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보시니 참 좋았다 - 보시니 참 좋았다

by 탄천사랑 2007. 6. 19.

·「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보시니 참 좋았다 

성수, 성미 남매는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하룻밤을 할아버지하고 같이 자고 돌아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얼마 안 떨어진 시골에서 혼자 살고 계십니다.
아빠하고 엄마는 할아버지가 혼자 사시는 것 때문에 늘 마음 편치 않아 합니다.
아마 남들이 불효자라고 할까봐 겁이 나나 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저희 마음 편하자고 늙은 아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효라고 하시며 막무가내 혼자 사시기를 고집하십니다.
할아버지가 사시는 마을에는 정든 이웃도 있고, 
또 돌아가신 할머니하고 같이 가꾸던 채마밭도 있고 기르는 개와 고양이, 닭하고 오리도 있습니다.

한번은 성수가 할아버지께 이렇게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리보다 복돌이, 얌체 그리고 닭하고 오리를 더 사랑하시죠? 맞죠?
  그러니까 우리하고 같이 안 살고 저것들하고만 사시는 거죠?"

복돌이는 할아버지네 개 이름이고, 얌체는 고양이 이름입니다.

"글쎄다. 
  저것들하고 정이 든 건 사실이지만 너희를 사랑하는 것하고 비교할 수야 없지.
  저것들과 떨어지면 누가 돌볼까 걱정도 되고 불쌍한 마음도 들겠지만 그리운 마음은 안 들걸.
  그런데 너희는 늘 그립단다. 
  그리운 마음이 그득해지고, 그리워할 너희가 있다는 것로 얼마나 행복한지 아니?
  그리고 저것들한테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꼭 필요하지만
  너희에게 필요한 건 멀리 있는 할아버지지 곁에 있는 할아버지가 아니란다."

성수는 명절에 할아버지가 서울에 오셔서 주무실 때마다 제 방에 모시고 자야 하는데
어찌나 코를 고시는지 여러 밤 주무시면 큰일이다 싶은 생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합니다.
성미도 할아버지 댁에서 자고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성미가 보고 싶어 하는 게 딴판이라 하룻밤이니깐 참지,
만일 계속해서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만 보게 된다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습니다.
그건 성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댁에 갈 때는 할아버지가 텔레비젼을 보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꼭 동화책을 준비해가지고 갑니다.

그날도 할아버지는 텔레비젼을 보고, 
성수는 숙제를 하고, 
성미는 동화책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자주 아이들을 방해하십니다.   

"얘들아 저, 저, 저것 좀 보렴, 정말 좋구나"하고 말씀까지 더듬으며 애들을 쿡쿡 찌르십니다.

그런 일은 여태껏 없었던 일입니다. 
할 수 없이 애들도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어떤 유명한 미술 평론가가 전국에 있는 성당을 순례하며, 
스테인드 글래스 벽화 또는 조형물을 보여 주고는 그 예술적 가치를 설명하는 시간입니다.

벌써 몇 번씩이나 시리즈로 방송했던 걸 오늘은 종합해서 좋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보여 주면서
평론가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정하는 순서가 맨 마지막에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있는 거라 거의 다 성화나 성물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성화를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 희망도 미술가가 되는 거였다고 하는데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만 마치고
장사를 시작해 가족을 부양했다는 건 아빠한데 들어서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간단한 미술도구를 가지고 경치나 들꽃 짐승들을 그리는 걸 취미로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열중은 좀 지나치십니다.
특히 맨 마지막에 그 평론가가 가장 아름다운 성화로 어느 시골 성당의 벽화를 선정하자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숨이 멎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숨을 죽이고 화면만 응시합니다.
화면에 나타난 벽화는 성당 그림으로는 드물게 성화가 아닙니다.
나무와 들꽃, 새와 짐승, 물고기와 곤충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그림입니다.

아이의 솜씨인 듯 수법이 유치할 정도로 사실적입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생화는 아닙니다.
참새를 탄 말, 나무 위에 올라앉은 물고기도 있었으니까요.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표정만 가지고는 기뻐하고 계신지 화를 내고 계신지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 저 선생님이 유명한 미술 평론가인 것 맞아요?
  저런 그림을 일등으로 한 거 보면 엉터리인지도 모르잖아요."

성미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전혀 딴전을 피우십니다. 

"요다음 주말에는 우리 같이 저 성당으로 벽화 구경 가자."

할아버지 말씀은 하도 단호해서 아이들은 싫다고도 좋다고도 의견을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 후에 엄마, 아빠도 아이들 의견을 따로 묻지 않고
할아버지가 전화로 부탁하신 대로 다음 주말에는 아이들을 서울역까지 데려다 줍니다.

서울역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대젼까지 가서
다시 시외버스로 두 시간이나 더 걸려 텔레비젼에 나온 성당이 있는 마을을 찾아갑니다.
아주 오래 걸리는 외진 동네인데도 할아버지는 지도도 없이 그렇다고 길을 묻지도 않고 곧장 잘도 찾아갑니다.

시내 건너 야트막한 동산에 안긴 아담한 마을이 보이고 한눈에 성당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집도 보입니다.
성당은 성미가 다니던 아파트촌의 유치원보다도 작아 보이지만
지나는 길손을 보듬어 안을 듯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빠, 
  할아버지는 길눈이 어두워 운전도 못 배웠다고 하시더니 텔레비젼에서 한 번 본 데를 잘도 찾아오신다. 
  그렇지?"

성미는 성수에게 말을 건 건데 할아버지가 대신 대답을 하십니다.

"할아버지 고향이니까."
"정말요, 할아버지? 능내가 할아버지 고향 아니구요?"
"능내는 느이 할머니 친정 쪽이고 
  또 서울서 가까워서 늘그막에 할머니하고 둘이서만 살려고 할아버지가 돈 좀 벌었을 때 장만해 놓은 데고, 
  여기는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진짜 고향이다. 
  너무 못살던 게 한이 되어 떠나고 나서 다시는 안 돌아왔지.
  그 대신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 올리긴 했지만.......,"
"그럼 몇 년 만이에요?"
"거진 육십 년 만인가."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으세요?"
"찾기는, 고향에는 잡아끄는 힘이 있단다. 저절로 끌려온걸."

그러나 성당 마당에서 할아버지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십니다.
마침 사제관에서 나온 젊은 신부님이 성당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혹시 벽화 보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럼 그, 그렇게 여, 여러 사람이 구, 구경을 옵니까?"  너무 놀란 할아버지는 말까지 더듬으십니다.
"아뇨, 워낙 외진 데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나서
  하루 한두 팀은 보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화 문의는 부지기수고요. 
  들어오시지요."

신부님이 손수 안내를 해 주셔서 세 사람은 마침내 벽화앞에 섰습니다.
화면에서 본 것처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과 푸성귀, 날짐승과 들짐승, 
물고기와 곤충들이 벽면 하나 가득 자유롭게 흩어져 있습니다.  
구도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데도 하나라도 보태거나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안 될 것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신기합니다.

할아버지는 마치 벽화 속으로 빨려 들어 갈 것처럼 
뚫어지게 벽화만 바라보아 성미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았습니다. 
세 식구가 하도 말없이 오래 서 있자 신부님이 입을 여십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이 벽화가 그려진 건 오십년도 넘는다고 합니다.
  누가 그렸는지 작자는 미상인데, 
  이 그림을 그리게 한 당시의 신부님이 이 그림에 붙인 이름만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와 우리들은 
  다들 이 그림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부르지요.
  창세기에서 그림 제목을 따올 만큼 그 신부님은 이 그림을 아끼셨나 봅니다.

  이 성당에서 선종을 하셨다고 하는데, 
  생전에 몇 번 수리를 하면서도 이 그림 때문에 이 벽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신 게 전통이 되어 
  나중에 신축을 할 때도 이 벽을 살리도록 설계를 했다니까요.
  그때는 이미 이 성당 신자뿐 아니라 이 인근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이 그림을 하도 좋아해 헐고 싶어도 헐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의 영예까지 안게 된 거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던 성미는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울음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해 준 신부님께 인사도 변변히 안 하고 마치 도망치듯 성당을 나옵니다.
할아버지를 쫓아가다 말고 성수가 대들 듯이 할아버지에게 말합니다.

" 그 그림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린 것 맞죠?"

할아버지는 누가 들을세라 주의를 돌아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바보처럼 잠자코 계신 거죠?
  그 그림만 유명해지고 왜 할아버지는 유명해지면 안 되나요?"

할아버지가 눈물을 거두시고 엄격한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아주 가난한 소년일 적 얘기다. 
  소년은 신부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지.
  신부님은 소년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는 학용품과 함께 화구까지 사주셨지.
  그러던 어느날, 
  엄청나게 큰 화판을 내주시며 뭐든지 그려 보라고 하셨지.
  아무리 뭐든지 그리고 싶어도 소년은 그때까지 보고 자란 것밖에 못 그렸지.
  그 큰 화판이 지금까지 보존된 성당의 벽이란다.

  그러나 그 그림을 어떻게 내가 그렸다고 할 수가 있겠니?
  내가 그린 건 아주 미숙한 습작에 불과했는데 와 보니 평론가의 말대로 정말 좋은 그림이다.
  내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건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명품으로 치는 골동품도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었던 게 아니라,
  세월의 풍상과 사람들의 애정이 꾸준히 더께가 되어 앉아야 비로소 명품이 되듯이 말이다."  (p48)
※ 이 글은 <보시니 참 좋았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이가서 - 2004. 02. 10.

[t-07.06.19.  20220601-1612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