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단편글(수필.단편.공모.

문장웹진-잃어버린 입(나여경)

by 탄천사랑 2022. 12. 4.

「문학광장 2022. 12호 - 잃어버린 입(나여경)」

[221203-161231]

 


“네, 상담원 차성태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니, 내가 저번에도 기사 땜에 전화한 적 있거든요, 
 지금 배달 출발한 지 30분 지났는데 음식이 도착을 안 했대요. 
 기사는 전화 받지도 않고 고객은 환불해 달라 하고 도대체 기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애써 예의 차리는 척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아, 그렇습니까, 
 불편하게 해 죄송합니다. 
 바로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

응대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내 손은 주문번호 검색과 함께 배달 기사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 바빠 죽겠는데! 
 난 환불 못해 주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세요. 
 아, 진짜 업체를 바꾸든가 해야지 원.”
“고객님 죄송…….”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긴다.
“하아, 씨바…….”

한숨과 함께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입 모양만 내는 소리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하고 싶지만, 
뚝 하고 끊기는 통화 종료음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욕을 하게 된다. 
이쪽으로 전화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지 모르겠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말하는 중간에 전화를 끊는 경우는 더 최악이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내 인내의 끈도 끊어지는 것 같다. 
이 계통에 발 들인 지 3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그러고 보면 내 멘탈이 약한 게 확실하다.  

나는 깊게 숨을 쉰 후 훅 뱉어낸다. 
체한 것처럼 쌓인 무언가 툭 튀어나온 듯 조금은 후련해진 느낌이다. 
문제의 배달원에게 문자를 넣은 후 고개 돌려 실내를 휘둘러본다. 
열 개의 책상이 종과 횡으로 늘어서 있다. 
백 개의 책상이 있지만 근무자는 52명이다. 
이곳은 일 년 내내 상담원을 모집하고 있다. 
모자라는 인원과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52명이 근무하는 사무실 안은 막 부화한 병아리가 종알거리는 것 같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52명의 상담원은 하나같이 어깨가 축 처져 있다. 
벗어버린 실내화는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고 등은 굽었다. 
중간에 앉은 상담원 하나가 기지개를 켜며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순간 나는 흠칫 놀란다. 
무표정한 그녀 얼굴에 입이 없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 죄송 죄송 죄송 죄송, 하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린다. 
나는 놀라 허공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52개의 입이 공중에서 저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있다.

나는 가끔 이런 착각에 빠진다. 
수많은 입이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그 입이 하는 소리는 정해져 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고객과 배달업체를 연결해 주는 이곳 ‘스피드 원’은 상담직원만 200명이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친절을 최고의 모토로 삼고 있는 이곳에서는 절대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누가 어떤 말로 비위를 건드려도 무조건 죄송합니다로 응대해야 한다. 
가끔 씨바 뭐가 그렇게 죄송하고 미안한데, 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지만, 
입 밖에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게 이곳의 룰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감정 없는 기계 인간이 돼 가는 것 같다. 
입력어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고객의 화난 음성이나 차분하지 않은 말을 들으면 
언어중추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안에 저장된 말이 튀어나온다. 
네네 고객님 죄송합니다,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얼굴 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거래하는 게 천만다행이다.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는 입술만 허공에 둥둥 띄워 놓으면 그뿐이다. 
표정이 어떻든 상관할 바 아니다.

업체와 배달 기사를 연결하는 전화를 다섯 번 받을 때까지 문자를 넣은 배달원에게서는 아직 답이 없다. 
이럴 때는 배달 전담팀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

문제의 배달원을 전달팀으로 넘기고 나자 하나둘 교대 조가 출근하기 시작한다. 
업무를 마친 상담원들은 직원 휴게실로 향한다. 
모두 스트레스 충만한 오후다.


“우리도 초정 닭갈비 가서 진상 함 부릴까?”
“이번엔 또 뭔 지랄을 했는데?”

여자 상담원들은 오늘 겪은 진상 고객에 대한 썰을 풀기 바쁘고 
나와 몇 명의 남자 직원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갑자기 여자들의 목소리가 낮아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낮게 읊조린다. 

“쇠똥구리 떴다.” 쇠똥구리는 우리 조 팀장이다.
“엘사 오셨습니까?”
“아, 네 이성찬 씨,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엘사라는 이름은 그녀 앞에서만 부르는 별명이다. 
아름다운 외모와 차가운 지성을 겸비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는지 
팀장 역시 엘사라는 별명에 만족하는 것 같다. 
엘사를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을 생각해 불러 주는 별명 말고 팀장의 진짜 별명은 쇠똥구리다. 
물론 우리끼리만 통하는 별명이다. 
일하다 보면 누구나 똥을 싸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난 우리의 쇠똥구리는 그 똥을 말끔히 치운다.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그 뒤로 부팀장이 따라온다. 
팀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정해진 딱 그만큼의 일만은 완벽하게 처리하는 그녀는 딱정벌레다. 
아무튼 입을 잃어버린 이들과 곤충이 서식하는 이곳은 친절의 메카다.

“수고 많았지요, 우희진 씨.”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각진 로봇 같은 얼굴의 팀장은 
우리 조원을 비롯해 휴게실에 모인 모두의 이름을 부르며 수고했다는 말을 챙긴다. 
조원이 아닌 전 직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그녀의 능력이다. 
입사 3개월 만에 부팀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5개월 만에 팀장을 맡은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언제 봐도 잘생겼단 말이야, 성태 씨.”

다른 상담원들은 성까지 붙여 부르던 쇠똥구리가 왜 내 이름은 성을 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상담하면서 쌓인 피로에 기분까지 엿같다.  

상담사인 직업 탓인지 나는 전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다들 왜 그리 바쁜지 만날 수가 없다. 
친구 민호도 그렇다. 
모처럼 쉬는 날 보자고 문자 했더니 전화를 해서 헛소리다.

“인간이 외로움을 느끼는 걸 보면 아직 진화가 덜 된 거 아닐까? 
 진화라는 게 쓸데없는 걸 버리면서 좀 더 발전적인 상태로 나가는 거잖아.”
“야, 왜 또 헛소리야, 만나자는데?”
“근데 외로움은 위험 신호야. 
 무리와 떨어져 위험한 상황이니 어서 돌아가! 이런 신호.”

민호 이야기를 들으며 너는 참 삶이 평화로워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야 왜 말이 없어? 
 내게 지금 그런 신호가 왔어. 그래서 파뤼 하려고.”
“무슨 파티? 갑자기?”
“너도 오고 싶으면 오든가.”
“무슨 파티냐니까?”
“아, 그 우수의 마적 있잖아. 
 거기 모여 함 놀려고.”

우수의 마적? 나는 잠시 망설인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데 민호 덕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민호는 대단히 돈 잘 버는 부모를 만난 금수저다. 
대학 때 만난 룸메이트인데 민호 때문에 내 대학 4년이 편했다. 
인심은 광에서 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민호를 보고 알았다. 
배달 음식을 시킬 때나 친구들을 만나 한잔할 때 계산은 항상 민호 몫이었다. 
옷이 몇 벌 없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민호 옷을 빌려 입고 다니기도 했다. 
돈이 많은 민호 부모는 다정하기까지 했다. 
주말이면 쇠고기 장조림이며 값나가고 맛있는 밑반찬은 물론이고 햇반을 몇 박스 들여 주고 갔다. 
민호 어머니는 내게도 항상 친절하게 말을 건넸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 눈빛이 싫었다. 
그 눈은 아이고 이런 불쌍한 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열등감이 빚은 망상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무엇이든 쿨해 보이는 민호의 여유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외로움이나 우울증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여유라고 느껴졌다. 
민호가 말하는 외로움이 그의 겉멋 부리기용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민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닌다고 말했다. 
그땐 스스로 병원을 찾아 우울증 치료를 받고 
그런 상황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는 민호의 솔직함이 멋져 보였다. 
우울증은 삶을 끝장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호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본인과 타인에게 심지어 아들인 나에게까지 솔직하지 못하고 책임감도 없는 찌질한 인간이 나의 아버지였다.  

폭우와 태풍 소식에 연일 매스컴이 떠들썩하다. 
다행히 태풍의 근접지에 비해 피해가 적지만 추적추적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이런 날 스피드 원 상담원들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밖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이 모두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때문이다. 
팀장 말투가 더욱 나긋나긋해지기도 하지만 배달 기사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때라 한껏 예민해지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배달 기사 사고가 접수된다. 
오후가 가까워질수록 상담원들의 목소리가 물기 먹은 종이처럼 가라앉는다. 
나 역시 다른 때에 비해 더욱더 큰 피로감이 몰려온다. 
잠시 몸을 일으켜 사무실 안을 휘둘러본다. 
유리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던 입들도 습기를 잔뜩 머금고 아래로 내려앉을 것 같다. 
점점 내려앉아 사람들의 장화와 구둣발에 짓밟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근접지가 아니라 태풍 피해가 별로 없다고 느낀 건 큰 오산이었다. 
휴식 시간에 잠깐 들여다본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연달아 찍혀 있다. 
재수 없는 인생 별수 있나. 
근무 중인 내게 숱하게 전화를 건 사람은 아버지 유해를 맡긴 납골당 직원이다.  

추모관 앞은 몰려든 유가족들로 난장판이다. 
이틀 동안 쏟아진 폭우로 추모관 지하 납골당이 물에 잠긴 것이었다. 
침수된 납골당은 양수기와 살수차, 소방차까지 동원돼 지하의 물을 빼내고 있다.

“날벼락도 유분수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배수 작업을 지켜보던 우람한 체격의 야전잠바 입은 사내가 소리 지르자 
모여 있던 유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악다구니를 쏟아내고 여자들은 울부짖기 시작한다.  

“아이고, 아이고 엄마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이런 불효가 어딨어, 
 엉! 이런 일이 세상에…… 으흑흑흑.”
“홍수 경보가 내렸으면 재빨리 유골함을 옮겼어야지, 
 물이 지하 천장까지 차올랐는데 도대체 그때까지 뭘 한 거야 엉!”

벽을 치고 우는 남자도 있고 그 와중에 고개 숙이고 기도하는 이도 있다.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연신 소리치며 울던 여자가 급기야 실신하고 만다. 
급히 여자에게로 뛰어가는 구급대원과 가족들 무리 속에 추모관에 직접 들어가 
유골함을 확인하겠다는 유가족이 생기면서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진다. 
위험을 감지한 일부 유가족은 
새벽부터 찾아와 직접 물빼기 작업을 한 후 유골함을 손수 챙겨 나왔다고 한다. 
흙탕물로 뒤덮인 유골함을 닦는 모습을 보고 
직접 들어가 본인들도 유골함을 챙겨 나오겠다고 하면서 벌어진 몸싸움이다.

20년 전 지어진 추모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지하 1층 6단 납골단에 납골함 1,500기가 안치돼 있다. 
비용 때문에 지하에 아버지 자리를 잡은 게 화근이었다.

방재 당국은 추모관 지하 1층 환풍기로 배수관 물이 역류하면서 침수되었다고 발표했다. 
배수가 끝난 오후 아버지의 유골함을 수습했다. 
일단은 추모관 4층에 안치하고 화장한 후 다시 재봉안하기로 합의가 끝났다.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가 유골이 된 후에 또다시 물에 잠기게 된 사실이 기막히다.

세상 버리고 싶을 때마다 아들을 업어 본다는 어느 시인 아버지도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나를 업어 보기는커녕 손도 한 번 잡아 준 기억이 없다. 
바다가 왜 푸른색인지, 
오대양 육대주가 무슨 말인지 아버지가 알려줘서 알았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금방 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 느낌이 몰려왔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집으로 물고기를 한 번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낚싯대와 낚시 가방을 들고 나가는 아버지를 보면 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생각했다.

나도 가끔 아버지를 따라 저수지에 갔다. 
집 가까이 그런 저수지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큰 저수지인데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저수지 주변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뿌리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는 낚싯대를 물에 담그고 하염없이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간이 지루했다. 
그래서 여러 번 집과 저수지를 왔다 갔다 했는데 
텅 빈 집보다는 등만 보이고 앉아 있어도 아버지가 있는 저수지가 좋았다. 
나도 아버지 옆에 앉아 나무를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물에 잠긴 뿌리가 썩고, 나무가 죽으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은 출근 전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기분이 약간 업돼 있다. 
조깅으로 몸을 풀었고 민호가 말한 파티에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에이 씨팔 못해 먹겠네.”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욕설에 고개를 든다. 
전화 받던 상담원들도 일제히 고개 들고 욕한 사람을 눈으로 찾고 있다.  

“흐휴.” 

내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해한다, 오죽하면 욕을 했겠냐.’

동료로서 내가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나와 대각선으로 앉은 상담원이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다. 
나를 연신 쏘아보던 여자가 휴게실을 손짓한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간다.

“미쳤어?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다들 상담하는데 왜 욕을 하고 난리야?”
“뭐라고요? 
 누가 욕을 했다고 이래요?”
“아니 지금 너 땜에 이 난리가 났는데 발뺌하는 거야? 
 진짜 똘아이네! 
 나랑 통화하던 고객이 그 욕 듣고 뭐라는 줄 알아. 
 거기는 얌전하게 전화 받는 척하고 끊자마자 그런 쌍욕을 하냐며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어. 
 어쩔 건데 응?”

미치고 환장하겠다. 
아,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나!

“왜 자꾸 반말이에요? 
 나 아니라고 했잖…….”

여자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냥 안 넘어갈 거니까, 
너 단단히 각오해 하며 쌩하니 사무실로 들어가 버린다.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사실 파티에 갈 기분은 아니다. 
그런데 민호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저런 신세를 지고 있는 민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말이다.

우수의 마적은 인테리어를 바꿨는지 처음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다소 어두운 실내에 익숙해지자 중앙에 놓인 흰색 그랜드피아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장과 네 면의 벽이 모두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검정이라 느껴질 정도의 어두운 색은 딥그린과 블루 계열이다. 
전체적인 어두운 톤에 비해 붉은 계열의 소파가 포인트 역할을 하고 있다. 
민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는다. 
생각 없이 텅 빈 머릿속에 갑자기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언제나 회사만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진다. 
생각을 떨치기 위해 눈을 뜨고 탁자 위에 놓인 잔에 와인을 붓는다. 
그 순간 안쪽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민호와 무리가 몰려나온다. 
모두 흰색 위주의 옷차림들이다. 
마치 파티 드레스코드가 흰색인 것처럼. 
나와 시선이 마주친 민호에게 눈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한다. 
그러고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중앙으로 향한다. 
무리도 민호 뒤를 따라 이동한다. 
검정 잠바와 바지를 입은 나는 백로들 사이에 낀 한 마리 까마귀 같다.

그들을 따라 움직이려고 일어섰는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본다. 
민호가 피아노 의자에 앉자 어둡던 실내에 조명이 들어온다. 
조명은 흰 셔츠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고 피아노 뚜껑을 여는 민호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여자들이 민호 가까운 테이블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짧은 흰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가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놓친다. 
술이 내 바지에 쏟아지고 와인 잔은 붉은색 소파 위로 떨어진다. 
여자는 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별일 없다는 듯이 민호를 향해 걸어간다.

민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과 내가 몸을 돌려 여자에게로 향한 건 거의 동시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여자 팔을 거칠게 툭툭 친다. 
여자가 뭐야? 하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나를 노려본다.

“사과하세요.”

기막히다는 듯 여자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피식 웃더니 말한다.  

“대체 뭘 사과하라는 거예요?”
“모른 척할 겁니까? 
 아까 내 팔 치면서 와인 잔 떨어뜨렸잖아요.”

내가 와인 쏟아진 바지를 보여주기 위해 다리를 불빛 쪽으로 들어 올렸는데 
이미 바지에 스민 와인 자국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라고 말한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고 불에 데운 자갈을 삼킨 듯 속은 뜨거운데 
웬일인지 몸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덜덜 떨린다.

나는 으으으으…… 소리만 흘리며 몸을 떨고 있다.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쯧쯧쯧 혀를 차더니 몸으로 내 어깨를 밀치며 사라진다.  

“하아, 씨바…….”

여자가 사라지자 참았던 숨과 욕이 터져 나온다. 
멈출 것 같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우수의 마적을 빠져나오는 내내 민호가 치는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내 뒤를 따라온다. 
그 소리를 듣자 급격하게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두세 명이 마주 앉아 식사하는 식당에 들어가기 싫어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분홍색 후드티를 입은 여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다.

“제가 깜빡하고 잊었습니다, 
 손님이 오셔서 계산하느라.”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손님이 다니는 통로에 물건을 그렇게 늘어놔도 돼? 
 너 여기 왜 있는 건데 이런 거 잘 관리하라고 니네 사장이 돈 주는 거 아니냐고 응? 
 너랑은 말이 안 되겠다. 
 사장 불러와.”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금방 진열 끝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와서…….”
“아니 죄송하면 다냐고, 
 다친 피부는 며칠 지나면 더 부어오르는 거 몰라서 이래?”

여자는 물건이 바닥에 널려 있어 피하느라 손을 잘못 짚어 다쳤다고 하는데 
외관상으로 봐서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인다.

“말로만 하지 말고 변상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편의점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실랑이하는 계산대로 향한다. 
파마머리의 비대한 여자는 200ml 우유갑으로 계단대를 툭툭 치면서 고함을 질러댄다.
분홍 후드티가 또다시 말한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에이 씨, 하며 먹던 사발면을 집어던진 건 분홍 후드티의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듣고 난 직후다.  
분홍 후드티와 비대한 여자가 놀라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잠시 후 분홍 후드티가 손걸레와 대걸레를 들고 후다닥 내 쪽으로 뛰어온다.

“손님, 괜찮으세요?”

후드티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말을 한 후 사발면 국물이 튄 식탁과 그 주변을 닦기 시작한다. 
그걸 본 나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 깜짝 놀라 여자의 걸레를 뺏어 들고 닦는다. 
오늘 마가 끼었나, 정말 끝까지 재수 없는 날이다.

“뭐가 그렇게 죄송합니까?”  

편의점 유리문을 열고 나가려던 나는 후드티에게 말한다. 
후드티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참 답답한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밖으로 나오는 나를 향해 후드티가 말한다. 
안녕히 가세요.

퇴근 후 가끔 들러 도시락이나 사발면, 삶은 달걀을 먹는 편의점은 아르바이트생이 자주 바뀌었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애, 
60대 초반 아주머니, 
늙수그레한 아저씨. 
잠깐잠깐 본 얼굴들이다. 
후드티는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오늘 있었던 일을 보니 그녀도 곧 누군가로 교체될 것 같다. 
우리 스피드 원처럼 말이다.

출근하자마자 팀장은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 내용은 별다른 게 없다. 
대충 회의를 끝낸 팀장이 말한다. 
퇴근 후 한잔합시다. 
이 말을 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별 소득 없는 시간이었다.

쇠똥구리 팀장이 욕을 한 사람을 찾아내고 성격 급한 그 상담원과 나를 화해시키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성격 급한 직원은 내게 연신 미소를 짓는다. 
미소 대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족할 텐데 그녀가 보내는 미소가 부담스럽다.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잘 외치던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잊어버린 것일까.

쇠똥구리 눈빛이 끈적인다고 느낀 건 일차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옮긴 노래방에서다. 
사무실에서 열심히 똥을 굴려 모으던 쇠똥구리가 
노래방에서 금발 가발을 눌러쓰고 내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성격 급한 여자를 불러 노래를 시키더니 나에게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사양한다. 
그런 나를 여자 직원들이 쇠똥구리 품에 던져 넣듯 자리에서 몰아낸다. 
팀장은 나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여기저기 무대를 누비고 다닌다. 
마치 똥 덩어리를 굴리는 쇠똥구리처럼. 
여자들은 뭐가 좋은지 괴성을 질러 가며 손뼉을 친다.

상사가 낀 회식 자리는 피곤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더욱 그렇다. 
이런 날은 구질구질하고 비좁은 내 방에 몸을 뉘는 순간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방 하나를 아버지랑 같이 쓰던 어린 시절엔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방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 책상 하나가 고작인 방이 혼자 쓰기에도 너무 좁다.

내 방엔 별 장식이 없지만 유리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액자 안에는 내 얼굴을 그린 종이가 끼워져 있다. 
사진이 몇 장 없는 나의 유일한 유년 모습이다.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다.

나에게 그다지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아버지가 생각나면 집 근처 저수지를 찾아간다. 
아버지와 나의 추억이 깃든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뿌리가 썩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나무는 
여전히 싱싱한 잎 달린 줄기를 물가로 늘어뜨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저수지 주변은 산책하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 
아버지를 따라왔을 때와는 달리 정비가 잘 돼 있다. 
방치하다시피 버려둔 저수지가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고 타 동네에서도 찾는 명소가 된 건 6년 전이었다. 
숲세권 팍세권 스세권 몰세권 등의 용어가 붙은 동네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그에 편승해 조성된 공원이었다.

직선과 곡선 트랙이 깔려 있어 뛰거나 걷기 좋고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도 설치돼 있다. 
곳곳에 심은 나무들도 제법 큰 몸피를 자랑하며 쉼터를 제공했는데, 
나무 주위 곳곳에 벤치가 놓여 가을이면 제법 멋진 풍경이 조성됐다. 
주민들이 자랑하며 아끼는 장소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한동안 저수지를 거치면 빠른 길도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칠 때 한 번씩 들르게 되었고 
스피드 원으로 출근하고부터는 아침마다 운동하기 위해 찾고 있다. 
다른 이들은 직선 코스의 트랙을 돌지만 나는 저수지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느린 달리기를 한다. 
물에 발을 뻗고 있는 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여자를 발견한 건 30분쯤 트랙을 돌고 났을 때다. 
여자는 머리를 높게 묶고 나무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금세 그녀가 누군지 기억해 낸다. 
그녀가 입은 모자 달린 운동복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여자다. 
나는 운동을 멈추고 그녀 옆에 앉는다.

여자는 말없이 저수지의 나무만 쳐다본다. 
아버지가 자주 앉던 자리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는 후드티를 보자 마음이 묘하다.

“이 근처 살아요?”  여자가 고개 돌려 나를 쳐다본다.
“어제 같은 일 많지요?”  여자는 그제야 나를 기억해 냈는지 조그맣게 말한다.
“……네.”
“그 손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디 놀러 간 것도 아니고 진열하다 손님 계산해 주러 간 건데…….”
“손님은 항상 갑이니까요!”
“사람들이 모두 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
“그렇게 죄송하다 죄송하다 하면 계속 그런다니까요. 
 그런 사람은 똑같이 대해 줘야 해요. 
 부당한 일을 당하면 이야기를 하고 잘잘못을 따지세요.”

후드티는 선생에게 꾸중 듣는 학생처럼 내 말을 듣고 있다.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끝까지 내 말을 경청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좋다. 
마치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바위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여자가 나무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차분히 말한다.

“저 나무요.”

나는 여자가 말하는 나무로 시선을 돌린다. 
물속에 뿌리를 담그고 있는 나무는 축축 늘어진 가지를 물가로 향하고 있다.

“저 나무가 왜요?”
“신기해요. 
 나무뿌리가 저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으면 숨을 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나름 호흡할 수 있는 호흡근을 발달시킨 거래요.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기특하지 않아요?”
“호흡근이라고요?”

나는 후드티의 호흡근이라는 말이 무척 신비하고 멋지게 들린다. 
저수지를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다.
오전 상담이 끝나고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핸드폰 벨이 울린다. 
민호다.  

“야, 널 부른 내가 미친놈이지. 
 파티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잠바를 입고 오질 않나…… 
 옷이 없으면 옛날처럼 내 옷 빌려달라고 하지. 
 이제 그런 말 못 하겠디. 
 사람 변하면 죽는 거 몰라. 
 살던 대로 살아.”
“야, 인마 왜 이래?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그날 일이 떠올라 기분이 더러웠지만 화난 민호를 달래기 위해 애써 침착하게 말한다.  

“맘에 드는 애 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 꼴로 대시하면 먹힐 줄 알았냐. 
 걔들이 어떤 집안 애들인 줄 알기나 해. 
 쪽팔린다 새끼야.”
“야 무조건 화만 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듣긴 뭘 들어, 
 새꺄. 진작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긴말 필요 없다 끊자.”
“야, 니 엄마가 무슨 말…….”

오전 상담도 도중에 뚝뚝 전화 끊는 고객 때문에 기분이 엿같았는데 
친구조차 내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왜 다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도 그랬다.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하기야 아버지조차 내 말을 듣지 않았는데 누가 내 말을 귀담아 듣겠는가.

아버지는 가끔 나를 방의 제일 구석으로 보내며 차렷하고 서라 했다. 
그러고는 방바닥에 작은 종이를 펼쳐 놓고 나를 그렸다. 
그렇게 할 때의 아버지 기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나는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차렷하고 가만히 서 있는 내가 우스워서 쿡쿡 웃었지만 
나와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열심히 그림 그리는 아버지를 보니 웃음이 사라졌다. 
최대한 아버지 작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눈을 깜빡이거나 코를 훌쩍이지 않고 서 있는 일이 참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 보람도 없이 완성된 내 모습을 보면 매번 힘이 빠졌다. 
동그란 얼굴에 머리는 삐죽삐죽,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 
일직선으로 그은 콧등과 방울처럼 달린 돼지코, 
이티처럼 볼록 나온 배와 가느다란 팔과 다리.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형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린 그림에는 입이 없었다. 
내가 왜 입이 없냐고 물어도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군것질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그날은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훔쳤다. 
훔친 돈으로 사 먹는 햄버거가 참 맛있었다. 
햄버거를 반쯤 먹고 집으로 오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순간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험상궂은 개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몸집이 그다지 큰 불도그는 아니었는데 
어린 내가 느끼기엔 어마어마하게 무섭고 큰 개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공포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개를 보는 순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내가 달리자 불도그도 뛰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에서 불도그와 나는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력을 다해 달렸다. 
불도그가 점점 나와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느껴지자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조마조마하며 훔친 돈으로 산 햄버거도 다 못 먹고 죽는다, 생각하니 정말 억울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턱까지 숨이 가쁜 그때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햄버거를 팽개치고 두 손으로 돌을 들어올려 불도그를 겨냥했다. 
가까이 다가온 불도그의 얼굴에 거품 섞인 침이 흐르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있는 힘껏 불도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불도그가 컹컹하면서 옆으로 쓰러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나를 덮치면서 다리를 물었다. 
나는 아아악 소리치며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바지에 밴 피를 보자 거의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빨간 슬리퍼 신은 여자가 나타나더니 
“어머 우리 애기 어떡해, 어떡해!” 하며 개를 끌어안고 호들갑을 떨었다.

개 엄마는 나를 노려보며 너네 엄마한테 가자, 어서 앞장서, 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라는 말에 설움이 복받쳐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개 엄마가 계속해서 부모님을 찾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개 엄마는 아픈 다리를 절뚝이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개만 측은한 얼굴로 쳐다보며 쓰다듬었다.  

아버지를 만난 개 엄마는 다짜고짜 우리 애기 어떡할 거냐며 소리쳤다. 
아버지는 여자에게 허리를 굽히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 울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조용히 안 해, 뭘 잘했다고 울어? 하며 내 말을 막았다. 
정말 속이 터지고 아버지가 야속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가 매번 그림에서 내 입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때부터 인생이 막혔던 것 같다. 
내 인생인데 제멋대로 흘러가고 어떻게 잘살지 걱정하는 이들과 달리 
어떻게 살지도 생각하지 못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후 편의점에 들른다. 
이곳을 들락날락하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간대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줄 몰랐다. 
항상 편의점 안 고객 테이블에서 먹던 사발면을 오늘은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다. 
소주를 한잔 마시기 위해서다. 
야외에서 먹는 음식 맛이 훨씬 맛있는 것처럼 술 또한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니 감칠맛이 더해진다.

나는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힐긋힐긋 편의점 안의 여자를 쳐다본다. 
아무리 봐도 후드티는 참 친절하고 착한 여자다. 
손님이 물건을 찾으면 계산대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물건을 찾아 손님에게 대령한다.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잊는 법도 없다.

후드티도 가끔 밖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때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고 그러면 여자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다.

며칠 전 저수지에 조깅을 하러 갔을 때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말한 호흡근을 잘 단련한 믿음직한 나무를 쳐다보며 조깅을 하다 
벤치에 앉아 자전거 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둥글게 둥글게 천천히 돌아가는 그녀의 자전거 바퀴를 보면 여자의 삶이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다.

아침 운동시간에 만나는 여자는 조깅하는 나를 지나쳐 자전거를 타고 그대로 사라지곤 했는데 
가끔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림처럼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은 묘하게 아버지와 닮아 보였다.  

여자의 시선은 물속 나무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여자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렇게 자꾸 사과하니까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하는 거예요. 
 당당하게 대하세요, 당당하게.”

여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하는 게 바로 수긍이라고 생각했다.

편의점 앞이 시끌벅적해진 건 초록머리 여자와 야구모자 눌러쓴 남자 둘이 오고 나서부터다. 
등장부터 요란했다. 
오토바이 한 대를 타고 나타났는데 셋 다 헬멧도 쓰지 않았다. 
그들을 보자 언젠가 밤거리를 질주하는 십대 오토바이족들을 취재한 TV프로가 생각났다. 
헬멧도 안 쓰고 그렇게 오토바이 타면 무섭지 않아요, 라고 묻는 기자 말에 여자애가 당당하게 말했다. 
하나도 안 무서워요, 
죽어도 좋아요.  

그들은 오자마자 편의점 안에 들어가 소주와 맥주를 잔뜩 사서 야외 테이블에 펼친다. 
그들 발아래 금세 찌그러진 맥주 캔, 과자와 안주 봉투들이 쌓인다. 
탁자 위에는 먹다 남은 맥주 캔과 오징어, 참치캔 등의 안줏거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

초록머리가 여러 번 편의점을 들락날락하며 술과 안주를 사 나른다. 
시끄럽게 술을 마시던 그들이 가끔 나를 흘긋 돌아다보며 킥킥거리고 웃는다. 
모처럼 조용히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조용히 술을 마신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무엇인가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들어간 초록머리가 한동안 나오지 않자 
야구모자 중 하나가 일어나 편의점으로 향한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 잠시 후에 열린 문으로 큰 소리가 튀어나온다.

“야 이거 계산 맞아, 
 너 내가 술 취한 거 같지, 그래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아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다시 계산해 보겠습니다.”

계산을 다시 하는지 한동안 조용하더니 잠시 후 후드티가 손님, 제가 한 계산이 맞습니다, 라고 말한다.  

“맞긴 뭐가 맞아 아 씨팔, 
 이게 진짜 날 뭐로 보고, 나 술 안 취했다고!”

야구모자 목소리가 유난히 커서 편의점 밖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뒤이어 무엇인가를 차서 깨뜨렸는지 에잇 씨팔, 하는 욕설과 함께 와장창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개 돌려 계산대 쪽을 바라본다. 
그때 나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내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다.

나는 슬쩍 그녀를 외면하며 고개 돌려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간다.
‘이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면……  좆나 복잡하지.’

나는 모른 척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다가 에이, 씨! 하며 112에 신고 전화를 한다. 
내 전화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사건은 일단락된다.

편의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편의점 문밖에서 잠시 어슬렁거리다 안의 동태를 살핀다. 
여자는 여기저기 날아간 병 조각과 쓰레기를 빗자루로 쓸고 있다. 
나는 편의점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는 모른 척 비질만 계속한다. 
여자는 신고 전화를 한 사람이 나인지 모르는 듯했다. 
나는 여자가 들고 있는 빗자루를 뺏으며 말한다. 

“도와줄게요.”

여자는 내게서 빗자루를 매몰차게 뺏어 청소를 계속한다. 
내가 다시 다가가자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빗자루를 내던진다. 
그러더니 나를 쏘아보며 껌 뱉듯 말한다.

“비겁한 새끼.”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생소한 여자의 표정과 말에 나는 흠칫 놀란다.

밤거리가 이렇게 휘황한지 몰랐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활보하고 있는 이들 속에 뒤섞여 나는 어디론가 밀려가고 있다. 
술에 취해 보는 세상이 새삼 달라 보인다. 
빵빵거리는 차들의 경적,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윙크하듯 깜빡이는 네온사인들. 
왕복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내 몸이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린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오른쪽으로 약간 몸이 기울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눈을 흘기며 몸을 피한다. 
나는 힐끗 여자를 쳐다보고 피식 웃는다. 
여자가 별 미친놈 다 본다는 듯 놀라 황급히 자리를 이동한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활기차 보인다. 
나는 그들을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비틀거리며 느릿느릿 걷는 나를 사람들이 정신 차리라는 듯 툭툭 치며 지나간다. 
그때마다 내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나는 왕복 8차선 도로 중간에 서서 길 잃은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본다. 
가지각색의 승용차 운전자와 버스 안 승객들,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위에 앉은 사람. 
수많은 이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횡단보도 중간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여기저기서 클랙슨이 울린다. 
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창밖으로 고개 내민 택시 기사가 내게 소리친다. 
휘청이는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려는 순간 내 옆으로 클랙슨을 길게 울리며 차들이 씽씽 지나간다. 
창으로 고개 내밀고 소리치는 사람들,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 나도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적색과 녹색 황색 불빛이 점멸하는 신호등, 
휘황한 네온사인과 자동차의 강렬한 빛이 한데 어우러져 빙빙 돌아가는 것 같다. 
점점 졸음이 쏟아지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서 내 방으로 가서 눕고 싶다.


글 - 나여경
출처 -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