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 소녀와 늑대

by 탄천사랑 2007. 5. 16.

· 「유리 나기빈, 외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소녀와 늑대

 


에이빈트 욘손
저녁 어스름이 사라지자, 하늘에는 별빛을 희미하게 하는 엷은 흰 구름만 남았다.
구름 사이로 별들이 빛을 내쏜다. 
이렇게 별들이 빛을 내쏘는 것은 그들 자신 너무도 작고 어두운 것이 두려워 짐짓 용기를 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물론 나는 어두운 것쯤은 두렵지 않다.

힐데와 나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꼬마지만, 그래도 힐데에게는 삼촌이 된다. 
힐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녀다. 
이건 내가 힐데의 삼촌이라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른 소녀의 삼촌이 된다고 해도, 
그러니까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이나 소련 소녀, 
아니면 흑인이나 에스키모 소녀의 삼촌이 된다고 해도 
세상에서 힐데가 가장 예쁜 소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래 뵈도 나는 사실 그대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힐데도 삼촌인 나를 좋아한다. 
그건 내가 저보다 키가 크고 또 이를 가느라 내 앞니가 두 개 빠졌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낮잠을 잘 때 힐데가 가만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이 있다. 
힐데는 데리고 들어온 자기 친구에게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곤거린다.

"얘, 이리 와서 우리 꼬마 삼천 좀 봐.
 우리 꼬마 삼촌은 앞니가 두 개나 빠졌거든."

내 앞니가 두 개 빠진 것이 힐데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니가 그렇게 볼썽사납게 빠져버린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느 때 힐데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꼬마 삼촌이 자나 봐. 가까이 와서 우리 꼬마 삼촌 얼마나 우습게 생겼나 좀 보렴."

힐데는 정말 귀엽다.
자기 장남감을 친구들에게 아끼지 않고 나눠주기도 한다.
엔젠가는 나한테까지도 준 일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어른들은 내가 그것을 힐데에게 빼앗은 줄 알 테니까 말이다.

한 번은 힐데가******** 얼굴이 상기된 채 여자 친구와 함께 내게 왔다.

"꼬마 삼촌, 잉게는 삼촌이 없대."
"그건 나도 알아."
"그럼 오늘부터 꼬마 삼촌이 잉게의 삼촌도 되어 줄 수 있어?
 삼촌이 하나도 없다니, 너무 불쌍해.
 꼬마 삼촌이 우리 둘의 삼촌이 되어 줘.
 반은 얘 삼촌, 반은 내 삼촌이 되는 거지."

결국 나는 힐데와 잉게에게 반반씩 삼촌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와 힐데 단둘이서 집을 지키며 창 밖으로 밤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일이다.
힐데와 나는 구름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저건 내 것, 저건 네 것, 그래서 우리는 희고 엷은 구름을 일곱 조각씩 나누어 가졌다.
그 일이 끝나자, 힐데는 소꿉놀이를 하자고 했다.
삼촌 체면에 함께 소꼽놀이를 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힐데는 금방 뽀로통해졌다.

"이제부터 꼬마 삼촌하곤 말도 안 할 거야."

그래도 할 수 없었다.
힐데가 소꼽놀이에 필요한 장난감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나는 소년 신문을 펼쳐 들었다.
힐데는 입을 꼭 다문 채 혼자서 소꼽놀이를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힐데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
조금만 버티면 힐데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온다.

"삼촌, 나 비들기만한 풍뎅이 봤어."
"그런 풍뎅이가 어디 있어? 이리 가져와 봐?"
"아무려면 그렇게 작은 비둘기가 
"싫어, 내가 뭐 삼촌 심부름꾼인 줄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이렇게 말했다.
"난 풍뎅이만한 비둘기를 봤어."
"아무려면 그렇게 작은 비둘기가 있을까? 어디 보여줘 봐." 힐데는 내 작전에 말려들었다.
"싫어, 내가 뭐 내 심부름꾼이라도 되니?"

우리는 그런 식으로 얼마 동안 더 투닥거린다.
이윽고 힐데가 하품을 했다.
그것은 저녁 9시 15분이 되었음을 뜻한다.
힐데는 늘 그 시간만 되면 하품을 했던 것이다.
마치 무슨 프로그램처럼 정해 놓고 그랬다.
앞으로 5분 동안은 힐데가 손을 씻지 않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겠다고 떼를 쓸 것이다.
결국 힐데는 옛날 얘기를 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야 손을 씻을 것이다.

나의 옛날 얘기는 거의 늑대 이야기였다.
우리가 사는 시내엔 늑대 같은 건 없다.
바로 집 앞에 버스가 정거하는데 무슨 늑대가 있겠는가. 우리가 사는 곳은 대도시이다.
동물원에 가면 늑대쯤은 힘들이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동물원의 늑대 우리는 갈 때마다 비어 있었다.
따라서 힐데는 그림책을 통해서만 늑대를 보았다.
자기가 귀를 찢어놓은 장난감 늑대와 함께...,

"만일 네가 30초 안에 잠들지 않으면 숲 속의 큰 늑대를 불러 올거다!"

내가 위헙한다.
그러다가 '어서 와라 늑대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힐데는 침대로 뛰어올라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렇게 2. 3초 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처음엔 금빛 머리카락, 그다음엔 하얀 이마, 그 다음엔 옷음기가 담긴 눈이 보인다.

"꼬마 삼촌, 늑대 갔어?"  힐데가 묻는다.
"응, 갔어."

힐데는 내가 늑대 얘기를 좀더 헸으면 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늑대 얘기를 좀더 해줄 거야, 안 해 줄 거야? 안해 주면 내가 숲 속의 큰 늑대를 불러온다."

힐데가 위협했다. 
그렇게 나오면 나는 어느 정도 버티는 체하다가, 힐데가 늑대를 부르면 숨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겁먹은 소리로 이제 늑대가 갔느냐고 묻는다.
지끔까지는 그렇게 해왔는데, 오늘밤은 어쩐지 그러기가 싫었다.
어쩌면 나만큼 큰 아이가, 
그것도 버스가 바로 집 앞에 서는 시내에 살면서 숲 속의 늑대 따위를,
그야 정말 나타난다면 기절해 넘어질 노릇이지만,
어린 조카 앞에서 겁낸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만은 우리의 놀이 규칙을 무시하고 소리쳤다.

"난 늑대 따위는 눈곱만큼도 안 무서워!"
"늑대는 커다란 수건 두 장을 합친 것만큼이나 큰데?"
"그래도 무섭지 않아, 나도 목욕 수건 두 장 합친 것만큼 크니까 말이야.
 이놈의 늑대 나타나기만 하면 불고기감으로 썰어버릴 거야."

네가 무엇 때문에 그런 식으로 대꾸를 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꼬마 삼촌이 어떻게 큰 늑대를 썰어버린다는 거야?"

나는 잠자코 있는 것으로 대꾸를 했다.

"그럼,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면 어떡할 거야?"
"그래도 무섭지 않아."
"내가, 내가 늑대란 늑대는 몽땅 다 불러오면?"
"그럼 다 죽여 버리지."
"세상에 있는 늑대란 늑대는 모두 죽인단 말야?"
"물론이지."
"작은 늑대도? 아주 작은 늑대도 죽일 거야?"
"물론이지"
"작은 늑대도? 아주 작은 늑대도 죽일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 세상 늑대란 늑대는 다 없애버릴 거야"

내 용기를 자랑한다는 것이 그만 너무 잔인한 말까지 하고 말았다.
힐데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까닭을 물었다.

"아니, 힐데! 왜 우는 거지?"
"삼촌이 작은 새끼 늑대까지 죽인다고 했잖아. 가엾고 귀여운 새끼늑대를 왜 죽인다는 거야?"
"가엾고 귀여운 새끼 늑대라고 하진 않았잖아."
"아무튼 삼촌은 아주아주 조그맣고 귀여운 새끼늑대도 죽인댔어!"

힐데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꼬마 삼촌은 나빠!"

결국 나는 작고 귀여운 새끼늑대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야만 했다.
비로소 힐데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교활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며 말했다.

"만약 삼촌이 늑대 얘기를 더 해주지 않으면 새끼늑대를 죄다 부를 거야"

어쩔 수 없이 나는 힐데의 뜻대로 늑대 얘기를 다시 해야만 했다.
하지만 힐데는 내가 늑대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창가에 얼마 동안 더 기대서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서로 무섭지 않다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이 글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역자 - 이인환 
성심도서 - 1991. 11. 01. 

[t-07.05.16.  20210509-1740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