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120 내 꿈 내 꿈 박순철 “송 면장, 언제 살구나무골로 들어갈 거야?” “아직 몇 년 남았어. 야, 이런 자리에서는 이름 부르라고 했잖아.” “그래도 지엄하신 면장님의 존함을 감히........” “알았어, 그러면 너희 동네 농로 포장사업비 취소시킨다.” “아, 아니야, 성질은 여전하군. 하 하 하” “하 하 하” 고향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다. 친구들은 사석에서도 나를 면장이라 부르는데 정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 듣기 싫다. 여러 모임 중에서도 나는 이 모임을 제일 좋아한다. 다른 모임에선 술이 취하지 않아도 이 모임에선 술이 취해서 돌아간다. “집은 언제 지을 건데?”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지을까 생각 중이야” “춘규도 살구나무골에 집짓기로 했다며?” “그래, 혼자 살다가 밤에 돼지.. 2024. 6. 10. 초콜릿 우체국 - 초콜릿 우체국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 겨울 05 - 초콜릿 우체국 어느 날 골목길을 돌았는데 그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가게 하나가 나타났다. 작은 쇼윈도 안에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콜릿 가게인 듯했다. 쇼윈도 옆에는 오렌지 빛깔의 작은 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문에는 우체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은 우체국인지도 모른다. 우체국에서 왜 쇼윈도를 만들고 거기에 초콜릿 같은 것을 전시해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골목에, 지금까지 없었던, 초콜릿 가게 같기도 하고 우체국 같기도 한 것이 나타난 것은 그해 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칭칭 동여맨 채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걷고 있었다. 저게 뭐지, 초콜릿 가게인가 우체국인가,.. 2024. 5. 13. 황순원 - 별 ·「황순원 - 별 1942. 02.」 동네 애들과 노는 아이를 한동네 과수 노파가 보고, 같이 저자에라도 다녀오는 듯한 젊은 여인에게 무심코, "쟈 동복 누이가 꼭 죽은 쟈 오마니 닮았디 왜." 한 말을 얼김에 듣자 아이는 동무들과 놀던 것도 잊어버리고 일어섰다. 아이는 얼핏 누이의 얼굴을 생각해 내려 하였으나 암만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뛰면서 아이는 저도 모르게, 오마니 오마니, 수없이 외었다. 집 뜰에서 이복동생을 업고 있는 누이를 발견하고 달려가 얼굴부터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엷은 입술이 지나치게 큰 데 비겨 눈은 짭짭하니 작고, 그 눈이 또 늘 몽롱히 흐려 있는 누이의 얼굴. 아홉 살 난 아이의 눈은 벌써 누이의 그런 얼굴 속에서 기억에는 없으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그려 오던 돌아간 어머니의.. 2024. 4. 18. 행복을 향한 의지 ·「토마스 만 - 행복을 향한 의지」 행복을 향한 의지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파울로는 성장을 해서 화가가 되었지만 역시 건강은 좋지 못하다. 청년이 된 그는 남작의 딸 아다와 사랑에 빠졌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녀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멀리 여행을 떠 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딸이 파울로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자 결국 그녀의 부모는 결혼을 허락하고, 병약한 몸으로 행복을 향한 의지 하나만으로 꿋꿋하게 버티던 파울로는 결혼하던 날 밤에 죽고 만다. 행복을 향한 의지가 채워 지자마자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남아메리카에서 농장을 경영하여 돈을 좀 벌어들인 늙은 호프만은 그곳에서 가문이 좋은 여인과 결혼한 후 아내를 대리고 자기 고향인 북부 독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가 태어난 거.. 2024. 1. 25.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편지 쓰는 사람들 ·「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편지 쓰는 사람들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라 둥근 초록빛 책상 앞에 앉아 수십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동안 미루어둔 답장을 쓰려니 시간이 걸리지만 각종 편지들을 마주하고 앉으면 이웃과 친지들을 향해 잊고 있던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새록새록 따뜻하게 솟아오릅니다. ‘사람들의 정성에 내가 보답을 못하고 너무 무심했구나’ ‘귀한 선물을 늘 당연한 듯이 받고 제때에 감사 인사도 못했구나’ ‘나의 무관심한 태도에 꽤나 서운했겠구나’ 하는 것을, 회답하기 위해 편지를 다시 읽는 과정에서 깨우치며 거듭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됩니다. 바쁜 생활에 좀체 여유가 없어 글을 쓸 시간이 없거나, 일부러 짬을 내어 짧게나마 편지를 쓰는 일이 번거롭게 생각되더라도, 편지.. 2023. 12. 24.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넓게 더 아름답게 ·「이해인 산문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넓게 더 아름답게 항상 넓고 푸른 바다를 보면서 살다 보니 바다에 대한 시를 많이 읊었지만,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란 구절은 바다를 닮고 싶은 나의 소망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바다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건강을 위한 운동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다의 늘 푸른 한결같음, 파도로 출렁이는 언어, 넓디넓은 시원함을 닮고 싶은 아름다운 갈망도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가장 필요한 것은 원활한 인간관계인데, 때로는 넓은 마음이 부족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남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자기 실속만 차리려는 경향에 빠져드는 자신을 .. 2023. 11. 28. 홈 스위트 홈 (8)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우리가 찾던 집은 야산을 등진 작은 마을의 끄트머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1934년에 건축물대장에 최초로 기록된 집이었다. 마을을 들어설 때부터 느낌이 좋았다. 마을 초입의 오래된 떡갈나무와 그 너머로 펼쳐진 밭, 모퉁이를 돌면 나타나는 초등학교와 마을의 삼거리에 있는 작은 슈퍼도 낯설지 않았다. 문과 창은 파괴되었으며 벽과 지붕은 오래되어 삭았으나 집을 받치는 기둥만큼은 튼튼해 보였다. 본채와 창고가 기역 자 형태로 있어 내가 그린 평면도처럼 개조할 여지도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사오십분 정도 걸으면 서쪽 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보령에서도 멀지 않아 어진이 새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 2023. 5. 13. 홈 스위트 홈(7)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폐가를 고쳐서 살겠다는 내 계획을 들었을 때도 엄마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아픈 사람일수록 생활이 편리하고 큰 병원이 가까이 있는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 병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째서 시골의 다 쓰러져 가는 집에 기어들어 갈 생각을 하는 거냐고, 불길하다고,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매매 가능한 폐가나 주택부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의 지인들은 다시 지인들에게 부탁했다. 같이 폐가를 보러 다니면서도 엄마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아. 집에서 죽고 싶어. 왜 죽을 생각부터 해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2023. 4. 11. 홈 스위트 홈(6)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읍사무소에 미리 연락해서 연결해 둔 수도로 마당에 물을 뿌려 먼지를 잠재웠다. 풀을 다 베어 내고 뿌리까지 뽑아 정리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마를 보고 많이 배웠다. 훤히 드러난 폐가 앞에서 엄마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양한 새소리가 들렸다.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휩쓸리는 소리도, 엄마가 먼저 폐가로 들어섰다. 무너져 가는 집을 살펴보며 엄마의 표정은 점점 심란해졌다. 나는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침실로 만들거야. 이 벽을 이만큼 터서 넓은 창을 냘 거야. 여기까지가 거실이고 저기는 주방으로 쓸 거야. 주방에서 설거지나 요리.. 2023. 4. 11. 홈 스위트 홈(5)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다. 슬픔을 위해서 움직일 힘이라면 아직 남아 있었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3차 재발한다면 화학적 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어진에게 말했다. 어진은 재발할 일 없을 거라고 대답했다. 재발 확률은 70퍼센트. 내가 30퍼센트에 속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는 70퍼센트만큼의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재발 가능성을 먼저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럼 또 치료하면 돼.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이제 항암은 하지 않을 거야. 그건 의사.. 2023. 3. 30. 홈 스위트 홈(4)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수술과 항암 치료 종료 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재발, 그리고 다시 2차 재발, 재발 확률이 높은 병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도 어진도 나도, 불길한 징조를 막으려는 사람들처럼 높은 확률의 재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화하지 않았다. 의사는 3차 재발을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죽음이란 검은 구멍이 한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발 뒤에도, 한발 옆에도, 죽음은 두려웠다.고통에 짓눌릴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통을 대가로 몇 주 혹은 몇 달을 사들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피하려고 하는 것이 고통인지 죽음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거듭되는 치.. 2023. 3. 27.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홈 스위트 홈(3)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실제로 거주한 집은 대략 열 일곱 집, 거주한 적은 없으나 기억하는 집까지 더하면 스무 집. 열일곱 집 중 여덟 집은 내가 미성년이었던 때 부모와 살던 집. 성인이 되어 내 이름으로 계약한 집은 아홉 집. 스무 살 때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대학교 기숙사에서 일 년을 살았다. 두 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이었지만 어쨌든 돈을 지불하고 내 이름으로 빌린 공간이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자주 이사했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창문 없는 고시원,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4.. 2023. 3. 26.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홈 스위트 홈(2)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일하기에 편한 옷과 챙이 넓은 모자를 챙기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서 있었다. 뭐야. 비번 알려 줬잖아.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 그렇게 들어가는 건 경우가 아니지. 남의 집? 너도 앞으로 우리 집 올 때 초인종 눌러. 초인종 달았어? 물어보면서 생각했다. 백자가 없어서 초인종 달았나. 누군가 대문 앞을 서성이는 기척이 있으면 백자는 꼭 서너 번씩 짖었다. 그 소리에 엄마는 재미 삼아 사람 말을 붙이곤 했다. 오지 마. 저리 꺼져. 반가워. 누구야. 어서 오게. 백자는 엄마와 십오 년 가까이 실았고 서너 달을 앓다가 죽었다. 백자가 죽고 몇 주가 지난 뒤에야 엄마는 나.. 2023. 3. 22.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홈 스위트 홈(1) 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평소에는 나무판자로 우물 위를 덮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판자를 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 마당은 흙바닥. 지붕은 검은 기와. 대문은 없었고 외양간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별채를 사이에 두고 마당과 골목을 구분했다. 환하고 건조한 날씨가 오래 지속되는 계절에도 우물의 돌덩이에는 초록색 이끼가 피어 있었다. 그리고 노란 민들레. 댓돌과 흙바닥 틈새에, 벽과 벽의 모서리에 뿌리를 내렸던 별 같은 꽃. 비가 그친 어느 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났다. 당시 두어 살이던 내 손바닥보다 작고 깨끗해 보이던 연두색 생명체. 나는 손을 뻗었고 청개구리.. 2023. 3. 18.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쥐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쥐 * J시 해군 관사 단지는 21층짜리 아파트 총 열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중앙에 서 있는 영관급 관사 101동을 위관급 관사 열 동이 감싸 안은 모양으로, 학익진을 연상케 했다. 영관급 관사 거실에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지만, 위관급 관사에서는 영관급 관사의 뒤통수에 가려 3분의 2쯤 조각난 바다만 보였다. 거기다 위관급 관사는 뒤편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일 년 중 절반은 날 선 산바람이 불어들었다. 영관급 관사로 불어오는 바람을 위관급 관사가 온몸으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구월 초가 되면 관사 근처 다이소에는 뽁뽁이와 문틈 막이 테이프가 동이 났다. 뽁뽁이를 구하지 못하면 비닐이라도 구해서 붙여야 겨울을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윤진의 남.. 2023. 1. 11. 정채봉.류시화-작은이야기 2/여인 2대 「정채봉.류시화 - 작은이야기 2」 서울역이다. 연(延)이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도 15분이 남았다. 영하의 추운 날씨다. 마중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기다리는 시선을 외투깃에 묻은 채 빠른 제자리 걸음으로 서로들 초조(焦燥)해한다. 그러나 나는 마치 첫아기를 낳아 가지고 친정을 다니러오는 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뭇 설레고 흐뭇하기만 하다. 추위마저 느낄 수 없는 것은 나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맏딸 연이가, 기한부 '시골유학'을 갔다가 이제 싱싱한 냉이 달래의 내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한부 시골유학, 한 마디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같지만 재작년 봄이었다. 메마른 인정, 각박한 도회지의 생활에 시들어만 가는 연이의 동심에 무엇인가 신선한 것을, 때묻지 않은 시골의 정취를 불어.. 2022. 12. 30. 문장웹진-잃어버린 입(나여경) 「문학광장 2022. 12호 - 잃어버린 입(나여경)」 [221203-161231] “네, 상담원 차성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니, 내가 저번에도 기사 땜에 전화한 적 있거든요, 지금 배달 출발한 지 30분 지났는데 음식이 도착을 안 했대요. 기사는 전화 받지도 않고 고객은 환불해 달라 하고 도대체 기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애써 예의 차리는 척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아, 그렇습니까, 불편하게 해 죄송합니다. 바로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 응대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내 손은 주문번호 검색과 함께 배달 기사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 바빠 죽겠는데! 난 환불 못해 주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세요. 아, 진짜 업체를 바꾸든가 해야지 원... 2022. 12. 4. 곶감과 수필 ·「윤오영 산문선 - 곶감과 수필」 곶감과 수필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柿)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 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 2022. 10. 10. 분홍 주름잎 풀꽃 「광주매일신문 - 2022. 09. 05. 문학마당 」 늦여름 장마로 화단에 수북이 자란 풀들을 뽑다 손톱 밑에 분홍 물이 비쳐, 나뭇잎 사이로 끼어든 햇살을 손차양하고 손가락 끝을 살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보일 둥 말 둥, 손톱 밑에 낀 작은 풀꽃이 아직 숨을 쉬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숨이 멎는 듯 답답하고 안쓰러웠다. 키 큰 나무 밑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잎도 줄기도 꽃도 그저 형체만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닌, 그냥 지나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얘기라고 나를 달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눈물 흘린 세월이 있었을 것이니, 생각 없이 손놀림했던 내가 미웠다. 어디서 날아와 터를 잡았을까. 혹 빗물 타고 왔을까? 밭.. 2022. 9. 6. 우리집 행복 5계명 ·「 최유라 - 저 살림하는 여자예요」 우리 집 행복 5 계명꼬박꼬박 주말마다 성당엘 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안은 하느님을 믿으며 살고 있는 가톨릭 집안이다. 원래 우리 엄마의 고향이 함경남도 덕원(德源)인데 외가댁은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믿음이 강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6.25 때 피난을 내려와 강원도에 정착,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외할머니는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강원도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웬만한 공소가 거의 외할아버지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믿음이 독실하신 분들이었다. 아빠의 집안 또한 강원도에서 일찍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으로 외삼촌 중에는 수사가 되신 분들도 있다.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 2022. 8. 28. 한사람도 없으니 어쩌냐! 「 유정옥 -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우리 부부는 아침 식사 후 동부 간선도로 밑 하천가를 산책한다. 장마 때만 되면 상습적으로 범람 위기에 처하는 월릉교 근방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물이 많지 않은 건천에 가깝다. 군자교 밑에서 의정부 근처까지 주민들을 위한 긴 산책로가 시설되어 있다. 옆에는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 행렬에서 내뿜는 매연이 하천에서는 생활 폐수가 흐르지만 딱히 갈 곳이 없는 서울 시민들은 그런 곳이나마 감지덕지하며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유일하게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이니 다행이다. 우리 부부는 중년의 무거워지는 몸 때문에 운동을 할 마음으로 이곳에 오지만 나에게는 운동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나를 .. 2022. 8. 22.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3) (연작단편소설)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4단락)」 3. 거실에 걸려 있는 부엉이가 네 번을 울었다. 이렇게 긴 밤을 세워 보기는 처음이다. 한 밤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나의 열일곱 해는 얼마나 긴 것인가. 그러나 큰오빠가 셈해 본, 우리 선조 대대로의 세월에 비하면 열일곱 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선조 대대로의 세월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달에서는 머리카락좌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지섭의 책에 의하면 머리카락좌의 성운은 오십억 광년 저쪽에 있다. 오십억 광년에 나의 열입곱해를 대보일 수는 없다. 천년이라고 해야 모래 몇 알이 될지 모른다. 오십억 광년이라면 나에게는 영원이다. 나는 영원을 어떻게 느낄 수 없다. 영원이 죽음과 어떤 관련이.. 2022. 8. 9.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2) (단편 난장이 연작소설 4 단락)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2 나는 방죽가 풀숲에 엎드려 있었다. 온몸이 이슬에 젖어 축축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잡초에 맺힌 이슬방울이 나의 몸에 떨어졌다. 한밤을 나는 방죽가 풀숲에 엎드려 세웠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둠이 조금씩 뒷걸음쳐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을 우리의 집에서 보내지 못했다는 아픔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동네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들이 영희를 태워갔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얘들아!” 어머니가 말했다. “이러고만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 “찾아 봐도 없는 걸 어떻게 해요?” 내가 말했다. 나는 헐려.. 2022. 8. 8.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 (단편연작소설 제4편)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어머니․영호․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 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2022. 8. 7. 유용주-그러나 나는 살아 가리라/먼 바다에서 온 물봉선 (산문집) 유용주 - 「그러나 나는 살아 가리라」 그 눈길을 따라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풀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편으로만 젖어가던 날이 있었다. 박남준을 떠올리면 우선 눈물부터 난다. 눈물 속에서도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은 자기 식대로 슬품을 해석하고 자기 설음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언제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던가. 남들이 다겪어온 평범한 삶을 살아내면서도 내 고통이 더 크고 힘들었다고 엄살을 떨고 과장스런 몸짓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불평을 했던 게 사실이다. 박남준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두 마디 풍경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다리골의 우리 집과 1985년도에 행방 불명된 작은형이 그 그림이다. 처음 박남준이 사는 모악산방을.. 2022. 7. 31. 슈테판 슬루페츠키 -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슈테판 슬루페츠키 -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목을 길게 앞으로 빼고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잘 안 보이는 작은 눈이지만, 깜짝이며 뭔가를 보려고 애쎴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적,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둠 속에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다섯 개, 열 개,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빛들이 마치 목거리에 꿴 잔주처럼 하늘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태양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두더지의 잿빛 피부 위로 상상할 수도 없는 빛이 춤을 추며 쑫아져 내렸습니다. 풍요로운 빛의 잔치! 이렇게 놀라운 데가! 순간 두더지는 몸 안에서 불끈 솟구치는 힘을 느꼈습니다. 신기하고 강력한 힘이 그를 몰아대며 저 빛의 향연을 따라가라고 명령하는 듯했습.. 2022. 6. 18. 수재너 케이슨-Girl, interrupted/처음 만나는 자유 「수재너 케이슨 - Girl, interrupted」 정신이 건강한 상태가 주는 큰 기쁨 가운데 하나는 내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그때 소녀의 갈색 눈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한 소녀가 살찐 음악 선생을 무시하며 액자 바깥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선생의 손은 소녀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놓여 있었다. 겨울 햇빛은 흐렸지만 소녀의 얼굴은 밝았다. 나는 소녀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 보면서 뒷걸음질쳤다. 소녀는 나에게 무언가를 경고했다. 소녀는 나에게 무언가를 경고하고 싶은듯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안돼!'하고 말하기 위해 숨을 살짝 들어마신 듯 보였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소녀가 전해주는 절박한 분위기에서 벗어니려 했다.. 2022. 6. 9. 권정생-강아지똥 권정생 - 「강아지똥」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 흰둥이는 아직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강아지 똥이 되겠습니다. 골목길 담 밑 구석자리였습니다. 바로 앞으로 소달구지 바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추운 겨울,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이어서 모락모락 오르던 김이 금방 식어 버렸습니다. 강아지똥은 오들오들 추워집니다.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강아지똥 곁에 앉더니 주둥이로 콕! 쪼아 보고, 퉤퉤 침을 뱉고는, "똥 똥 똥 ······ 에그 더러워!" 쫑알거리며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강아지똥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똥이라니? 그리고 더럽다니?" 무척 속상합니다. 참새가 날아간 쪽을 보고 눈을 힘껏 흘겨 줍니다. 밉고 밉고 또 밉습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강아지똥이 그렇게.. 2022. 6. 8. 별리 이숙영 - 「광기로 혹은 향기로」 별리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해가 바뀌었다.1993년. 우리나라 풍속화가 담겨 있는 달력은 안방 경대 옆에, 세계 여러 나라 풍경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은 거실 소파 위에 각각 걸었다. 그 이전 해 겨울은 선거로 시끌시끌했었다.대선 결과는 ..., 민자당의 김영삼 씨의 승리로 귀결되었다.신문에는 새 당선자를 보필할 준비 위원회가 발족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고, 본인의 전공 분야인 경제와 함께 정치 동향에도 관심이 많은 그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면 신문을 정독하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인사 난과 부음 난에 관심이 많은 남자의 모습을 보면 우리 여자들 하고는 세포 구조가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친구나 선후배 중에는 관료 쪽으.. 2022. 6. 7. 이향아-이별을 위하여 해후를 위하여/가난한 날의 표상 이향아 - 「이별을 위하여 해후를 위하여」 며칠 전 장농을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결혼반지를 보았다.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으레 그래야 되는 줄 알고 끼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거추장스러워서 장농 속에 처박아 두다시피한 결혼반지. 나는 이것을 대할 때마다 그 무렵의 내 갈등과 고통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내가 결혼할 당시 신랑과 나, 우리는 똑같이 가난했었다. 사실 혼기에 처한 젊은 남녀들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혹은 병역 의무를 필하고 일자리를 물색 중이거나 이제 막 취직한 사회의 후렛쉬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는 특별히 더 가난했었다. 신랑은 당시 꽤나 늦게 입대하여 육군 졸병으로 있다가 갓 제대하여 이렇다고 내놓을 만한 명함이.. 2022. 6. 3.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