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찌랍디다
어린이가 자라서 자신의 책임을 질 만한 어른이 되면 결혼을 합니다.
결혼이란 남남이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제 몸같이 사랑하며 함께 사는 일이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 책임을 진다는 건 책임을 나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남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나 나누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옛날 옛적 우리나라엔 여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된 색시를,
스스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기는 커녕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도 아직 먼 어린 신랑에게 시집보내는 나쁜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풍습은 남자의 집에는 매우 유리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손이 부족한 집에서 열한 살밖에 안 된 신랑이 열일곱 살 먹은 색시를 데려올 수 있으면
품삯도 없이 부지런한 일손을 하나 얻는 셈이 되니까요.
그 시절엔 또 남자만이 한 사람 몫의 생각을 할 수 있고,
여자는 다만 그 생각을 따를 수 있을 뿐이란 엄격한 도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풍속이 아무리 여자에게 억울해도 감히 뜯어 고칠 염두를 내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아들 낳기만을 소원했습니다.
부처님한테도 신령님한테도 삼신님한테도
아들 점지해 달라고 만 빌었지 딸 점지해 달라고 빌진 않았습니다.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알면서도 자손 속에 여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심리는 지혜롭고 자비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어리석은 욕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들과 딸을 고루 점지하셨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욕심을 그대로 들어주었더라면
우리 겨레의 역사는 그 어리석고 욕심 많은 시대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자연의 섭리는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사람으로 점지했기 때문에
남자 중에도 똑똑한 남자와 어리석은 남자를 고루 섞었고,
여자 중에서 똑똑한 여자와 어리석은 여자를 고루 섞어서 점지하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그릇된 것은 고치려는 마음의 힘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어린 신랑을 미끼로 어른 색시를 데려다 부려먹으려는 그릇된 풍습도
그것을 당하는 여자들 중 똑똑한 여자의 소리 없는 반항에 의해서
오늘날처럼 고쳐질 수가 있었던 게지 저절로 된 게 아닙니다.
소리 없는 반항이었다 함은 그 시절의 도덕 속에서의 의로운 반항이었을 뿐
그것을 뚫고 나와 억울한 사람끼리 손잡고 아우성치는 반항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숙성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여덟 살 색시가 혼인날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의 풍습에 따라 색시는 그때까지 신랑의 얼굴을 본 적도 그 사람됨에 대해 들은 바도 없습니다.
신랑이 열두 살이라는 것과 어디 사는 뉘 댁 도련님이란 소리를 어머니한테 들은 것도
색시의 아버지가 신랑의 아버지와 만나 서로 사돈 되기를 연약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시집을 가는 당사자는 색시건만
시집가는 날 받는 데도 참견할 기회를 색시에겐 전혀 안 주고 어른들끼리만 했습니다.
시집갈 날을 받아 놓고 색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시집가서 지킬 부덕에 대해 다시 한 번 엄한 복습을 했습니다.
마치 수능시험 날을 한 달쯤 남겨 놓고
총 복습에 열을 올리는 요즘의 고등학교 졸업반처럼 말입니다.
죽어도 시집 울타리 밑에서 죽어야 한다느니,
시집간 날부터 장님 삼 년,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을 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시집 식구가 될 수 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어려서부터 골백번도 더 들은 소린데도 또다시 복습을 강요당합니다.
색시는 보고 듣는 것 중에서 옳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싱싱한 감성과
생각하는 것을 말로 나타내고 싶은 정직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집가야 한다는 게 마치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끔찍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랑이 될 사람에 대한 호기심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쏠리는 마음 또한 그녀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시집가기 알맞게,
꽃답게 피어날 무렵부터 그녀는
장차 신랑이 될 남자의 모습을 마음속에 몰래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그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장님 삼 년,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에 대한 공포를 한결 덜어 줍니다.
혼인날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풍습에 따라 혼인의 예식은 색시 집에서 치르게 되었습니다.
혼인날은 온종일 눈을 내리깔고 있어야 되는 거라고
웃어른과 시중 드는 하인이 누누이 일러두었지만
색시는 초례청에서 살짝 산랑을 훔쳐보았습니다.
꿈에 그리던 늠름하고 잘생긴 헌헌장부 대신에
잔망한 코흘리개가 한눈을 팔며 맞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색시의 막냇동생보다도 어렸던 것입니다.
색시의 실망은 초례청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색색의 과일과 유과와 떡을 자가 넘게 괸 신랑상을 받은 코흘리개 신랑은
체면 차릴 줄도 모르고 마구 집어 먹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신랑 흉보는 소리, 킬킬 웃는 소리, 쯧쯧 한심해하는 소리,
색시는 눈은 감고 있지만 귀를 막고 있진 않았기 때문에 다 듣습니다.
조카를 장가 들이기 위해 후행으로 따라온
코흘리개 신랑의 삼촌이 배탈 날라 그만 먹으라고 타이르는 소리도 들립니다.
색시 어머니는 세상에 우리 사위 식성도 좋지,
그래야 무럭무럭 자라 의젓한 장부가 되지,
하면서도 저 콩 꼬투리만 한 게 언제 자라 사람 노릇하랴 싶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첫날밤이 되었습니다.
색시는 눈 내리깔고 족두리 쓰고 다소곳이 앉아 신랑이 족두리를 내려 주길 기다립니다.
신랑이 신방에 든 지는 오래건만 도무지 족두리를 내려 줄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색시는 눈을 뜨고 신랑을 찾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발뒤꿈치로 꽁무니를 단단히 틀어막고 앉았는 꼴이 뒤가 급한 모양입니다.
낮에 그렇게 주책없이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측간에 다녀오시지요." 색시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측간이 어딘데?"
"안마당 지나 중문 지나 사랑마당 지나 대문 지나 바깥마당 지나 텃밭 지나 느티나무 곁에 있습니다."
"싫어, 싫어. 난 밤엔 무서워서 뒷간에 못 간단 말이야."
색시는 어린 신랑이 한심했습니다만
얼굴에 화색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혼자서 족두리를 내리고 활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을 측간에 데려가기 위해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신랑이 꽁무니를 들자마자 이상한 소리와 함께 역겨운 냄새가 났습니다.
"난 몰라, 난 몰라. 쌌단 말이야." 색시 땜에 똥을 쌌단 말이야."
신랑은 제가 똥을 싸 놓고 남의 탓을 하면서 온몸으로 도리질을 했습니다.
열두 살이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적은 나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잔망할까 싶어 색시는 속으로 서글펐지만 여전히 얼굴에 화색을 잃지 않고
더러운 바지를 벗기고 깨끗이 씻겨서 자리에 눕혔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엔 뭘 입지?"
"염려 놓고 편히 주무세요. 아무도 모르게 빨아서 새로 지어 놓을 테니까요."
거북하던 뱃속의 것을 시원하게 싸 버린 신랑은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 일이 큰일입니다.
어린 신랑을 안심시키느라 큰소리는 쳤지만 요새 옷하고 달라서
옛날의 명주 솜바지를 하룻밤 새 빨아서 다시 지어 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한쪽에 뭉쳐 놓은 바지에서 무럭무럭 풍겨오는 냄새를 맡으며
색시는 어린 신랑보다는,
차라리 그런 철부지를 벌써 장가 들인 시부모님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노여움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그걸 트집 잡아 시댁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색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거역은 커녕 시댁에 대한 불만을
누구에게 말하거나 안색에 나타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자는 시댁에 순종하고 얼굴에 화색을 잃지 않되 수선스럽지도 수다스럽지도 않고
한결같이 조용해야 할 것을 배우고 익혀왔던 것입니다.
색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을 조용히 불러냈습니다.
“너 사랑에 좀 나가 보고 오너라.”
사랑에 나가 본 계집종은 모두 잠들어 계시더라고 아뢰었습니다.
“너 감쪽같이 사랑에서 바지 하나를 훔쳐 올 수 있겠느냐? 아니다.
참, 훔쳐 오라는 게 아니라 바꾸어 오라는 게다.”
“낮에 약주들이 과하시어 바지 아니라 몸째 업어 내도 모르시게 곤히들 잠들어 계시온지라
그건 어렵지 않사오나 무엇 하시려고 바지를 훔쳐 내라 하시는지…….”
“훔치는 게 아니라 바꾸려 함이래도.”
색시는 계집종이 여러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수 중에서 명주 솜바지를 꺼내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걸 갖다 놓고 대신 남자 바지를 내오거라.
그러나 아무거나 내오는 게 아니고 꼭 시삼촌 되실 분의 바지를 내와야 하느니라.
그분이 무슨 바지를 입고 계신지 똑똑히 봐 두었으렷다.”
“그러믄요. 새 사돈 어른 인뎁쇼. 회색 명주 삼팔바지를 입고 계셨사옵니다..”
“꼭 그걸로 바꿔 내와야 한다. 실수 없도록.”
계집종은 별로 어렵지 않게 여자 솜바지와 새 사돈의 명주 삼팔바지를 바꾸어 왔습니다.
신랑이 잔망한 건 나이도 나이지만 내력인 듯
신랑 삼촌의 바지도 큰 편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색시는 시삼촌 바지를 잠든 신랑의 머리맡에 개켜 놓고
똥 싼 바지는 둘둘 뭉쳐 옻칠한 궤짝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색시는 신랑에게 어젯밤에 바꾸어 놓은 삼팔바지를 입혔습니다.
좀 크기는 했지만 양복바지하고 달라서 허리띠를 치켜 매고 대님을 매니까 그럭저럭 입을 만했습니다.
신랑은 똥 싼 바지는 감쪽같이 없어지고
부숭부숭한 새 바지를 입게 된 것만 좋아서 바지가 커도 불평 한마디 안 했습니다.
자, 색시방 일은 이렇게 잘 처리가 됐지만 사랑방 일이 큰일입니다.
조카 장가 들이러 와서 잘 대접받고 편히 자고 난 사돈 영감님,
자리 속에서 담배 한 대 피고 기분 좋게 일어나 우선 바지 먼저 입으려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 바지는 간 데 없고,
같은 명주 삼팔바지가 있긴 있는데 아랫도리가 화발통처럼 터진 여자 바지가 아니겠습니까?
주인 영감도,
손님으로 와서 묵은 일가친척들도 일찍 일어나 소세하러 나간 듯
사랑방엔 자기 혼자뿐인데 바지 또한 여자 바지 한 벌뿐이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딴 일도 아니고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새 사돈집에서 소란을 피울 수도 없습니다.
안팎에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합니다.
여기서 하나 알아둘 일은 여자 바지와 남자 바지의 생김새의 차이입니다.
여자들이 지금의 내복처럼 치마 속에 입던 바지는 아랫도리가 화발통처럼 터졌습니다만
터진 부분은 겹으로 여미게 돼 있어서 그 부분만 여며 놓으면 거의 남자 바지의 모양과 비슷했습니다.
사돈 영감은 여자 바지를 입기로 했습니다.
바지만 바뀌었을 뿐 다행히 허리띠와 댓님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여자 바지를 입고 터진 아랫도리를 잘 여미고
대님 매고 저고리 입고 조끼 입고 마고자까지 입으니까 과히 어색하진 않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여민 아랫도리가 벌쭉거리며 바람이 들어오는 게 흠이었지만
지금 그걸 가릴 계제가 아닙니다.
어떡하면 아무도 눈치 채지 않게 하루를 넘길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돈 영감은 방 안에서 몇 번 오리걸음을 걸어 보고 소세를 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그가 여자 바지를 입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걸음 너비를 조금씩 떼어놓으며 오리처럼 종종걸음을 쳐 다녔습니다.
한편 색시는 어머니한테 부탁해서
사랑방 어른들도 안채에서 아침을 들도록 아침상을 보게 했습니다.
사돈 영감님은 무사히 소세를 끝마치고 아침상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안채로 듭시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주인 영감님은 물론 손님들도 군말 없이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자기만 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돈 영감은 종졸걸음을 치면서 딴 손님들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안채로 들면서 보니,
부엌과 안방, 건넌방에서 여자들이 고개를 내밀고 구경들을 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새 사돈의 거동이 여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것 같았습니다,
사돈 영감은 자기에게 집중된 여자들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돈댁의 일가친척 여자들에게 점잖게 보이고 싶긴 한데
마음껏 거드름을 피우며 걷는 갈짓자걸음을 걷자니 바지 아랫도리가 벌쭉댈까 겁이 납니다.
종종종 오리걸음을 걷자니 점잖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무사히 댓돌까진 올랐는데 자아, 마루로 오를 일은 참으로 난감합니다.
마루가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 사이에 휩싸여 오르려고 했으나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자, 오르시죠.”
잔칫집에선 새 사돈이 가장 귀한 손님이라 모두 비켜서면서 사돈 영감이 먼저 마루에 오르기를 권합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사돈 영감님도 궁지에 몰리니까 자기도 모르게 번개처럼 신기한 꾀가 떠올랐습니다.
사돈 영감님은 껄껄껄 파안대소를 하면서 주인 영감님한테 말을 걸었습니다.
“사돈 어른.”
“네.”
“사돈어른, 댁의 따님 우리 가문의 며느리 되어 좋고,
우리 가문의 아들은 댁의 사위 되어 좋고, 피차 이런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좋은 김에 놀이 삼아 내기나 하나 하실까요?”
“내기라뇨?”
“다 늙은 게 주책 부리는 것 같습니다만
이 마루를 모둠발 뛰기로 뛰어오르기 내기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소싯적부터 워낙 장난을 좋아해서 그런지 사돈댁 마루를 그냥 오르기가 어쩐지 싱겁군요.”
새 사돈 영감의 거동을 구경하던 여자들이 참 재미있는 양반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좋습니다.”
색시 아버지인 주인 영감도 소싯적에 장난깨나 하던 솜씨라
단박에 찬성을 하더니 제일 먼저 모둠발 뛰기로 거뜬히 마루로 뛰어올랐습니다.
어떡하다 사돈 영감 혼자서 쳐지고, 모든 사람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습니다.
신랑도 마루 끝까지 나와 자기 삼촌이 내기에 질세라 손뼉을 치면서 격려를 합니다.
이때 사돈 영감님은 자기의 명주 삼팔바지를 조카가 입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신방에서 일어났으리란 것이 대강 짐작됩니다.
자기가 계획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가 없습니다.
피하는 데까지 피해 보고 당하는 데까지 당하는 수밖에.
사돈 영감님은 발을 모으고 죽자구나 마루를 향해 뛰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힘이 약간 부쳤나 봅니다.
발끝이 마루 끝을 살짝 건드리고 나서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습니다.
네 활개를 벌리고 나가떨어졌으니
꼭 여몄던 여자 바지의 아랫도리가 활짝 열린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에구머니 망측해라.”
구경하던 여자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안으로 고개를 움츠러뜨렸습니다.
한편 색시는 똥 싼 바지를 담은 옻칠한 궤짝을 비단 보자기로 쌌습니다.
그리고 계집종을 불렀습니다.
“너 이것을 우리 시댁에 여다 드리고 오너라.”
“이게 뭔데요?”
“넌 알 거 없다.”
“그래도 사돈댁 어른이 뭐냐고 물으시면 대답을 할 수 있어야죠.”
“뭐냐고 물으시거든 ‘찌랍디다’로 아뢰어라.”
계집종은 비단 보자기에 싼 것을 이고 한달음에 사돈댁까지 갔습니다.
새아씨가 보낸 물건을 가지고 왔다고 하자
옷 어른들이 대접도 융숭하게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비단 보자기를 끄르자 옻칠도 아름다운 궤짝이 나왔습니다.
“이 속에 무엇을 넣어 보냈는지 아느냐?” 누군가가 계집종에게 물었습니다.
“찌랍디다.”
계집종은 간단히 아뢰었습니다.
아랫목에서 듣고만 있던 노파님이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띠고 말했습니다.
“찔 것 없다. 사돈댁에서 보내신 귀한 건데 좀 굳었으면 어떻겠느냐?”
아랫사람들이 궤짝을 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마님은 엄한 얼굴로 타일렀습니다.
“사돈댁에서 보내신 걸 사당에 고하여
조상님이 먼저 운 감하신 후에 먹도록 함이 옳으니라.”
아랫사람들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친 걸 부끄러워하며
얼른 궤짝을 사당으로 옮기고
향불을 피우고 절하고 나서 다시 노마님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노마님이 궤짝을 열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온 건 떡이 아니라 새신랑의 똥 싼 바지였습니다.
‘찌’란 똥의 다른 말입니다.
이란 기막힌 망신을 당하자 아들을 너무 일찍 장가 들였다는 뉘우침보다는
감히 시댁에 그런 망신을 준 새댁을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이 더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신랑이 변변히 못해 당한 일이라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 놓고 문제 삼는 것도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시댁 식구들은
다만 시집살이나 지독하게 시킬 것을 벼르고 있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색시는 시집와서 어린 신랑을 지성으로 거두고 공부시키고,
시부모님께 효성스럽고 동기간에 우애 있기가 한결같아서
시댁 식구들은 색시가 그런 일을 꾸몄으리라는 걸 점점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가 문중에서나 동리 사람 중에서
어린 신랑을 장가 들이고 자 하는 일이 생기면 극구 말리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p31)
※ 이 글은 <보시니 참 좋았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완서 - 보시니 참 좋았다.
이가서 - 2004. 02. 10.
[t-07.06.11. 20210604-18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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