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 - 구렁이들의 집」
봉천동, 그 찬란하던 날
목욕탕 털이범 상구가 감옥에 간 사이에 아내 영주는 이혼서류를 보내고,
그가 악착같이 모은 돈을 가지고 아이와 사라졌다.
아내를 응징하기 위해 아내의 뒤를 쫓지만 다른 사내와 살고 있는 아내는 여전히 불행하고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형수 한주선은 사람을 죽이던 순간 또 사형집행을 당하는 순간 '푸른 송아지'가 보인다고 했다.
나라에선 불행한 사람의 몫을 빼앗은 죄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골라 처형하겠다는 법을 만든다고 떠들썩한데,
조그마한 행복조차 짓밟은 아내를 나라의 법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려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푸른 송아지가 상구의 눈에도 보인다.
"아이가 죽었다구요?"
수희는 깔깔거렸다. 누가 죽었대요?
상구는 다시 물었다.
아이가 죽었어요? 수희는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고 쏘아붙였다.
상구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놔요, 이거. 수희가 뿌리쳤으나 그는 다시 거칠게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대답해요. 우리 준이가....... 죽었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죽었습니까?"
수희는 손을 완강히 밀어냈다.
"난 몰라요. 내가 마지막으로 준이를 본 건 벌써.... 삼 년 전이예요."
"그뒤로는요? 소식도 들은 적 없습니까?
무슨 고아원에 넣었다거나 어디다 내버렸다거나 하는 얘기 못 들었어요?
아니면..... 죽었다거나."
수희는 취한 눈으로 한동안 그를 쳐다보았다.
상구는 다시 조금 전의 그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는 데까지만 말해줘요. 조금 더,
수희는 입을 여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구는 다시 말했다.
아무도 해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요.
그 말이 수희의 마음을 오히려 다잡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깨어졌다.
수희가 일어섰다. 가야겠어요.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구요.
상구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 얘기 하지 말고 술이나 더 마십시다.
수희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안돼요, 하고 술집을 나섰다.
상구는 얼른 여관 동성장의 전화번호를 써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혹시 뭐라도 할 얘기가 생각나면 꼭 전화해요.
수희는 키들거리며 쪽지를 받아들자 캄캄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11 푸른 송아지
세종로였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고, 그 너머에 광화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버텨 서 있으며,
그 뒤로는 햐얀 눈이 뒤덮인 우아한 북악산이 푸른 하늘에 이마를 문지르고 서 있었다.
그는 수희와 함께 텅 빈 세종로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손을,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있었고, 수희는 햐얀 면사포를 쓰고 있었으며,
그녀는 아름다웠다.
상구는 실크 셔츠에 턱시도를 입고, 발에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 꽃잎이 흘날리고 진한 꽃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엉뚱하게 이순신 장군도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아, 돌아보니 어느새 수희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 역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수희의 면사포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들은 나란히 자전거를 달려 텅 빈 세종로 거리를 질주했다.
그들은, 상구도 수희도 자유롭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행복했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답고 행복했다.
수희가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광화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 봐요! 상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아지, 푸른 송아지였다.
푸른 송아지 한 마리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 꼬리까지도, 발굽과 눈과 뿔까지도 푸른색이었다.
갑자기 그 송아지가 매에, 울부짖었다.
상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른 자전거를 멈췄고, 다음 순간 자전거가 쓰러졌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얼른 전화를 집어 들어 귀에 가져갔다.
저예요, 하는 것은 분명히 수희였다. 상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세시, 수희와 혜어진 지 겨우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희는 그 뒤에도 혼자서 술을 더 마신 것일까.
그녀의 음성에서는 짙은 취기가 느껴졌다.
웬일입니까? 그가 물었으나 수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소리, 숨소리..... 이어 목을 고르는 헛기침, 상구는 긴장하며 기다렸다.
마침내 수희가 입을 열었다.
"준이는 죽지 않았어요. 영주란 년이 고아원에 갖다 줬대요. 이년쯤 전에요."
고아원이라니! 충격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러나 상구는 이를 악물고 귀를 기울였다.
"어느, 어느 고아원.....?"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상구의 목에서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건 나도 몰라요.
서울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요.
그년 미친 년이에요. 돈은 권세윤이라는 놈한테 한꺼번에 몽땅 사기당했어요.
그놈이 투자해 준다고 가져가서 입 싹 씻은 거죠.
그런데 영주가 그 돈을 받으려 쫓아다니다가..... 그놈한테 겁탈을 당했대요.
그것도 억울한 일인데 하필이면 그 미친년은......"
수희는 갑자기 얘기를 중단했다.
권세운이라니? 상구는 믿을 수가 없었다.
권세운은 영주의 남편이 아닌가.
그런 자와 결혼을 했단 말인가? 수희는 숨을 몰아쉬다가 덧붙였다.
".... 그러곤 일본으로 가버렸어요. 그 뒤론 나도 소식 몰라요."
그 뒷부분의 얘기는 영주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상구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대로 다 말씀드린 거예요.
이제 나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찾아오지도 말아요.
절대로 안돼요. 나 너무 힘들어요.
우리 오빠도 전과자예요. 지금 광주교도소에 있어요.
전과자라는 게 어떤 건지 난 잘 알아요.
내 주위에 전과자 하나면 충분해요.
나 다시는 전화하지 않을 거예요. 벌써 전화번호 쪽지는 찢어버렸어요.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몰라요."
그것으로 전화는 끊겼다.
상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그 후 꼬박 날밤을 새웠다.
세 자루의 칼을 꺼내놓고 가끔 들여다보며,
텔레비전을 커놓고 눈을 번히 뜨고 쳐다보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안 운 채 그는 날이 밝기만을,
날이 밝은 다음에는 다시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어떻게 흘렸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칼이 담긴 배낭을 짊어지고 여관을 나섰다.
거리는 드문드문 차들이 치달리고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들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조용했다.
봉천 호프 역시 아직 불을 밝혀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술을 한 잔만 마시고 갈까, 하는 유혹을 잠시 느꼈으나 그는 곧 물리쳤다.
술은 처형을 끝낸 다음에 마셔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횡단보도도 지하도도 이용하지 않았다.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는 도로 위로 그는 거리낌 없이 내려섰다.
차들이 그를 위해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처럼,
그는 태연히,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무인지경을 가듯 그 넓은 도로를 건너갔다.
그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직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은 영주의 집, 동산빌라 302호 뿐이었다.
그는 골목으로 접어들자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어서 빨리 손에 피를 묻히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 이마에 땀이 흐를 지경으로 바삐 걸었다.
그의 눈은 꿈꾸는 듯 몽롱했고, 그의 발은 춤추는 듯 발랄했다.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오르고, 또 모퉁이를 돌아 비탈길을 오르고......,
마침내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저만큼 경사진 언덕 위에 동산빌라 건물이 엎드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발을 멈췄다.
여기에서 미리 칼을 꺼내야 하는 것일까, 그는 잠시 궁리했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고 어두웠다.
그가 며칠 전 낮에 와서 깨뜨린 이래 그곳의 가로등은 시커멓게 꺼져 있었다.
그는 눈으로 302호의 유리창을 찾았다.
멀리서도 동산빌라의 모든 유리창에 불이 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막 언덕을 오르기 위해 발을 떼어놓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스란히 얼어붙었다.
송아지였다.
푸른 송아지 한 마리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와 멈췄다.
꿈에서 본 것처럼 송아지는 온몸이, 뿔과 눈마저 푸른색이었다.
어어, 그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송아지의 푸른 눈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그에게 뭔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상구는 손을 들어 송아지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살 때 그는 소를 먹인 적이 있었다.
소는 얼마나 순한 짐승이던가.
그러나 푸른 소라니? 그는 멀거니 푸른 송아지를,
그 송아지의 푸른 눈자위와 눈동자를 들여다 보았다.
그 송아지가....... 한주선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송아지의 목덜미에 손을 댄 채 오래오래 그 푸른 눈을 들여다 보았고,
송아지는 애원하는 듯 슬프고 푸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송아지의 푸른 눈을 들여다 보던 어느 순간
그는 송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꺼번에 깨달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p284)
- 현대문학 2000년 12월호.
최인석 - 구렁이들의 집
창작과비평사 - 2001. 03. 01.
율동공원 [t-07.09.10. 20210903-16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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