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혜정 - 친정엄마」
여는 글
'아들네 집에 가서는 앉아서 밥상을 받고
딸네 집에 가서는 손수 밥상을 차려 딸 앞에 대령한다'라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딸네 집에 놀러 와서도 이불빨래며, 대청소에 쉴 새 없이 바쁜 친정엄마.
친정엄마는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식탁의자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주방 싱크대 앞에서 물 말아 밥 한술 후루룩 드시고 다시 걸레를 드십니다.
친정엄마 눈에는 늘 애기 같던 딸이
시집가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것이 항상 안쓰럽기만 하답니다.
이렇게 떠나 보낼 딸,
품 안에 있을 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답니다.
첫아이를 낳던 날,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 엄마도 나 낳을 때 이렇게 고생하셨겠구나!'
그리고 애를 키우면서
조금씩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어 혼자 눈시울을 적신 적도 많았습니다.
시집간 딸들에게 친정엄마만큼 애틋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소중하고 소중한 친정 엄마에게 그 마음 표현 한번 속 시원하게 해본 딸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딸과 친정 엄마는 말하지 않아도 그저 마음으로 다 안답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서로에게 미안해서 운답니다.
그게 딸과 친정엄마입니다.
- 불볕 더위 속에서, 고혜정.
우리 엄마가 사는 이유
얼마 전 인기 개그우먼이 남편의 상습적인 폭행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이혼소송을 낸 기사를 봤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매 맞는 아내, 매 맞는 아내'하고 말들 하지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그 공포를 모를 것이다.
우리 엄마도 매 맞는 아내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끔찍할 정도로 잘했지만, 화가 나면 그렇게 엄마를 때렸다.
평소에 금실이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화만 나면 엄마를 때리는 걸로 화풀이 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엄마가 맞으면서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것이다.
왜 때리느냐고 대들거나 도망쳐야 하는데 꼼짝도 않고 그 매를 소리 죽여 울며 다 맞았다.
엄마가 반향을 하거나 소리를 냈더라면 누군가 와서 말려 주었을 테고
우리도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철없을 땐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거나 이웃집으로 도망치고는 했는데,
좀 더 머리가 크고 보니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중학생쯤 되었을까.
생각하면 참 코미디처럼 웃기는 일인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날도 아버지는 엄마를 때렸고 우리는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소리 없이 맞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아버지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애들 배고프겠소, 밥 좀 챙겨주고 합시다."
그러자 아버지도 순순히 엄마의 말을 따랐다.
엄마는 기다시피 부엌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밥상을 차려서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어서 먹으라고 하고는 다시 아까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때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진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울면서 그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으면 제대로 된 한편의 코미디가 됐을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그 상황에서....,
순간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엄마와 아버지를 향해 밥상을 냅다 엎어버렸다.
그리고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죽여, 죽여, 아예 죽이라고!
그렇게 엄마 골병들어서 죽게 하지 말고 한 번에 죽여,
제발...., 엄마도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죽어, 제발, 엄마 죽어!"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뒈지게 맞고 기절했을까?
아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엄마를 그렇게 때리면서도 자식들한테는 손찌검 한 번 안 하고 키웠다.
가끔 엄마를 때릴 때 외에는 너무 좋은 가장이고 아버지였다.
주변에서도 호인이라며 참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그런데 왜 유독 엄마한테만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또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이유는 늘 하찮은 것이었다.
방에서는 엄마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남동생들은 어디서 뭘 하며 놀았는지 숯검댕이 가 되어서 마루 끝에 쪼르르 앉아 있다가
나를 보더니 삐죽삐죽 울기 시작했다.
그 동생들을 데리고 마루 끝에 앉아 나도 덩달아 울었다.
사는 게 싫었고, 내 처지가 너무 서러웠다.
내가 여자인 것도 싫었다.
여자는 왜 저렇게 남자에게 맞으면서도 참고 살아야 하나 싶고,
우리 집은 왜 늘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그렇게 앉아서 내 설음에 겨워 꺼이꺼이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방의 뒷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울음을 멈추고 방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동안 방 안은 조용한 걸 보니 아버지는 자리를 펴고 누운 모양이었다.
엄마를 때리는 걸로 화풀이를 하고 난 아버지는 늘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자는 척하려고.
우리 4남매는 살금살금 뒤꼍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입술이 터져 멍이 들고, 얼굴이 퉁퉁 부은 엄마가 훌쩍이며 쌀을 씻고 있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고개를 외로 꼰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엄마가 쌀 씻던 손을 멈추고 우리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막내 동생은 얼른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고 다른 동생들도 천천히 다가갔지만,
나는 그냥 서서 엄마를 쏘아보았다.
바보 같은 엄마가 너무 싫어서,
엄마가 동생들을 안고 소리 죽여 울며 '나는 괜찮다'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쏘아보던 눈빛을 거두고 살며시 엄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배고프지? 얼른 밥 히서 먹자."
"엄마, 아버지랑 살지 마. 잘못도 없는 엄마를 맨날 때리잖아."
"아버지랑 안 살았으면 좋겄냐?
"이혼해, 아니면 서울로 도망가서 식모살이라도 허든지, 왜 맨날 이렇게 맞고 살어?"
그러자 엄마는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 안 히 봤겠냐?
이렇게 짐승같이 사느니 차라리 죽을라고도 생각히보고,
어디 가믄 이 목구멍 하나 풀칠 못 허겄냐 싶어서 도망갈라고도 생각히봤다."
"근디 왜 못 혀?"
엄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너 땜시.... 너 땜시 이러고 산다."
"왜? 왜 나 땜시?"
“내가 없으믄 니가 고생이여.
엄마가 허던 일 니가 다 히야 헐 것 아녀?
밥 허고, 빨래허고, 동생들 치닥꺼리허고….
학교도 지대로 갈랑가도 모르고….
나 고생 안 헐라고 내 새끼 똥구덩이에 밀어 넣겄냐?
나 없어지믄 니 인생 불 보듯 뻔 헌디 우리 새끼 인생 조져버리는 일을 내가 왜 혀.
나 하나 참으믄 될 것을… "
나는 그렇게 맞으면서도 참고 사는 엄마가 바보 같고 싫었는데 그게 다 나 때문이라고 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집안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의 속 깊은 사랑을 모르고 나는 엄마를 바보라고만 생각했다.
맞으면서도 찍소리도 못하고 사는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도 했는데,
엄마는 길고 넓게 딸의 인생과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어렸지만 엄마의 고백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인생을 포기하고 모진 매를 견디며 산다는 게,
아마, 난 그때부터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진 것 같다.
절대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내가 잘 돼서 엄마의 이런 희생이 절대 헛일이 되지 않게 하겠다고 그때 결심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나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은 절대 없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엄마 주위 분들이 그런단다.
"자네 딸 덕봐서 좋겠네. 세상에 이 집 딸 같은 딸은 없어."
정말 내가 엄마한테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딸이라면 그건 100퍼센트 엄마의 희생 덕분이다.
난 지금도 주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난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인생이 웃겼을 거야."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대단한 치맛바람으로 나를 잘 키우려고 노력한 줄 알겠지만,
사실 난 엄마의 남다른 희생과 사랑으로 이렇게 살고 있다.
이 세상 부모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자식들은 그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거나 나이 들면서 조금씩 깨닫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먼저 깨달은 것뿐이다.
엄마,
나 맨날 나 잘나서 이렇게 잘 사는 것처럼 잘난 척하지만
사실은 엄마 덕분인 거 다 알고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몰라.
엄마 가슴에 못 박히는 일 안 하고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고 내가 예전에 약속했던 거,
엄마는 너무 어린 딸이 한 소리라 잊었을지 모르지만 난 늘 그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
내가 맨날 엄마 땜에 못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진심 아니야.
그건 정말 진심 아니야.
난, 엄마 땜에 살아.
엄마가 얼마나 나에게 큰 힘인데.
※ 이 글은 <친정엄마>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고혜정 - 친정엄마
함께 - 2004. 08. 07.
[t-07.07.22 20210725-07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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