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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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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수필-콩 밭에서(정혜옥)

by 탄천사랑 2008. 12. 14.

창작 수필 - 「겨울호 통권 42호



크렘스 강을 건너가자 이내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들 가운데 좁은 길이 뻗어있고 그 길은 멀리 산 밑에 있는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지금 우리는 오후의 산책을 산책을 나온 길이다.
시간에 얽매임 없이 강물과 들판과 수림(樹林)을 찾아 이리저리 갇고 있다.

우리는 이십여 년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갔었다.
그때, 구라파에 머물던 일년동안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문난 유적지며 서양의 문화를 찾아 바라보고 탐색하느라 매우 분주하였다.
그런 분주함 떼문에 우리의 체류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고 세상을 다 만나기엔 시간이 모자람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지금, 우리는 매우 한가롭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 지난날에 자주 들렀던 식품가게며
우리의 숙소가 있던 거리에 가서 옛 창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모습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보팁 성당의 돌층계에 앉아 보리수나무와 성당의 종루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새떼들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젊은 시절,
남편이 유학했던 대학에 다시 가서 목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도 하고,
도나우 강가에서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는 젊은 연인들을 부러워하며 쳐다보기도 했다.

삼개월 간의 일정으로 여행길에 오를 때 나는 사람들에게
"이제 할 일이 없어 다른 나라 땅을 어슬렁거리러 간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그 어슬렁거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다.

며칠 전에 이 산골마을을 찾아 왔다.
간이역마다 정차하는 시골 기차를 타고 왔다.
이 마을은 천이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읍으로 아침저녁 울리는 수도원의 종소리와 소박한 농가의 모습,

크렘스 강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 크렘스 뮌스타 수도원은 남편의 유학시절 ,
방학 때마다 찾아와 휴가를 보냈던 곳으로 지금도 이 수도원에는 알벨또, 앙드레, 야콥스 등,
남편의 옛 지인(知人)인 수도사들이 살고 있다.

이제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넓은 초원은 대부분 밭이 되어있었다.
우리나라의 유채꽃 같기도 한 밭도 보이고 밀밭도 보인다.
이미 알이 영근 옥수수 밭도 있다.

어떤 부부가 옥수수 밭 사잇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얼굴이 마주쳤다.
어딘가 낯이 익다. 그들도 엣 기억을 찾아낸 듯
"아우그스틴, 테레시아." 하며 우리의 세례명을 불려준다. 홀징거 부부였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지난날, 우리는 자주 그들 집에 초대되어 갔었고 짧은 여행을 함께 다니기도 했었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이며 자식들의 소식을 물었다.
그 부인은 손자 손녀를 넷이나 거느린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고 하며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긴다.
그 동작이 조금은 쓸쓸하게 보인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곧 우리에게 초대의 약속을 했다.

나는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는 일상의 모든 짐을 벗어버린 나이가 되었구나 하며
그들 어깨너머에 펼쳐져 있는 해 질 녘 노을을 잠시 바라보았다.

옥수수 밭을 지나자 다른 밭이 나타났다.  콩 밭이었다.
"여기 콩밭이 있네.
  익은 콩이 조롱조롱 달려있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콩밭으로 다가서는 나를 보고
농부인 듯한 남자가 이 열매는 동물의 사료로 쓰인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콩으로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마음속으로
'그래 콩이나 채소 대신 치즈나 버터, 고기만 먹어대니까 그렇게 살이 찌지' 하고 속으로 웃었다.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길옆으로 수림이 나타나고 그 나무들 속에서 라일락이며 상수리나무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일부러 라일락이라는 서양 이름 대신 수수꽃다리 나무라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고
상수리나무에게도 도토리나무, 굴밤 나무 하며 우리의 이름들을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돌아오는 길,
다시 콩 밭 곁을 지나오게 되었다.
아까 보이던 농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콩 밭 앞에 주저앉았다.
아픈 다리를 쉬어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콩 한 움큼을 훔쳐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물이 먹어댈 콩 한 주먹을 훔쳤다고 해서 죄가 될 것 갔지는 않았다.
후드득 콩 꼬투리를 훑어 치마폭에 담았다.
그리고 콩을 까기 시작했다.

다글다글한 콩알이 구슬 같았다.
나는 콩을 까면서 우리나라 어느 들판에도 있는 콩 밭도 떠올리고 '콩 밭매는 저 아낙 내야.' 하는 유행가 구절도,
'콩, 팥, 열무 사이소' 소리치던 시장의 채소장수 아낙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산골마을,
그 두메골 콩밭에서 킥킥거리며 뽑아온 푸른 콩으로 콩서리를 해 먹던 그 즐거웠던 시절도 떠올랐다.

 

갑자기 콩으로 만든 우리나라의 음식들, 콩 두부, 콩비지, 콩나물, 콩국수 등의 음식 맛이 생각나고
그런 음식 맛을 잃어버린 채 서양의 땅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나는 훔친 콩 한 줌을 쥐고 콩 밭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 콩을 우리의 임시 거처가 있는 비엔나로 갖고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서양 부엌에서 콩 한 줌 얹어 콩밥 한 번 지어볼 작정이다.

그 고소한 콩밥의 맛 때문인지  그 날밤 꿈속에 우리의 콩 밭 한 뙈기가 나타났고
나는 그 콩 밭에서 호미로 김을 매며 긴 밭이랑을 따라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할 일이 없어진 나에게 새로 맡겨진 그 소임을 나는 기뻐하며 실천할지도 모르겠다. (p9)
이 글은 <창작 수필 중에서>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글 - 정혜옥
편집부 - 창작수필 겨울호 통권 42호
창작수필사 - 2001.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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