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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120

마지막 수유 시간 - 최정원 ·「201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마지막 수유 시간조급한 마음으로 벽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상사인 베이비시터 지원센터 실장이 도착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아기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며칠 밤을 꼬박 새우던 일에서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우는 아기를 안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젖병을 치켜세워 눈금을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돌려보는 일도 없었다.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손거울을 집어 얼굴에 비춰보았다.  모처럼 잠을 푹 자서인지 눈 밑의 다크서클도 조금 엷어진 듯 보였다.  지난 밤, 한 두 차례 분유 수유를 하는 일,  두세 번 기저귀를 갈아주고 미지근한 물로 아기의 엉덩이를 닦아주는 일로 조금은 찌뿌드.. 2017. 2. 10.
정혜옥-강 이야기 사람 이야기/4 크렘스 강을 떠나다 정혜옥(데레사) 수필집 - 「강 이야기 사람 이야기」 저만치 크렘스 강이 보인다. 기차는 곧 강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차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덕 위의 수도원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 이쪽과 저쪽에 있는 둥근 수림樹林과 광활한 밀밭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 안녕” 하며 크렘스 강가의 모든 것 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였다. 크렘스 강은 오래 동안 나의 의식 속에서 빛나고 있던 강의 이름이다. 강의 존재를 최초로 알게 된 것은 먼 지난날, 남편으로 부터 받은 편지에서였다 "큰 가방을 들고 크렘스 강을 건너 수도원으로 갔소.” 이런 글이 편지 속에 쓰여 있었다. 수도원을 찾아가는 이유도 적혀 있었다. 수도원장의 배려로 방학 때면 조용한 수도원.. 2015. 11. 22.
수필과 지성 8호-계란의 갈비 「수필과 지성 8호 - 계란의 갈비」 [201018-153324-2] 예상하지 않은 손님들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 속에 아버지도 함께 계신다. 생전 딸네 방문하시기를 북한 방문하는 것처럼 어려워하시던 아버지가 손님들까지 함께 오시는 일이 어떻게 있다는 말인가! 참나. 아는 얼굴을 비롯하여 처음 보는 분도 따라 들어온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무엇으로 대접을 하나 우왕좌왕 마음이 분주해진다. 일단 점심때라 밥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쌀을 씻어 압력솥에 넣고 가스 불을 켠다. 주방을 둘러보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만 마땅한 찬거리 없어 등에 식은땀이 난다. 다리도 천근만근 움직일 생각은 없고 마음은 부글부글 없는 재료를 끓인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 계란을 꺼낸다. 계란찜을 할 요량으로 반으로 갈라 속을.. 2015. 10. 10.
입체적 불일치 ·「2015 경향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입체적 불일치당숙이라는 사람은 세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수의사였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커다란 금고 하나를 남겼다는 것, 허언증이 심한 이복누이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 얼른 오는 게 좋겠구나. 조금 급박한 어조였지만 냉정을 잃지 않은 채로 당숙이 말했다. 더 묻고 싶은 게 있니? 나는 모든 것이 궁금했으나 당숙과 나의 관계를 따져보아 하나를 먼저 물었다. 금고라고요? 그래, 금고. 무슨 금고지요? 무슨 금고긴, 금고가 금고지. 뭐가 들었는지 묻는 거냐? 당연한 말이었다. 연을 끊고 지내던 아버지는 죽었고 누이는 감옥에 들어갔다. 당숙이 말한 세 가지 사실 중에서 나와 유일하게 관련이 생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금고뿐이었다. 마침 잘 말했다. 안 그.. 2015. 2. 22.
이남천-지게와 작대기 「이남천 - 지게와 작대기」 [210204-165426] 나는 지게입니다. 두 팔이 뒤쪽을 향해 쭉 뻗고, 두 다리가 미끈하게 튼튼한 멋스런 지게입니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멋진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아스라하지만, 내 고향은 푸른 숲속이었습니다. 언제나 산꽃들이 만발하고, 새 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숲속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 숲속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낯모르는 사람이 숲속에 나타났습니다. 날이 시퍼런 낫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톱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그전에도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있기에 우리들의 놀라움은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땅속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들은 놀라움 속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 2015. 2. 19.
캐나다 여행기 「전숙 - 캐나다 여행기」 캐나다 여행기 야호!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탈출은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희망의 풍선이 둥둥 떠다닌다. 얼기설기 복잡한 것들을 대강 밀쳐두고 떠나려니 약간 켕기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튼 얼마나 가보고 싶던 나라였던가. 태고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자연경관이며,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정원 중에서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부챠드가든’이며 또한 선진사회복지를 구가하고 있는 나라이니 요람부터 무덤까지 얼마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을지.......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도 달게 고달팠다. 드디어 무공해 청정의 나라라는 캐나다에 발을 디뎠다. 뭐랄까, 아무 물이나 퍼마셔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간을 무작정 거슬러 올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선악과를 따먹는 에덴.. 2014. 9. 21.
유정옥-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시나리오 쓰기 유정옥 -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191221-182105] 신혼 초에 남편은 사업을 했다. 물놀이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물안경, 튜브, 수영판, 보트, 구명조끼)을 제조, 판매하였다. 수입도 하고 수출도 했다. 10개월 내내 쉬지 않고 생산해서 두 달 동안 다 판매하였다. 물건은 한국화학에 속한 대리점에 계약금을 내고 원단을 발주 받고 자가 공장에서 제조하든지 하청을 주어 제조하든지 했다. 우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액을 올리는 매장을 갖고 있었고 생산도 직접 하고 있었다. 남편은 능력있는 사업가로 번창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리점에 다녀온 남편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대리점 사장이 부도를 냈다는 것이다. 그 소식과 함께 우리가 떠맡은 손해는 3억이었다. .. 2013. 12. 8.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성냥팔이 소녀 (단편소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성냥팔이 소녀」 다섯 아이들이 조각 천으로 꽃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 가는 가난한 동네 자그마하고 비좁은 다락은 몹시 추웠습니다. 벽에 생긴 커다란 틈을 지푸라기와 헝겊으로라도 막아 보려고 애썼지만, 매서운 바람은 방 안으로 ‘쌩쌩’ 들어왔습니다. 아이들 중에서도 특히 마음씨가 너그러운 여자아이는 꽃과 성냥을 팔러 시내로 내보내졌습니다. 몹시 추운 섣달그믐 늦은 오후였습니다. 신발이 없어 맨발인 어린 소녀는 살얼음이 낀 거리로 걸어 나갔습니다. 추운 날씨 탓에 거리에는 일찌감치 인적이 끊기고 매서운 겨울바람만이 불고 있았습니다. 눈마저 내려 거리는 온통 하얀빛이었습니다. “성냥 사세요.” 성냥팔이 소녀가 가냘프게 외쳤습니다. 소녀의 맨발은 검붉게 얼어 있었고, 머.. 2010. 4. 21.
유리 나기빈-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부 재(不在.프랑시스 잠) (단행본) 유리 나기빈 - 「기막히게 아름다운 이야기 23가지」 열여덟 살 때, 피에르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을 떠났다. 그가 집을 떠나던 바로 그때, 그의 병든 늙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진, 항아리 속에 꽃힌 공작 깃털, 그리고 폴과 비지니를 본따서 만든 시계가 있는 푸른 방에서 누워 있었다. 뜰의 무화과나무 아래서는 그의 할아버지가 쉬고 있었다. 채마밭에는 그의 약혼녀가 있었고, 장미꽃과 햇살 아래에는 빛나는 배나무들이 있었다. 피에르는 어느 나라로 돈을 벌러 갔다. 그 나라에는 검둥이와 앵무새와 고무와 당밀(糖蜜)과 열병과 뱀들이 있었다. 그는 거기서 30년 동안이나 있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에 되돌아온 바로 그때, 푸른 방은 햐얗게 바래 있었고, 어머니는 하느님 품에서 쉬고 있었고, 아버.. 2009. 12. 24.
100퍼센트의 여자를 - 서른 두 살의 데이 트리퍼 「무라카미 하루키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서른두 살의 데이 트리퍼 내가 서른 둘이고, 그녀는 열 여덟이고.. 이렇게 하면 아무래도 지루한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 서른 둘이고 그녀는 벌써 열 여덟.. 좋아 이거다. 우리는 그저 그런 친구 사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에겐 아내가 있고 그녀에겐 남자 친구가 여섯이나 있다. 그녀는 주말마다 여섯 명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일요일에 나하고 데이트를 한다. 그 이외의 일요일에는 텔레비젼을 본다. 텔레비젼을 볼 때의 그녀는 해마처럼 귀엽다. 그녀는 1963년에 태어났는데, 그 해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그 해에, 나는 처음으로 여자아이에게 데이.. 2009. 12. 5.
미끼와 고삐 - 실험 부부 ·「조선 - 미끼와 고삐」 실험 부부 세상 사람들의 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결혼식이라는 것을 치르기는 하지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한 일 년 실험적으로 살아보고 그 다음의 일은 그 다음에 결정하자고 합의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결혼식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혼 여행같은 것은 스케줄에 없었다. 결혼식에 관해 이것 저것 의논하는 가운데 신혼여행에 관해서도 물론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었다. "신혼여행을 어떻게 한다?" 내가 말을 끄집어내자 미연은 잘라 말했다. "어떡하긴, 생략하는 거죠." "그래도 미안해서 말이야."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우리가 뭐 다른 사람들처럼 정식으로 결혼하는 거유? 한 일 년 살아보고 나서 재계약을 맺을 건가 말 건가 결정하기로 한 실험 부부잖아요?" "젠장맞을, 그렇지 참." 그런.. 2008. 12. 22.
창작 수필-콩 밭에서(정혜옥) 창작 수필 - 「겨울호 통권 42호」 크렘스 강을 건너가자 이내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들 가운데 좁은 길이 뻗어있고 그 길은 멀리 산 밑에 있는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지금 우리는 오후의 산책을 산책을 나온 길이다. 시간에 얽매임 없이 강물과 들판과 수림(樹林)을 찾아 이리저리 갇고 있다. 우리는 이십여 년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갔었다. 그때, 구라파에 머물던 일년동안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문난 유적지며 서양의 문화를 찾아 바라보고 탐색하느라 매우 분주하였다. 그런 분주함 떼문에 우리의 체류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세상을 다 만나기엔 시간이 모자람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지금, 우리는 매우 한가롭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 지난날에 자주 들렀던 식품가게며 우리의 숙소.. 2008. 12. 14.
문학과지성사-독 짓는 늙은이(황순원) (단편집) 황순원 - 「독 짓는 늙은이」 이년! 이 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 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 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 속에서 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 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 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들이 그냥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잠꼬대에서 송 영감을 깨워 놓았다. 송 영감은 잠들기 전보다 더 머리가 무겁고 언짢았다. 애가 종내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오, 오, 하며 송 .. 2008. 8. 21.
반통의 물 - 내 인생의 가시 반통의 물 - 나희덕 (시인의 첫 산문집) / 창작과 비평사 1999. 11. 15. 제 2부 내 인생의 가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된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한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 2008. 6. 30.
피천득-인연/엄마 피천득 - 「인연」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안고 들어갈 텐데 웬일인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또 숨었구나!' 방문을 열어봐도 엄마가 없었다. '옳지 그럼 다락에 있지' 발판을 갖다 놓고 다락문을 열었으나 엄마는 거기도 없었다. 건넛방까지 가 봐도 없었을 때에는 앞이 아니 보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몇번이나 엄마를 불렀다. 그러나 마루에서 재각대는 시계 소리밖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주춧돌 위에 앉아서 정말 엄마 없는 아이같이 울었다. 그러다가 신발을 벗어서 안고 벽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 나왔었다. 순이한테 끌려다니다가 처음으로 혼자 큰 한길을 걷는 것이 어떻게나 기뻤는지 몰랐었다. 금시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잡화상 유리창도 들여.. 2008. 5. 7.
나의 길 「한국경제 - 2008. 04. 28. 」 나의 길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부여를 잇는 '백제큰길' 이정표 아래로 화물차 한대가 쏜살처럼 지나 멀리 사라진다.화물차 사라진 그 길을 따라 부여로 오다가 문득 '길'의 운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나오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가 차창 밖 봄바람에 흩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간다.유년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는 부모와 함께 커가지만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본격적으로 제 길을 걷는다.누구는 취직을 하고,어떤 이는 유학을 떠나고,더러는 더 많은 세상을 공부하기 위해 백수로 남고….사연도 가지가지다.각자의 길을 가다가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길과 작별한다. 세상은 넓고 길은 많다.어릴적 학.. 2008. 4. 28.
박시호-행복편지/2만 5천원의 우정 박시호 - 「행복편지」 한 친구가 결혼을 했답니다. 결혼식 날에 친구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헌데 그 중 한 친구가 축으금으로 2만 5천원을 냈습니다. 신랑 되는 이가 기분이 언짢아서 그 친구에게 "야~ 임마, 차라리 오질 말든지 2만 5천원이 뭐냐?" 하며 화를 내고 말았고, 그 친구는 고개를 숙이며 피로연에 참석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죠. 신랑은 그뒤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아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마련했답니다. 한데 그 친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답니다. 며칠 후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일하는 곳은 뜻밖에도 초등학교 앞에서 붕어빵을 만들어 팔고 있었지요. 깜짝 놀란 친구가 '여긴 뭐하려 왔어?'하며 반기더랍니다. 어이가 없어서 '아! 어디 가서 소주.. 2008. 2. 28.
정채봉-눈을 감고 보는 길/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정채봉의 에세이 - 「눈을 감고 보는 길」 스님, 하늘빛과 물빛이 시릴 만큼 푸른 가을날의 아침입니다. 이 맑음 속에서 안녕하옵신지요? 지난 여름은 저한테 빈 계절이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들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서늘바람이 겨드랑 밑을 파고들자 불현듯 바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녘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을 해변의 길손이 되어 한 며칠 떠돌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해수욕객들이 떠나 버린 쓸쓸한 해수욕장에 들렀습니다. 한 번쯤 빨래를 했으면 싶은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있자니 모래능선에 빈 목을 내놓고 있는 소주병이 허무한 옛사랑인 양 외로워 보이는군요. 저는 눈을 돌려 좀더 먼.. 2008. 2. 24.
구로야나기 테츠코-창가의 토토/알몸으로 수영해요 구로야나기 테츠코 - 「창가의 토토」 토토에게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난생 처음으로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모두에게 말했다. 1학년인 토토도 물론 상급생들보다 더 높이 깡총거렸다.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수영장에 물을 넣을 생각이다." “와아!”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도모에 학원의 수영장은 대부분의 수영장처럼 사각형이 아니라(땅이 그렇게 생긴 때문이겠지만) 앞쪽이 약간 좁은 보트 모양 같았다. 장소도 바로 교실과 강당 사이에 있었는데, 토토와 아이들은 수업 중에도 궁금해서 몇 번이고 수영장을 보려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물이 채워져 있지 않을 때의 그것은 마치 낙엽 운동장 같았지만, 일단 청소를.. 2008. 2. 16.
· 최순희-캥거루들의 행진 「(단편 소설집)​최순희 - 캥거루들의 행진/캥거루들의 행진 」 [210104-165426-2] 도무지 일어날 기척이 없다. 도대체 큰애는 언제 일어날 건가? “어 당신 요새 성질 참느라고 수고 많네. 내가 그랬으면 천둥 몇 번 쳤을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해. 참느라 사람 죽겠는데!” 5시만 되면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녀로서는 요즘 최대한의 인내로 참고 있다. 아침도 안 먹이고 운동하러 나가기도 그렇고 갑갑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11시, 천 여사는 드디어 자신이 더 지겨워 아들을 깨웠다. 일중이 부스스 눈을 떴다. 헝클어진 머리, 텁수룩한 수염, 움푹 들어간 눈, 꺼칠하게 야윈 얼굴, 야위니 콧대만 얼굴에 서 있는 것 같다. 긴 목에 툭 튀어나온 목울대며 꼴이 말이 아니디. 울화가 치밀다가.. 2008. 2. 13.
문학과지성사-눈길/이청준(3 - 4) 「이청준 전집 13 - 눈길」 3 해가 훨씬 기운 다음에야 콩밭을 가로질러 노인의 집 뒤꼍으로 뜰을 들어서려다 보니, 아내는 결국 반갑지 않은 화제를 벌여 놓고 있었다. “이 나이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을 살겄다고 속없이 새 방 들이고 기와 지붕을 덮자겄냐… 집 욕심 때문이 아니라 나 간 뒷일이 안 놓여 그런다….” 뒤꼍에서 안뜰로 발길을 돌아 나서려는데, 장지문을 반쯤 열어 젖힌 안방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한 봄가을 철이나, 하다못해 마당에 채일(차일)이라도 치고들 지내는 여름철만 되더라도 걱정이 덜하겄다마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나 운 사납게 숨이 딸깍 끊어져 봐라. 단칸방 아랫목에다 내 시신 하나 가득 늘여 놓으면 그 일을 어쩔 것이냐.” 이번에도 또.. 2008. 1. 15.
· 이숙영-애첩기질 본첩기질/고슴도치 사랑 「이숙영 - 애첩기질 본첩기질」 [210120-171137] 옛날 옛 적에 눈이 안 보이는 소년과 귀가 안 들리는 소녀가 있었다. 둘은 서로를 무척 사랑했지만 소년이 사랑한다고 소녀의 귀에 대고 말하면 소녀가 들을 수 없었고, 소녀가 사랑한다고 글로 쓰면 이번에는 소년이 볼 수 없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우리 현실에서도 이런 슬픈 사랑를 하고 있는 남녀가 많을 듯하다. 그것은 도 마찬가지이다. 각각 사나운 맹수에게 쫓긴 암수 고슴도치 둘이 산 속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으스러지게 안고 싶었지만, 안자마자 몸의 가시가 서로를 찔렀다고 한다. 이 가시가 상징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라면 아무리 가시에 찔러 피가 나더라도 그 고통을 감수하며 사랑으로 안을 것 같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2008. 1. 7.
피천득-인연/장미 피천득 - 「인연」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 2008. 1. 6.
미끼와 고삐 - 엉뚱한 여자 ·「조선 - 미끼와 고삐」 엉뚱한 여자 "여보, 인아가 그러는데 나더러 엉뚱한 여자래요." 어느 날 아내가 내 귓가에 대고 불쑥 말했다. 인아란 이제 중학교 이학년이 된 우리들의 장남을 뜻하는데 녀석은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신문을 들여다보다 말고 문득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제 어머니한테 엉뚱한 여자라니, 제 어머니가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질렀길래 그런 고약한 말버릇을 구사했는지 싶었던 것이다. "엉뚱한 여자, 무슨 말인지 몰라요?" "몰라...." 나는 머리를 저었고, 아내는 빙긋 웃은 다음 설명해 주었다. "엉덩이가 뚱뚱한 여자를 줄여서 그렇게 부른대요. 그러면서 제 엄마 보고 엉뚱한 여자라잖아요. 글쎄." "그래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웃지 않을 수 .. 2007. 11. 27.
가리봉 양꼬치 - 박찬순 「조선일보 2006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가리봉 양꼬치」 가리봉 양꼬치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나는 푸르스름한 양념장에 재어둔 양고기 조각을 꼬치에 꿰면서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하고 오른 손 엄지와 검지로 왼손 등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콕 하고 느껴지는 것이 분명 꿈은 아니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는지 주인은 지방에 볼 일을 보러 떠났고,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황갈색으로 구워진 향긋한 양꼬치를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그 신비한 양념 맛에 탄성을 지를 분희의 한국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길 건너 스무 집 쯤 떨어진 대륙(大陸) 다방에서 일하는 분희가 언제쯤 친구들을 데리고 오려나 하고 나는 가게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마주 오는 차 두 대가 겨우 길을 비켜갈 .. 2007. 11. 7.
재연 스님 - 함평댁 ·「재연 스님 - 입산」 탄천 종소리를 멀리 내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일주문 앞에 열 아홉 살을 내려놓고 다시 한 걸음, 마음을 다 하여 마음 없는 곳에 이르기 곳에 이르기 위하여, 거칠 것 없는 대자유를 얻기 위하여, 새벽 공기처럼 싸아한 청년 행자의 상처와 각오가 초발심을 잃고 부유하는 삶의 어깨를 향하여, 때로는 죽비소리처럼, 때로는 새벽 숲을 일깨우는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스며든다. - 책 뒷면 표지에서. 함평댁 후원 한 쪽에서 공양주 보살 함평댁이 울고 있었다. 부목 처사는 홀애비 김 씨가 늦여름 이래 지금까지 해다 주는 나뭇단이 온통 가시투성이란다. 손바닥에 박힌 맹감나무 가시를 뽑아들고 훌쩍거리며 말했다. "썩을 놈에 인간, 그저 오기만 그득해갖고. 시방 내 나이 쉰이 다 되어서.. 2007. 11. 3.
친정엄마 - 엄마와 나의 생일 · 「고혜정 - 친정엄마」 엄마와 나의 생일 엄마의 생신이 돌아오면 늘 우리 가족들은 시골로 향한다. 생신이 겨울방학 기간이어서 부담도 없고 움직이기가 좋다. 그런데 폼 나게 엄마 생신을 축하하러 가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엄마를 힘들게만 하고 온다. "엄마는 현금을 더 좋아하지?" 하고는 잘난 봉투 하나 내밀어놓고 그때부터 며칠간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꼼짝하지 않고 뜨뜻한 온돌방에서 뒹굴뒹굴한다. 엄마는 그 잘난 봉투 하나를 생일 선물로 받고, 딸, 사위, 외손주들의 수발을 죽어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생일날 아침에도 누가 생일상을 차려주기는 커녕 당신 손으로 준비해 자식들 깨워서 먹이고 당신도 미역국에 한술 말아 들었다. 그게 미안해서 남편이 한마디 하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2007. 10. 30.
어린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 「한상복. 전지은 - 어린이를 위한 배려」 어린이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마음 시인 김용택 우연한 기회에 『배려』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이런 책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어린이를 위한 배려』가 세상에 나오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배려는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에서 늘 일등만을 강요받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자란 아이는 무조건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고, 내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좁고 차가운 세상에 갇혀 자랍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아끼고 보살필 것이 많다는것을 '배려'를 통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2007. 10. 21.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 21세기에 다시 읽는 칼 마르크스 홍성욱 -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난감해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아 거절했지만, 시간을 두고 꼼꼼이 생각해보니 20대와 30대 초반에 읽은 토마스 쿤, 미셀 푸코,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쿤과 푸코는 내 학문적 탐구에 더 많은 영향을 준 반면, 마르크스는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한 몫을 했다. 사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숨쉬기 위한 공기처럼 우리주변에 산재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비과학적인 닫힌 체계라고 비판했던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도 '현대의 모든 사상가는 비록 이를 느끼지 못할지라도, 마르크스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마르크스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젊은 시절 .. 2007. 10. 20.
구멍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 구멍(장혜련)」 구멍오늘 또 한 개의 구멍을 뚫는다. 살갗을 파고드는 금속성의 차가움.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텅스텐 조각은 눈썹 위에서 반짝인다. 언제나 이곳에 달고 싶었다. 드디어 뚫었다는 희열감에 녀석의 이름까지 날려 버린다.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지만 이 정도 위치쯤에는 뚫어 줘야지. 눈썹 위에 작은 구멍만을 남긴 채 H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얼음을 띄우고 소금을 조금 뿌린 코카콜라를 단 숨에 들이킨다. 언젠가 녀석을 만나면 웃으면서 콜라 한 잔쯤 같이 마실 수 있으리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싸한 액체 속에 묻어 비릿한 것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마른 갈증이 혓바닥에 달라붙는다. 얼음 알갱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J에게 고맙다는 윙크를 해준다.. 2007.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