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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구멍

by 탄천사랑 2007. 10. 5.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 구멍(장혜련)」



 

구멍

오늘 또 한 개의 구멍을 뚫는다.

살갗을 파고드는 금속성의 차가움.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텅스텐 조각은 눈썹 위에서 반짝인다. 언제나 이곳에 달고 싶었다. 드디어 뚫었다는 희열감에 녀석의 이름까지 날려 버린다.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지만 이 정도 위치쯤에는 뚫어 줘야지. 눈썹 위에 작은 구멍만을 남긴 채 H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얼음을 띄우고 소금을 조금 뿌린 코카콜라를 단 숨에 들이킨다. 언젠가 녀석을 만나면 웃으면서 콜라 한 잔쯤 같이 마실 수 있으리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액체 속에 묻어 비릿한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른 갈증이 혓바닥에 달라붙는다. 얼음 알갱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J에게 고맙다는 윙크를 해준다. J는 내 몸의 구멍을 대부분 뚫어 주었다. 일본에서 옷 만드는 걸 배웠다는 그는 드럭 한 구석에서 표 받는 일을 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피어셔 일도 하는데 사실 어느 게 그의 진짜 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J에게 구멍 뚫는 기구 따위는 필요가 없다. 피어싱 끝을 갈아 손으로, 그냥 압정 꽂듯이 푹푹 몸 어느 곳이던 피 한 방울 나지 않게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살갗을 이완시키는 그의 손놀림은 부드럽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일본에서 직접 가지고 온 특이한 모양의 각종 귀걸이 때문이다.

오늘 나는 별 모양의 바벨을 꽂았다. 남들이 다 하는 둥근 바벨은 성미에 안 맞는다. 눈썹 위에서 반짝이는 별. 지구로부터 수억 년 떨어져 있는 혹성 49라는 외계 별. 계단 밑의 지하에서는 기타줄 위로 K의 손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곧이어 드럼이 바닥을 기어가며 기타를 뒤쫓는다. 40초가 넘는 전주는 광폭하게 외계별을 선회하며 끊임없이 송신전파를 내보내고 있다. 뇌파를 타고 흐르는 전자기타와 드럼의 울림. 크래쉬 심벌을 치고 있는 호두나무 스틱과 86년 산 깁슨 줄을 퉁기는 분홍색 피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여섯 개의 구멍이 뚫린 내 왼쪽 귀는 예민해진다. 귓바퀴의 연골을 타고 둥 둥 흘러 들어오는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바짝 세운다. 내 귀는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살아 움직인다. 그러니까 신경 하나하나가 귀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높은 청음력을 갖게 된 것이다. 까맣고 작은 구멍 안으로 수많은 소리들이 쏟아지지만 어떤 것이 진짜 음악인지는 달팽이관에 걸려 달그락거리는 것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들린다. K의 속삭이는 듯한 인트로 부분이 시작되고 있다. ‘혹성 49’의 나머지 멤버들은 숨을 죽이며 K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좁은 계단을 내려간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은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구멍처럼 느껴진다. 문을 열자 음들의 폭포수가 이마를 강하게 내리친다. 60명 가량의 인간들이 쿵 쿵 쿵 시멘트 바닥을 구르며 머리를 흔들고 있다. 이내 그들 틈에 섞여 몸을 부딪친다. 땀과 물에 젖은 머리카락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물결을 만든다. 실내의 온도는 40도를 육박할 것 같다. 몸보다 더 뜨거운 열기. 땀이 몸에서 솟구친다. 이것이 언제나 내가 바라던 자유다. 몸에서 땀이 저절로 솟구치는 것. 세포 하나하나가 음들의 경련에 맞춰 흔들리는.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샘솟듯 치솟는 갈증. 세상이여 다 녹아버려라. 비트를 탄 몸은 혹성 49의 외각을 선회하며 엔진을 예열시킨다. 지층을 지나 맨틀 층 아래로 단 한 번에 구멍을 뚫어야 하리. 이글거리는 맨틀에 뼈를 녹이며 그 때 잠깐 생각해 볼 것이다. 나의 구멍은 왜 언제나 남자만을 원했던 것인가.

H를 처음 본 것도 드럭(1)에서였고 마지막 본 것도 드럭에서였다.

H는 ‘책상 모서리’(2)가 마지막 허밍 부분을 웅얼거릴 때 슬그머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곤 “숨을 쉬어”라고 갈라진 음성으로 소리쳤다. 침까지 내 얼굴에 튀어가며. 목소리는 기이하게도 둔탁한 반향을 일으키며 갈라지고 있었는데 음…, 그건 마치 양은 냄비 뚜껑이 같은 양은 냄비 뚜껑에 부딪치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였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당연히 알아듣지 못해 한 2, 3초 가량 녀석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내 꼴이 심한가 보군. 땀을 많이 흘리긴 했지. 스타우트를 들이키며 녀석은 다짜고짜 묻는다. “너, 비틀스 알지? 넌 존이 좋으냐? 폴이 좋니?” 웃기는 녀석이군. “링고가 좋은데.” 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손에 든 맥주병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그래?” 녀석이 갑자기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다. 난 ‘재커랜더’(3)에서 드럼을 치고 있어.” 아하, 이건 또 뭐야? 비틀즈 광신도나 사교 집단쯤 되나. 그러고 보니 어딘가 리버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골이 촘촘한 황색 코르덴바지에 까만색 남방, 프라다 신발. 으흠, 이 정도면 완벽한 홍대 스타일이다. 나는 심드렁하게 “그래, 몇 시 비행기로 왔니? 아니 몇 시 비행기로 떠날 거야? 연주가 몇 시인데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라고 비아냥거렸다. 녀석은 덥수룩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 밴드 이름이야.” “재커랜더라는 밴드이름은 영국에만 해도 수백 개는 될 텐데.” 녀석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아니, 여기서는 우리뿐이야.” 얼음이 다 녹아버려 물 반이 돼 버린 코카콜라를 내려다보며 난 녀석과 하룻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재커랜더’는 비틀즈를 펑크로 변환시킨 이질 잡종의 알 수 없는 소음들을 두들겨 댈 뿐이었다. 드럼과 베이스는 서로 맞지 않았고 보컬은 머리 스타일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헤로인으로 찌든 무표정한 히피 풍의 비틀스를 완벽하게 모방하고 있었지만 음악은 기가 막힐 정도로 형편없었다. 다들 음악으로 성공하기는 아예 가망조차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런데도 왜 밴드를 꾸려 가는가. 간단했다. 그들에게도 자유가 절실했던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지긋지긋한 가족, 끔찍이 사랑하는 가족, 지루한 일상, 목을 부여잡고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들 중에 누가 아르바이트 비슷한 것을 했던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무슨 대기업 간부의 막내아들이라도 끼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계를 걱정해야 될 만큼 어려운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단순히 우리 모두는 누구의 아들과 딸일 뿐 그 누구인가가 무엇을 하는지는 서로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녀석, H의 부모는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보따리장수였다. 자국의 이익을 적당한 값에 팔아넘기거나 싸게 처분하는 외교관. 언젠가 신문 사회면에서 H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분사 프린트된 잉크 사이로 어색하게 웃던 인물. 영화배우 못지않은 사내의 얼굴 표정에서 H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H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흔히 말하는 개방된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살아온 습관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 만난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게 개방된 사고방식이라면 그는 가장 개방된 사고영역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유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긴 머리와 비싼 옷이 어느 정도 그를 커버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살펴본다면 부주의하게 뻗어 있는 눈썹이나 약간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쏠려 있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엔 부르주아 특유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은 한없이 너그러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신촌 철길 옆 삼겹살 골목에서 돼지 목살이라도 몇 근 구워 먹는 날이면 우적우적 씹어대는 H의 뒤틀린 입술 언저리로 식용유 기름처럼 돼지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링고 스타의 투명한 콧수염처럼 보이곤 했다.

‘책상 모서리’가 마지막 공연을 갖던 날 난 결심처럼 그의 침대를 쓸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H는 제법 거칠게 밀어 붙였지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내 안을 감싸주었다.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함이었다. 그날은 21세기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창밖에 둥근달이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여섯 개의 피어싱이 달린 내 왼쪽 귀를 혓바닥으로 부드럽게 핥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많이 뚫었어?”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나와 잔 남자들의 숫자야.” H의 눈동자에 웃음이 번진다. “남자뿐이었어?” 어…, 그렇군. 남자뿐이었군. 나는 조금 새침하게 “응”하고 말했다. “내 구멍은 어디다 뚫을 거지? 귀에는 더 이상 뚫지 못하겠는걸.” H는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귀걸이들이 짧은 리듬을 만들어내며 서로 부딪쳤다. “글쎄…….”

엄마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거나 유약해 보였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충혈 된 눈동자를 가진, 기름에 절은 머리카락 사이로 허연 비듬을 달고 있는, 똑같은 인상을 가진 작자들이었다.

엄마가 남자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니, 적어도 이해하는 척 할 수 있었지만 왜 그렇게 지저분한 몰골을 한 유령들을 끌어들이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둘러대곤 하는 “다, 너 하나 보고 내가 이 짓을 하지”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빵가게를 하던가 꽃가게 같은 걸 해야지 왜 술집인가. 그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그녀의 가게는 그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출입구였다. 그 출구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커다랗게 검은 아가리를 벌린 채. 그 문을 한 번쯤 들어갔다 나온 인간은 영혼을 팔아야만 했다. 그들은 영혼까지 저당 잡히고도 모자라 피까지 남긴 없이 바치곤 했다. 그녀는 그 피를 자신의 앙증맞은 발톱에 칠하기도 하고 때론 입술을 적셔가며 마시기도 했다. 커다란 진토닉 잔에 얼음까지 넣어.

그녀의 집에서 나온 것은 고3 마지막 겨울 방학 때였다. 원하던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미 그때는 내 청신경이 발달할 만큼 발달해 있어 밤이면 서로 숨을 죽이는 일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더군다나 엄마만 남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나는 처녀가 아니었기에.

열다섯 살, 폭염이 이어지던 그 해 여름 난 남자의 뭉뚝하고 굵은 손가락을 내 몸에 받아들였다. 가랑이 사이를 간지럽히는 손놀림에 쾌감을 느끼며 살짝 눈꺼풀까지 떨었던 거 같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첫 순결을 손가락에 바치다니. 삼촌의 피에 젖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나는 얼굴을 붉혔다.

삼촌이라고 불렸던 그에 대해서 난 언제나 그가 내 진짜 외삼촌인지 의심스러웠다. 삼촌이라고 부르기보다 오빠라고 불러야 하질 않을까. 그와 나는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엄마와는 20년 차이니까. 사실 엄마의 엄마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엄마를 낳고 20년 후에 그를 낳았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가게에서 술 박스를 옮겨 놓던 그. 티셔츠 아래 다부진 어깨가 꿈틀거리는 걸 본 후부터, 붉은 목덜미에 땀이 흐르고 있는 걸 본 후부터 난 그가 삼촌이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엄마의 태도도 내 확신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 박스를 나르는 삼촌의 모습이 여러 번 머물러 있었고, 귀걸이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건 일종의 신호였다. 본능적으로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의 특이한 버릇.

엄마의 눈을 본 바로 다음 날, 나의 작고 냄새 나는 방으로 삼촌을 유혹했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도 엄마의 시퍼렇게 펄을 칠한 눈두덩이 한없이 부풀어 오르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녀의 쌍꺼풀 진 눈 위로 흘러넘칠 눈물. 뜨거운 눈물. 그녀를 괴롭히고 싶었다.

내 방의 하얀 문을 가리키며 그에게 들어오라고 눈짓을 보냈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까만 피부 밑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을 뿐. 표정은 너무 약해서 마치 하드를 먹을까 콘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하는 정도의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얼굴은 팽팽하게 긴장된 살덩어리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금방이라도 말문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리기도 했다. 그는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선천성 귀머거리였다.

가슴에 그의 손을 얹고, 나는 긴장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져 주었다. 그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나는 순간 그가 숨을 멈춰버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정말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짧고 뭉뚝한 손가락에 퍼런 핏줄들이 올라왔다. 그 손은 강해 보였다. 아직까지 그의 손처럼 강한 느낌을 주는 손을 본 적이 없다. 팬티 밑으로 그의 손을 집어넣었을 때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의 팔목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아주 작은 반달모양으로 깊게 파인 손톱자국은 무슨 동물의 이빨 자국처럼 보였다.

그가 끅끅거리며 몸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소리는 내 달팽이관의 코르티기관을 자극하며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그의 바지 밑으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페니스는 더욱더 내 신경을 자극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공포 같은 것을 함께 느껴야만 했다. 엄마의 실룩이는 엉덩이가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그녀에게서 나는 묘한 향수 냄새. 그를 받아들인다면 나도 어떤 냄새가 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암컷의 냄새. 무엇보다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엄마처럼 되는 것이.

그의 손가락은 몸 세포 하나 하나를 혓바닥으로 핥는 것처럼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사실 그를 받아들이기엔 난 너무 어렸다.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좌절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굳은 표정 앞에서 난 두려움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럴 때면 난 아주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페팅을 해주곤 했다.

유난히 시끄러운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엄마의 얼굴에 남아 있던 시퍼런 멍 자국. 그건 명백한 폭력의 상처였다. 그런 날 아침이면 엄마는 더욱더 상냥한 얼굴로 현관문을 나서는 낯선 남자에게 아양을 떨곤 했다. 그리곤 일주일 내내 검은색 베르사체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아니 무언가를 자랑하듯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난 삼촌의 손놀림이 지겹게 느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봄이면 나도 어엿한 성인이고 여성이 되어야만 했다. 이제 나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더라도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대학 입학 시험이 끝난 다음 날 미술학원 친구들과 진탕 술을 마셨다. 원래 술 따위는 마시지 않는다. 일부러 혈액 안에 다량의 알코올을 집어넣지 않아도 이미 세상은 충분히 어지럽고 역겹기 때문에. 또 엄마가 흐느적거리며 게워내는 오물을 이미 충분히 내 몸에 바른 상태이므로.

그러나 그 날만큼은 술이 필요했다.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육신의 피를 바치는 마추픽추 제사장처럼 나도 약간은 몽롱한 정신이 되어야만 했다. 성공적으로 의식을 거행시키기 위해. 이미 이론은 충분히 답습한 상태였고 몇 년간의 간접 경험은 완벽한 실전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 그와 나,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나하나 차근히 공식을 적용시켜 가며 풀어야만 하는 난해한 문제 앞에서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던 같다. 아니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일까.

하여간 그 날 밤 운명은 예상 밖의 난감한 문제를 내 앞에 쏟아놓고 나를 충격의 패닉 상태로 내동댕이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날 밤 놀랬던 것인지 안도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됐건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한 감정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잊혀 가고 있는 일이지만. 그날 난 필요 이상으로 많이 취해 있었다.

그는 엄마의 술집 한 구석에 있는 아주 조그만 창고(창고 비슷한 곁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부엌과 통하는 뒤쪽 셔터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은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검은 아가리를 스르르 벌렸다. 운명의 문이여, 입을 벌려라.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붉은 내등이 켜진 좁은 바를 지나 창고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때 환하게 불이 켜진 창고 문틈 사이로 눈부신 엄마의 등이 보였다. 하얀 그녀의 피부는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허리. 삼촌의 다리 위에 올라앉아 등을 젖히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풍만한 엉덩이선.

나는 주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던 거 같다. 갑자기 술기운이 얼굴 위로 솟구쳤다. 붉고 묽은 토사물을 바 한 구석에 게워내고 나는 다시 문틈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검게 반짝이는 것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떠올랐던 것은 까만 단추 구멍이었다. 구멍에 맞는 단추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이제 그것을 꼭 맞게 잠그려는 찰나 허술하게 달려 있던 단추가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구멍은 점점 커지며 어둠 속에 내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쳐다보았다. 그것은 삼촌의 까만 눈동자였다.

난 며칠 동안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의식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본 것이 내 죄목이었다. 벌거벗은 엄마의 하얀 등, 허리, 그리고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난 처음으로 귀에 구멍을 뚫었다. 무척 아팠고 곪기까지 했다. 곪은 상처가 다 나아갈 무렵 난 엄마에게 독립하겠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엄마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학교 가까운 곳으로 자취를 정해 나오던 날 난 마지막으로 바에 찾아가 삼촌을 만났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많이 흔들렸고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난 속으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마지막 인사로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아름다운 손가락, 내 순결을 바친 손가락, 내 감각들을 세심하게 건드리던 그 손가락이 많이 그리울 것 같았다.

순간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까맣고 탁한 눈동자 위로 잠깐 스쳐간 것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따뜻한 빛이었다. 그의 옆에 서서 나에게 웃음을 던지는 엄마의 얼굴은 삼촌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난 서둘러 술집을 나왔고 폭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던 거리는 더없이 황량하게만 보였다. 굳게 닫힌 문을 뒤로한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 동안 걸었던 것일까. 난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흩어지는 눈발 속에 술집 문은 전설의 흰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 채 텅 빈 구멍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내가 처음 받아들인 남자는 누드 모델이었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남자 친구는 의외로 사귀기가 힘들었다. 학교에서 파트너를 찾는 건 이래저래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었다. 대개의 남자애들은 끝까지 가고 싶어 했지만 그런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도 못하고 입 또한 가벼운 애송이들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 해는 정신없이 춤만 추었다. 코카콜라를 홀짝이며 클럽의 구석에서 땀을 한 0.5ℓ 가량 쏟아 내고 나면 일종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학년 1학기 첫 데생 실습이 있던 날, 벌거벗은 그의 몸을 보며 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내 몸의 감각이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던 날 난 좀 실망했다. 의외로 무덤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삼촌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 감각을 건드리던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칠었다.

많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내 안에 꽉 차는 그의 몸이 따뜻하다고 생각되었을 뿐 별다른 흥분이나 쾌감은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었다. 더군다나 그의 몸은 윤기가 흐르고 단단했다. 마치 그리스 조각처럼. 난 매일 밤 공짜로 그를 스케치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 했다. 내가 지금 노래 가사를 끄적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와의 관계는 제법 오래 이어졌고 또 헤어질 땐 가슴 한 구석이 아프기까지 했다. 나는 첫 번째 구멍 위로 또 한 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은 곪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물었다.

그는 내 벌거벗은 등에 종이를 대고 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시는 대개 유치하고 형편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언젠가 서점에서 그의 출판된 시집을 보았다. 대개가 내 등에서 적혀진 시였다. 전직 누드모델의 시집. 겉표지에 붙어 있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심각해 보였고 살이 많이 쪄 있었다. 활자로 인쇄된 시는 그럭저럭 잘 읽혔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내 등위에서 쓰인 시. 이것이야말로 육체의 시가 아닌가. 나는 두 번째 구멍을 한 번 만지작거려 보았다.

그와 헤어진 후 거의 두 달 간격으로 피어싱을 새로 해 달았다. 수학강사, 지금은 해체된 ‘러브스틱‘(4) 밴드의 기타와 보컬. 그리고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내 귀에 구멍을 뚫어준 J. 많은 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다.

그러나 난 남자들과 관계를 거듭할 수록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글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아니고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H를 만나기 전 몇 달간은 다시 클럽을 순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뭐 답답하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처럼 남자를 만나면 만날 수록 욕구가 커지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엄마를 다시 찾아간 날은 그 해 들어 가장 많은 비가 퍼붓던 날이었다. 20세기가 가는 게 무진장 안타까웠는지 하늘은 연신 더러운 빗물을 회색 도시의 끄트머리에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허옇게 빗물이 튀는 우산 속에서 술집 문의 벌건 격자무늬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비에 젖은 청바지에 척척 감긴 다리가 마냥 무겁게 여겨졌고 머리마저 지끈거렸지만 문 앞까지 와서 되돌아간다는 건 어딘지 멍청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었다.

빗물을 잔뜩 먹은 문은 그 무게만큼이나 강한 저항력으로 공기를 밀어냈다. 조명이라곤 모두 꺼진 텅 빈 술집의 얼룩진 카펫에서 비릿한 비 냄새에 섞여 쾨쾨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으로 올라왔다. 끈적하고 탁한 공기가 발 밑을 감쌌다. 드문드문 벽지에 빗물이 새어든 것이 보인다. 마치 바 전체가 빗물에 녹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카운터 한구석에서 위스키를 채운 잔에 진저에일을 섞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 할로겐 전등이 그녀의 손등을 비추고 있다. 그녀는 아침에 나갔다 들어오는 딸아이를 보는 양 웃을 듯 말 듯 애매한 표정으로 한 쪽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게 전부였다. 포옹을 한다거나 유난을 떨며 재회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둘 다에게 쑥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슬쩍 들어올린 손끝에 가느다란 담배가 끼워져 있다. 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녀는 위스키 잔을 새로 꺼내 내 앞에 놓아주었다. 시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치유능력을 가진 것인가. 이렇게 엄마와 딸이 마주 앉아 위스키 잔을 기울일 수 있게 만들다니.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자세히 보니 그건 그림자가 아니라 옅은 선으로 눈가에 잔금을 그어놓고 있는 주름이었다. 아, 그녀도 늙는구나. 가슴 한 구석이 쓰릿쓰릿해지면서 입안이 말라왔다. 앞에 놓인 위스키를 단 숨에 들이키고는 구석에 처박힌 어항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항 안에는 서 너덧 마리의 금붕어들이 다 찢어진 비늘을 한들거리고 있었다. 뿌연 물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은 힘들어 보였다.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는 그녀의 눈 밑으로 퍼런 멍이 가시지 않고 기미처럼 끼어 있다. 푸석한 머리 결 사이로 담배 연기가 느리게 떠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허공에 눈길을 박은 채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학교는 재미있어?” “네” 나는 짧게 한마디 대답했다.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 거야?” “네” 하고서는 이번에는 주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시간쯤이면 삼촌이 한창 분주하게 주방 쪽을 왔다 갔다 해야 하건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딱히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벌건 문을 열 때만 해도 나를 가장 긴장시켰던 것은 삼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나는 굳이 그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일 뿐. 빗물에 쓸려가 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이미 검은 수챗구멍 사이로 훅훅 빠져나간 지 오래인 것이다.

그녀가 빈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는 다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동자는 까맣고 깊었다. 그것은 한없이 텅 비어 보이기도 하고 또, 꽉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색한 만남이 있고 몇 달 후, 가을 바람이 스산하게 등뒤를 떠밀던 시월,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샤넬 블랙 슈트를 차려 입고 카페의 문을 열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머리 위에 얹어진 선글라스도 샤넬이다. 언제나 저렇게 우아한 모습을 가장하지만 그녀에겐 지울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건, 그건 일종의 퇴폐적인 그림자였다. 아무리 샤넬 정장을 입고 있어도 그녀에게선 술집 마담의 몸짓이 배어 나온다. 그건 그녀가 지우려 하면 할수록 그녀 얼굴 한 구석에, 손가락을 흔드는 버릇 속에, 발목을 감싸고 있는 스타킹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헤이즐넛 커피를 주문하는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깊게 보조개가 패었다. 아, 저 볼우물, 그녀가 웃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빗물에 얼굴을 들이밀기라도 한다면 아마 저 우물에 찰방찰방 물이 고이리라.

커피 잔에 스푼을 놓고 돌리는 그녀의 손놀림이 낯설다. 곱게 다듬은 손가락 위에 전에 없던 콩알만 한 다이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에스프레소의 쓴맛이 혀끝에 감겨온다.

“엄마, 결혼한다.” 그녀는 마치 커피 맛있는데,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수십 번도 더 저었을 커피 잔을 입술에 갖다 대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잔을 내려놓으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옆모습이 가장 정직하다고 했던가. 어떤 표정으로도 꾸밀 수 없기에. 엄마의 옆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행복해?’라고 물어보려다 나는 그만 입술을 꼭 깨물어 버린다. 어차피 우리는 각자의 레일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할 뿐 서로의 종착역이나 기착지 같은 것을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엄마는 엄마가 찾은 무엇인가에 지금 막 안착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에 어떤 의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엄마에게 그것은 베르사체 선글라스를 샤넬 선글라스로 바꾼 정도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나는 바란다. 그녀의 행복을. 지구라는 행성에 정착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집어치워, 그들은 죽은지 오래야. 이미 사멸 돼버린 존재라고.” 나는 H에게 소리쳤다. “비틀스는 영원히 죽지 않아.” 이건 뭐야? 아직까지도 우상 숭배가 가능한 것인가. 이미 그런 야만의 시대는 20세기라는 꼬리표를 단 채 썩은 냄새를 풍기며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메스꺼운 것이 슬금슬금 내 검은 입 구멍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 빠진 콜라 잔을 내려다보며 나는 길게 하품을 했다.

“왜 존이지?  커트(5)도 있잖아?” “존이 아니라 비틀즈야. 그리고 커트는 자살한 거지 살해당한 건 아냐. 자살과 타살은 명백히 다르지. 언뜻 보기에 자살하는 게 어떤 천재적인 결단처럼 보일 수도 있어. 아, 굉장하군.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수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H는 손가락을 펴서 흔들어댔다. 눈을 크게 뜬 채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목에 핏대가 벌겋게 돋아 올라왔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결단을 내리는. 하지만 그건 극도로 나약한 존재들이나 저지르는 일이야. 시드, 짐, 지미…, 대부분 스스로 멸종한 존재들이라고.” 묘하게 뒤틀린 H의 입가에 허연 침이 고이고 있었다. 역겨웠다.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밀려왔다. 박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재커랜더’의 드러머는 연신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질 샌더 와이셔츠를 걸쳐 입은 인디 밴드 드러머라, 그와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웃었다.

운 좋게도 이 신인 밴드는 드럭의 주말 공연에서 데뷔를 하게 되었다. 낮 동안 리허설을 위해 개방된 드럭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온갖 낙서로 얼룩진 시멘트벽에서는 눅눅한 기운이 밀려왔다. 그 곳은 내 방과도 비슷했다. 언제나 축축하게, 어둠 속에 잠긴. 굶주린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늙은 창녀처럼 지하에선 어떤 냄새가 풍긴다. 그건 약간의 타락과 방종, 쾌락의 하드코어 음이 깊게 스민 우리들의 땀 냄새였다.

H의 수다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 때 K가 쭈뼛거리며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한 여름인데도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첫인상은 음울했다.

H가 내게 남긴 것이라곤 K와 눈썹 위 일 곱 번째 구멍뿐이다.

K의 ‘혹성 49’는 ‘재커랜더’와 같이 데뷔 공연을 가졌다. 물론 ‘혹성 49’의 KO 승이었다. 그날 H의 질 샌더 와이셔츠에 누군가가 케첩을 뿌렸던 거 같다. 아니면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코피를 흘렸던 것인지. 하여간 그의 옅은 하늘색 플란넬 남방 위로 시뻘건 얼룩이 번져 있었다.

K, 무대 위의 그녀는 유난히 길다란 손가락들을 빠르게 움직이며 기타를 더듬고 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조그만 얼굴이 보였다 사라지곤 한다.

H가 K의 손을 잡고 내 앞에 나타난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녀석이었다. 개방된 사고영역의 소유자. 난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내 관심은 그의 새로운 연인인 K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의 아름답고 섬세한 손가락들을 보았다.

K의 밴드는 연주만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곡에 가사를 붙이고 싶어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었다. 난 졸업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낼 의향이 있었다.

K의 곡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음울한 그녀의 표정 어디에서 그렇게 폭발적인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녀의 곡 열 세 개에 가사를 붙였다. 가사를 붙인 곡을 클럽에서 연주하던 날, 정확히 H의 일 곱 번째 구멍을 뚫던 날 그녀는 

무대 뒤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팔목에 닿자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그녀의 입술은 마멀레이드처럼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가락. 그것은 기타를 치듯 아주 부드럽게 또 때론 아주 힘 있게 

내 몸에서 리듬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잃어버렸던 내 세포 하나 하나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H의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녀가 내 가슴에 입맞춤을 하고 있을 때였다. H의 갈색 눈동자는 의심스러운 빛을 

띠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K는 그를 쳐다보았지만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H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표정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어색하게 굳은 표정은 언젠가 신문 사회면에서 보았던 H의 아버지 것과 똑같은 냉정함을 품고 있었다. 차고 단단한, 한 세기 전의 

표정. 그는 냉혹하고 엄숙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멍청하게 보이는 재판관의 표정을 애써 흉내 내고 있었다.

H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비틀즈 흉내 내는 것을 때려치울 것이다. 환멸을 느낀 그는 유럽의 아버지에게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의 질 샌더와 프라다는 리버풀 같은 소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좀 더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도시가 그에게 어울릴 것이다. 그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는 빠르게 적응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권하고 싶은 도시가 있다. K와 나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아름다운 운하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암스테르담…….

K에게 졸업 작품을 바쳤다. 여성의 외음부를 직경 1m 가량 크게 확대한 청동 주조물이다. 작품의 제목은 ‘아름다운 구멍’.

그리고 난 내 몸에 또 하나의 구멍을 뚫었다. 내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가슴 위에서 K의 혹성 49가 차갑게 달랑거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리듬을 만들어내며.

내가 그녀 안에 안착하게 될까.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K를 생각하고 또 그녀가 나를 생각한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뜨거운 심장 주위를 선회하던 혹성 49가 갑작스레 궤도를 이탈해 수십 광년 떨어진 성단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강한 자장으로 서로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망막 위로 잠깐 엄마의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붉은 할로겐 등에 반사된 엄마의 얼굴. 그녀는 분명히 웃음을 머금고 있다.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담배연기가 느릿하게 춤을 추고 있다. 느리고 평온하게 움직이는 연기. 우리를 축복하듯 그녀가 손을 슬쩍 든다.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다.

K는 나를 위해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다. 난 그녀의 곡에 가사를 붙인다. 30평 남짓한 지하에서 우리는 태아처럼 웅크리고 서로를 보듬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인의 질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아기처럼 그녀는 옹알거린다.

드럭의 문은 새벽이 올 때까지 열려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검은 구멍을 벌린 채 엄마의 자궁처럼 뜨거운 온기를 내뿜으며. 

< 끝 >

 

비고.
1)홍익대학교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자리 잡은 클럽 분위기의 소극장
2) 홍대 앞 클럽에서 연주한 인디 밴드. 드럼, 베이스, 기타 세 명의 남자로 구성. 모두 양성애자이며 헤비 스모커이고 삼겹살 마니아. 1998년 결성 2001년 1월 해체됨. 그들에겐 유난히 혹독한 밀레니엄의 첫겨울이었다.
3) 1960년 비틀스가 공연을 했던 리버풀의 카페
4)‘러브스틱’이라는 밴드 이름답게 그들은 청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 곳에나 무턱대고 한 번씩 사랑의 작대기를 꽂았다. 몇몇 클럽에서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으나 멤버 각자의 성격 차로 결성 다섯 달만에 해체됨. ‘너의 영혼을 불살라 버려라’라는 곡에 가사를 붙였으나 그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5) 커트 코베인 : 그룹 ‘너바나’의 리드 싱어, 1994년 자살함.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소감-심사평

당선 소감/ “이제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깨”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 한 줄기 불어 숱 많은 머리카락에 낯설고 먼 곳의 향기를 묻혀 놓습니다. 가슴이 뛰고 심산(心散)하여 괜스레 손바닥을 펴 봅니다. 사방으로 뻗은 지류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내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이 불쑥 내비칩니다. 그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스스로 그어 돋워진 옛 상처를 운명인 양 받아들이려다 잔금 사이 얼룩진 낯선 얼굴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아…, 이 얼굴은, 오랫동안 보지 못해 잊고 있었던, 나의 동안(童顔)입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지그시 눌러봅니다. 오래전 지워진 손금 밑으로 퍼런 혈관들이 퍼덕퍼덕 숨을 쉬고 있습니다. 먼 곳의 바람은 곧 잦아들겠지요. 다시 찾은 얼굴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며 돋워진 상처 밑으로 희미해진 손금이 다시 깊게 패일 수 있도록 작은 주먹을 힘껏 쥐어 봅니다.

가르침 주신 이반 선생님, 조성기 선생님, 고(故) 이성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온 가슴으로 뜨겁게 글자들을 불태우는 모임 ‘숨’ 문우들에게 감사하며 특히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 주는 양영아 선배 고맙습니다. 선배, 글이 이렇게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리고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학우들 우리 같이 가는 겁니다.

언제나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는 동생, 지우(知友) 숙경, 종미, 은정 모두 아니었으면 나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 깨지 못했을지 모른다. 고맙다. 끝으로 부족한 원고 뽑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정진하겠다는 다짐 올립니다. (장혜련)

1972년 서울출생/진명 여고 졸/숭실대 문예창작학과 3학년 재학 중


심사평/ 발 빠른 전개… 꿈틀거리는 역동감이 싱싱
예심에서 올라온 10편을 통독하고 나니 우열이 워낙 분명해서 4편을 손쉽게 골라낼 수 있었다. 작품마다 큰 미덕과 작은 미흡이 엿보이는 4편의 독후감은 다음과 같다.

‘즐거운 삼류’(이상은)는 TV매체에서 기획 일을 도와주는 주인공의 깔끔한 정리벽에서도 드러나듯이 인문사회학적인 분석의 문체가 단연 빛을 내고 있다. 그러나 소제목을 잡다하게 늘어놓은 구성의 번잡함과 한 동네의 생태기에서 한 집안의 혼인기로 번져가는 수다스러운 서사가 단일한 효과를 점층적으로 쌓아가야 하는 단편소설의 자족적 성격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다.

‘블타바의 손가락’(오영채)은 한때 운동권 학생으로 위장취업한 경력까지 있는 화자가 이제는 프라하의 관광안내인이 되어 옛날의 연인을 심정적으로만 좇는 일종의 추억 기이다. 찬찬한 서술벽으로 프라하의 역사적 명소를 소개하는 문맥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경을 되돌아보는 이런 소설들은 흔히 그 과도한 정서의 낭만화가 역사의 진실과 그 현장의 절박감을 도식화·왜곡화·통속화시키고 말아 좀 유치한 감상벽에 빠지곤 하는데 이 작품도 그런 상투화된 문학적 관습을 반성 없이 추종하고 있다.

‘숨은 달’(박계순)은 실직하여 매일같이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남편을 버리고 아이들과 함께 도주하려는 달동네의 한 주부의 심경을 구슬프게 그려내고 있다. 전화료를 못 내서 전화까지 불통인 처지임에도 초콜릿과 소주는 챙겨야 하는 화자의 생활세계에는 핍진감이 넘실거리고, 지구가 달을 훔치는 개기월식에 빗댄 가출 의욕의 소묘에는 아이러니가 올곧게 쟁여 있다. 그러나 거의 모범답안 같은 이 찹찹한 작품에는 서술과 묘사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쇄말주의가 보일뿐더러 몇몇 어휘가 부적확하게 사용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미숙마저 눈에 띈다.

‘구멍’(장혜련)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저질러버리는 통과의례로서의 성적 탐닉을 전폭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엄마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입은 정신적 외상이 급기야 양성애에의 함몰로까지 비약하는 일련의 경과가 자잘한 세목들의 발 빠른 전개와 함께 신세대의 가감 없는 기성세대 성토벽에 힘을 실어주고 있기도 하다. 띄어쓰기도 부실하며, 사전 찾기에 게을러서 다소 거친 문장이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으나, 이 작품 속에 꿈틀거리는 역동감은 싱싱할 뿐만 아니라 희귀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거듭하여 문운을 힘차게 열어가기 바란다.

(김치수·문학평론가, 김원우·소설가)

[t-07.10.05.  20211013-1553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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