곤하다는 듯 들고 있던 백을 테라스에 놓인 탁자에 휘익 내던졌다.
미용과 의상 담당이 여배우에게로 달려가 그녀가 휘익 던져버린 백을 집어 들고는
그녀의 머리와 의상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테라스 한쪽 모서리 끝에서 모자도 없이, 1995 년 8월의 땡볕을 받고 서 있던 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촬영감독과 말을 나누고 난 후, 여배우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것이리라.
그리고 곧 남편의 등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스텝들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짐을 나르는 스텝들에게 이리저리 몸을 피해주다가
아까 여배우가 서 있던 테라스 난간 곁으로 다가갔다.
한밤중이 되어야만 질 생각을 하는 태양 때문에 따뜻해진 대리석의 온기가
가만히 내 벗은 팔뚝으로 전해져왔다.
나는 아까 그 여배우처럼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작나무숲은 끝이 없었다.
대평원이었다.
이 나라가 사실은 아주 큰 대륙의 일부라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포 면세점에서 산 디스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래 나는 줄창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후 삼일 동안 거리에서고 촬영장에서고간에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삼일 만에 담배 한 보루를 없앨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 담배 하나 피워볼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내 곁으로 다가섰다.
우리의 통역을 맡아주고 있는 안이었다.
이곳에서 러시아문학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 도착한 이래 나의 소설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수줍은 얼굴로 내게 고백한 그에게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 가운데 하나를 내밀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버릇처럼 한 번 올리고 나서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그와 내 입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말없이 서서 출렁거리는 모스끄바의 흰 자작나무 숲, 바다 같은 숲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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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의 전화는 이른 아침에 걸려왔다.
어젯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녁도 거른 빈 속에 보드까를 마셔댄 탓인지
나는 밤새 토했고 아침에는 거의 탈진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여기까지 우겨서 쫓아오더니 참 꼴 좋군. / 남편이 아침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나를 깨우다 말고
티셔츠를 갈아입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줄 수 없어? / 나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청색 티셔츠에 팔을 끼우다 말고 남편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다 보았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놀란 빛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도 어색해져버렸다.
나는 침대 시트를 벌컥 들쳐버리고 일어나 앉았다.
굳어진 그의 얼굴 때문에 갑자기 아니야,
소리를 버럭 지른 건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든지,
빅또르 박한테 부탁해서 따로 관광이나 쇼핑을 하든지 그도 아니면 촬영장에 따라가자.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남편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요즘 와서 이상하게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을 하거나 화를 벌컥 내거나 그도 아니면 가끔 말을 더듬었다.
촬영장에 따라가겠어.
모스끄바에 와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는 호텔에만 있다가 갈 수는 없잖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해도 사실 내가 얼마나 영어로 말을 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언젠가는 한 여자 스텝이 복도에서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자기 방 화장대 위에 놓아둔 루불이 없어졌는데
그걸 어디 가서 알아보면 좋겠는지 청소부 여자에게 물어봐 달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 여자의 방 화장대 위에 놓아둔 루불화가 없어졌는데
그걸 어디 가서 알아보면 되느냐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 청소부 앞에서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여자 스텝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영문과 나오셨잖아요? / 그녀가 물었다.
영문과 나왔죠. / 영문도 모르고 여자 스텝은 내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다가 대답했다.
하기는 영문과 나온 사람도 모르는 영어를 이 여잔들 알겠어요? 제 실수죠 뭐.
그런데 인터걸들 영어 잘해요.
어젯밤에 내가 남자 스텝 방에 놀러갔을 때 전화가 걸려왔는데 영어를 그렇게 잘하더래요.
섹스 앤드 마사지 베리 웰 오케이? 아이 엠 베리 프리티 걸.
영어를 못하는 우리는 인터걸의 기발한 영어를 들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는 것처럼
남편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때였다.
대번에 나는 그것이 C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C 니? / 이상한 일이었다.
목소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조금씩 나이에 침식당해 있었다.
여자들은 눈가를 남자들은 머리와 배를. 하지만 그게 누구든 전화를 걸어오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너 꽤 섭섭했었나 보더라.
우리 마누라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니가 울까 봐 겁이 났다고 하더라.
그랬다.
예전의 C였다.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큰소리도 잘 치고 때로는 악의 없는 거짓말로 우리를 골탕먹이던 그.
나는 스물 몇 살의 명랑한 처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번죽을 언제나 맞추어준 것은 나였으니까.
우리는 말하자면 손발이 잘 맞는 부질없는 말장난 콤비였다.
그래 하루종일 네 전화 기다리느라고 호텔에서 통곡했어.
모스끄바가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 예전처럼 그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먹지 않은 예전의 그 웃음소리였다.
저녁에 술 한잔 해야지.
내 말 잘 들어봐.
우선 누구한테 부탁해서 차를 잡아달라고 해.
거기 현지 스텝 있지?
응.
화이떼베찌바 호텔로 가자면 모르는 운전사가 없을 거야.
거기 커피숍에서 일곱 시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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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타세요.
다음 장소로 이동입니다. /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리의 뒤쪽에서 스텝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대절해 놓은 벤츠버스를 향해 걸었다.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남편은 촬영감독과 나란히 앉아서 콘티를 펴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보자 다른 자리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안과 나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러시아 운전사가 틀어 놓은 알 수 없는 러시아 노래가 차 안에서 나직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머뭇머뭇 안이 무슨 말인가 꺼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창 밖으로만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겸연쩍게 씨익 웃었다.
나는 사실 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략 알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였든가 우리 스텝들 중의 하나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는 러시아에 유학온 지 5년,
아이가 하나 있는 연상의 러시아 여자를 알게 되고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의 유학생활을 살펴보러 한국에서 날아온 부모는 아들의 이상한 동거를 알게 된다.
짐을 풀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채로 앉은 부모에게 안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으리라.
아마도 그는 다만 정직하게, 언어 없이 이 모든 상황을 대면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순수한 백러시아 혈통을 가진 9살 난 제 딸을 데려와
인사시키는 금발의 이혼녀 앞에서 부모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고 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삼십 분간의 침묵이 계속되고 나서 그들의 부모는 모든 관광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갔다고 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이것이 그의 부모가 러시아에 와서 며느리와 한 대화의 전부였다.
저 저기요. / 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방금 촬영을 끝낸 곳의 지명이 뭔지 알아요? / 예상과는 달리 뜻밖의 질문이었다.
글쎄요.
아르한겔스끄예요.
천사의 땅이라는 뜻이죠 참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내 눈앞으로 아까 테라스에서 바라본 자작나무의 흰 숲이 스쳐지나갔다.
흰 자작나무숲과 천사의 날개.
그런데 이 천사의 땅엔 새가 없네요.
그는 입에 가득 물었던 담배의 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새가 없어요.
그걸 발견하셨군요.
처음에 이곳에 와서 모스끄바 숲을 바라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거였어요.
너무 추워서 그런가요?
글쎄요,
그거야 새들한테 물어봐야죠.
그런데 왜 이즈음엔 소설 안 쓰세요?
두번째 촬영지인 모스끄바 대학 앞에서 촬영이 준비될 즈음 시간은 여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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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는 이제 6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한국에 돌아간 후 남편이 죽고 그녀는 남편과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이곳에 오는 것이다.
분장팀들은 해사한 그녀의 눈가에
진한 갈색 아이섀도를 칠하고 분홍빛 입술을 칙칙한 자줏빛으로 누르고 있었다.
저렇게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마치 영화를 찍듯이 스무 살도 되었다가 서른 살로 되었다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나이로 가고 싶을까.
분장팀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시간을 뛰어 넘어가고 있는 배우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디로 나는 가고 싶을까?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사진첩들을 열심히 펼쳐보았다.
유년 시절,
얇은 스타킹 때문에 늘 발이 시려웠던 여학생시절.
그리고 대학,
결혼과 출산들,
그러나 대답은 없다, 였다.
내 살아온 서른세 해 동안 돌아가고 싶은 그런 시절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에게 어떤 나쁜 기억의 섬광이 잠깐 비췄던 것처럼
나는 순간적으로 아찔해졌다.
나,
가봐야겠어.
가긴 어딜? / 콘티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편이 촬영장에서 예의 그랬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잖아,
일곱 시에 화이떼베찌바 호텔로 간다구?
화이 뭐?
아이 왜 그래?
C를 만나기로 했다구.
아침에 전화하고 약속하는 거 당신도 들어 놓고선. / 남편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발치에 버리고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택시가 없잖아.
그는 그것이 짜증이 나는 이유의 전부라는 듯 잘라 말했다.
아침에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을 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지금은 안이 차를 잡아줄 거구,
그 다음엔 C가 차를 잡아줄 거라구.
마피아가 데리구 가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
여긴 전화도 없구 촬영하는데 여기까지 쫓아와서 계속 날 신경쓰게 만들어야 되겠어?
남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에서 촬영을 준비하던 스텝들이 쭈르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간다는 거야.
당신 신경 안 쓰이게 나는 실밥 같은 기분이었단 말이야,
알아? / 남편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바라다 보았다.
아무튼 나는 갈 거야.
예쁜 러시아 여자들 두고 나 같은 아줌마 데려다 양파 까게 할, 눈 나쁜 마피아가 어딨어?
나는 백을 고쳐 메고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감독과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안이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미안해요. / 일행과 멀어지고 난 후, 내가 잠시 멈추어 선 자세로 안에게 말했다.
뭐가요? / 안은 순하게 웃으면서 발끝을 보도블록에 톡톡 두드렸다.
부부싸움 어느 나라 말로 해요? / 내가 묻자 안은 웃는 얼굴로 천천히 거두었다.
부부싸움 안 해봤어요.
우리 집사람 가여워서 싸움 못해요.
내가 방에서 큰소리로 혼자 한국 노래 부르고 있으면 우리 집사람 내가 화난 줄 알죠.
나는 갑자기, 안이 가여워하는 그의 아내처럼 안이 가여워졌다.
화가 났는데,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가 가여워서,
화가 났는데도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의 모습
문밖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나라 노래를 들으며 가스레인지에 러시아식 스튜를 데우는 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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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존경하는 노작가의 집으로 찾아갔던 생각이 났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어둑어둑한 그의 현관을 나섰을 때,
그녀가 밥을 주어 먹인다는 들고양이들이 마악 산에서 내려오고 있던 참이었다.
낯선 방문객을 발견한 고양이들은 등을 곧추세우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쁜아
이쁜아 이리 오렴! / 노작가는 고양이들에게 소리쳤지만 고양이들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얼핏 멀리서 내 눈이 그 중의 한 고양이 눈과 마주쳤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 적의가 없단다,
이리 와서 선생님이 주시는 저녁을 먹으렴, 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들을 부를 이름이 없었다.
내가 설사,
이쁜아, 이리 오렴,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노작가가 부르는 그 이름과는 다른 것일 테니까.
신호등이 바뀌고 차들이 우리 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안이 손을 들었고 낡은 일제 토요따 차가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안이 흥정을 했고 내가 알록달록한 러시아 루블을 지불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저녁에도 결국 C를 만나지 못했다.
운전자는 안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고
화이떼베찌바 호텔이 아닌 곳에서 밤늦도록 C를 기다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스끄바에는 산이 없다.
하지만 하나의 언덕이 있다.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단편소설집. 007 단락)
창작과비평사 - 1999. 07. 01.
'내가만난글 > 단편글(수필.단편.공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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