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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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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쥐

by 탄천사랑 2023. 1. 11.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J시 해군 관사 단지는 21층짜리 아파트 총 열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중앙에 서 있는 영관급 관사 101동을 위관급 관사 열 동이 감싸 안은 모양으로, 학익진을 연상케 했다. 영관급 관사 거실에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지만, 위관급 관사에서는 영관급 관사의 뒤통수에 가려 3분의 2쯤 조각난 바다만 보였다. 거기다 위관급 관사는 뒤편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일 년 중 절반은 날 선 산바람이 불어들었다. 영관급 관사로 불어오는 바람을 위관급 관사가 온몸으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구월 초가 되면 관사 근처 다이소에는 뽁뽁이와 문틈 막이 테이프가 동이 났다. 뽁뽁이를 구하지 못하면 비닐이라도 구해서 붙여야 겨울을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윤진의 남편은 아이가 뒤집기를 할 무렵 구축함을 타고 바다로 나갔고, 부대로 복귀하지 못한 지 두 달 반째였다. 파병이든 승선이든 부대 남자들이 일 년간 집에 머무는 시간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윤진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배 안에 연결된 전화기로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수신은 불가능하고 발신만 가능한 전화였다. 윤진은 남편에게 먼저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통화가 가능한 시간은 오 분 내외였다. 짧은 통화는 생사를 확인하는 게 전부일 때가 많았다.

영관급 관사 주변에서 위관급 관사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분수대 앞이었다. 관사로 불어오는 바람이 모이는 장소였다. 아파트로 불어든 산바람은 세기를 더해 분수대 주변에 방향 없이 휘몰아쳤다.

오후 네 시가 되면, 분수대 옆 단층 건물 주변으로 관사 여자들이 모였다. 단층 건물에는 관사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어린이집이 자리했다. 아이를 하원시킨 후, 여자들은 하릴없이 분수대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윤진 역시 선, 오와 함께 분수대에서 주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선과 오, 윤진의 남편은 임관 기수가 달랐지만 모두 대위였다. 그중 선의 남편은 윤진의 남편과 같은 구축함을 타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편의 기수를 따진 뒤 서로를 선배님 혹은 후배님이라 칭했다. 기수가 가까울수록 더 철저하게 선후배를 구분했다. 관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일면식조차 없던 세 사람도 기수를 따져 서로를 후배와 선배라 불렀다.

윤진은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관사에 들어왔을 때도, 오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싫었다. 단 한 번도 선배였던 적이 없는 사람을 선배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부당하다고 여겼다. 관사에서 살게 된 지 육 개월쯤 되었을 때, 윤진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를 이름으로 불렀다가 곤욕을 치렀다. 여자의 남편은 윤진의 남편보다 다섯 기수나 높았고, 이를 안 관사 여자들이 윤진의 면전에서 비난을 퍼부었다. 관사에서는 관사의 규칙을 따라야 했고, 따르지 않았을 때는 비난과 따돌림을 감내해야 했다. 윤진은 관사 여자들의 비난을 무시할 만큼의 배짱이 없었다.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호칭만큼은 관대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혼 전, 윤진은 대형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했다. 결혼 후 처음 육 개월은 남편의 근무지 옆 정형외과에서 근무했지만, 남편이 J시로 발령받으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남편은 팔 개월 뒤 P시로, 그로부터 오 개월 뒤에는 G시로 발령받았다. 결혼 기간 중 총 여덟 번이나 이사하면서 윤진에게 남은 건 가끔 얼굴만 보는 남편과 아이 둘뿐이었다. 윤진은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 좌절감마저 잊은 지 오래였다.

다른 관사 여자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오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었고, 선은 대형 병원 수술방 간호사였다. 남편의 잦은 근무지 이동으로 그들은 퇴사를 결심했다. 관사 여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건, 그런 형편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관사에서의 삶이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군에서는 심심할 틈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관사 여자들은 심심찮게 벌어지는 부대 내 폭행이나 부당 진급 폭로 같은 공격적인 기사와 그에 따른 외부의 시선에 의혹을 품지 않았다. 대신 부대 내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믿었다.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유리하면 과장되게 드러내고 불리하면 철저히 소문으로 치부했다. 관사 여자로 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의뭉스러워졌다. 윤진은 그 의뭉스러움을 혐오했다. 마땅히 의심해야 하는 일을 무턱대고 믿어서 정작 밝혀져야 할 사실을 훼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윤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을 부정해서 괜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사 여자들은 가로등이 켜질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되면 분수대 주변에는 바람만 헛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자들은 낮에 오간 풍문에 자신이 말을 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목덜미가 서늘해지곤 했다. 소문을 실은 바람이 단지 밖을 떠돌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품었다. 풍문의 근원지가 되는 것! 그건 관사 여자들에게 언제나 곤란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온 건, 윤진이 유아용 욕조에 묻은 비누 거품을 씻고 있을 즈음이었다. 열흘 만의 통화였다.
“오늘 밤에 부대로 복귀할 거야.” 좋지 않은 통화 음질 사이로 ‘복귀’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복귀? 벌써?”

윤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지직, 소리와 함께 통신이 두절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를 타면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육 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걸 고려하면 지나치게 이른 복귀였다. 복귀가 늦춰지기는 해도 당겨지는 법은 없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윤진은 저녁 반찬으로 김치전을 만들기로 했다. 배에서 복귀하는 날이면 남편은 자주 김치전을 찾곤 했다. 윤진은 냉장고에서 묵은지와 삼겹살을 꺼내 잘게 다졌다. 언제 기어 왔는지, 둘째 아이가 윤진의 발아래에서 스테인리스 볼과 채반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윤진은 싱크대 하단 서랍을 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하단 서랍장에는 부침 가루, 국수, 깨, 소금, 설탕같이 마른 식재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이는 윤진이 허리를 굽힌 틈을 놓치지 않고 윤진의 목을 휘감았다. 윤진은 아이를 등에 매단 채, 힘겹게 싱크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하얀 가루가 공기 중에 풀풀 날렸다. 아이가 허공에 흩날리는 가루를 만지려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부침 가루 봉지를 들어 올리자마자 하얀 가루가 줄줄 샜다. 봉지 모서리는 누군가 이로 집요하게 물어뜯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아무래도 윤진이 보지 못한 사이에 둘째 아이가 봉지를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아이는 재빨리 윤진의 등에서 내려와 서랍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국수 가락과 깨, 설탕이 순식간에 바닥에 쏟아졌다. 아이는 쏟아진 재료 위에 뒹굴면서 손에 집히는 건 닥치는 대로 입에 가져갔다. 윤진은 아이 손에 쥐어진 국수 가락을 억지로 빼앗은 뒤 물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걸레질하면 할수록 쏟아진 재료들이 바닥에 더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아이는 온몸에 설탕과 밀가루를 덕지덕지 묻힌 채 재빠르게 현관문을 향해 기어갔다. 윤진도 한 손에 걸레를 쥐고 아이 뒤를 쫓았다. 인터폰 화면에 낯선 실루엣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윤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답이 없었다. 현관에 자리를 틀고 앉은 아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제지할 틈도 없이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진은 까치발을 하고 슬며시 복도 밖을 살폈다. 엘리베이터는 21층에 멈춰 있었다. 계단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발소리는커녕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윤진은 발바닥을 손으로 여러 번 툭툭 털었다. 아무리 털어도 설탕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저녁 열 시가 넘어서야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재우면서 얕게 잠들었던 윤진은 거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남편은 부엌 등만 켜 놓고 식탁 위에 놓아둔 식은 김치전을 손으로 집어 먹는 중이었다. 군용 더플백은 안방 문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채, 묵은 곰팡내와 땀 냄새를 풍겼다.
“잘 지냈어?”

남편이 손에 번들번들 묻은 기름을 바지에 쓱 닦은 뒤 윤진의 허리를 감쌌다. 남편의 옷섶에 흐른 간장 자국이 눈에 띄었다. 윤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데워 줄게.”

윤진은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김치전을 접시째 전자레인지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남편이 뒤에서 윤진을 안았다. 숨이 막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올 때면, 남편은 마치 윤진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꽉 껴안았다. 윤진은 남편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재가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랐고, 포옹으로 그 믿음을 확인했다.

남편은 꽤 능력 있는 군인이었다. 자신을 귀찮게 하는 상사나 문제를 일으키는 부사관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았다. 한 번씩 볼멘소리하다가도 ‘알고 보면 악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때가 되면 남들보다 수월하게 진급했고, 파병 신청을 하면 항상 원하는 곳에 배치되었다. 애국심이 넘치거나 정의감이 투철하진 않았지만, 애쓰지 않아도 일이 잘 풀렸다. 그는 좋은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이었고, 무엇보다 직장에서 우월한 성과를 보이는 가장이었다.

남편은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동안, 방문을 열고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윤진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이상해.” 윤진이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멍하니 쳐다보며 혼잣말했다.
“뭐가?”
“혹시 당신이었어? 아까 초인종 누른 사람.”
“아니. 난 방금 왔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누구지? 아까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택배 아닐까?”
“그랬다면 문 앞에 물건이 있었겠지. 
 더 이상한 건, 그 짧은 틈에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거야. 
 발소리도 안 나고, 엘리베이터도 안 움직였는데.”
“천장에 붙어 있었나?”

남편은 키득댔지만, 윤진은 웃지 않았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전자레인지에서 종료음이 울렸다. 윤진은 접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무슨 일 있어? 왜 일찍 돌아온 거야?”
“내가 일찍 온 게 싫어?”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어.”

남편은 젓가락으로 김치전을 조금 더 뜯어 먹고 기지개를 켰다. 샤워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등을 윤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의 얼굴에 불길한 징조가 있었던가. 윤진은 샤워기 물소리를 들으며, 남편이 말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남편은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털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 누운 뒤 눈을 감았다. 아이들은 아빠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한쪽 다리를 걸쳤다. 마치 아빠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윤진은 조용히 남편의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남편의 상체가 들숨과 날숨에 따라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윤진은 남편이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남편의 등에 대고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

밤새 잠을 설친 윤진은 큰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유모차를 끌고 터덜터덜 106동 화단으로 걸었다. 휴대용 선풍기를 고속으로 돌려도 바람이 영 시원하게 불지 않았다. 아이가 낑낑대며 뒤척이는 통에 유모차가 평소보다 두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윤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오르막을 걷다가, 화단에 쪼그려 앉은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관사 아이들은 여자를 저승사자라고 불렀다. 여자는 꽃무늬 주름 바지와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발목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신은 채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윤진이 사는 106동 필로티 아래 화단을 살폈다. 머리에는 항상 검은색 망이 달린 모자를 써서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한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쓰쓰가무시병을 예방하기 위한 것 같았다. 여자는 쥐를 찾는다고 했다. 온종일 잡초가 무성하고 이끼가 낀 흙 위에 쭈그리고 앉아, 구멍처럼 보이는 곳은 모조리 모종삽으로 파헤쳤다. 화단에는 눈에 띌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렸다. 크기는 들쑥날쑥했지만, 지름이 대충 20센티미터 정도였다.

단지에서 놀던 아이들은 여자의 등 뒤에서 귀신이라고 외친 뒤 도망쳤다. 엄마들은 아이를 잡아다가 여자에게 사과시키고,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관사 여자들이 여자를 공손하게 대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석 달 전 이사 온 여자가 영관급 관사 꼭대기 층, 대령들에게만 배정되는 집에서 산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 아니, 사모가 찾는 게 진짜 쥐예요?” 한번은 선이 물었다.
“쥐가 없는 데가 어디 있어? 우리가 다 떠나면 마지막엔 쥐만 남을걸?”

선의 말에 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쥐가 있다고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다 떠난다는 오의 말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일 년에도 몇 번씩 근무지를 이동하는 게 해군이었다. 조만간 또 한 번의 정기 이동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가 되면 오와 선을 비롯한 관사 여자들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이런 쥐라는 말이죠?”

선이 오에게 휴대전화로 검색한 사진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오물을 잔뜩 뒤집어써서 털이 몸에 딱 달라붙은 쥐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오와 관사 여자들은 약속한 듯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이. 사모가 윤진을 불러 세웠다. 윤진은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사모가 잡초를 꾹꾹 다져 밟으며 윤진에게 다가왔다. 윤진은 행여 무례해 보일까 봐 한 번 더 묵례했다. 막상 말을 섞으려니 두려웠다. 사모가 쓴 검은 망사는 너무 촘촘한 나머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목구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윤진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반소매, 쇼트 팬츠, 슬리퍼 차림의 윤진은 완전무장한 사모 앞에서 발가벗은 기분이 되었다.
“이 동에 살아?”

사모가 윤진의 귀에 입을 바싹 붙인 채, 106동 쪽으로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네… 사, 모님.”
“사모님 소리는 빼고.”

사모의 소리는 날카로웠다. 흡사 칼로 종이를 벨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목소리에 공기가 많이 섞여서 말할 때마다 귓전에 휙,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자기는 내가 뭘 하는 줄 알아?”
“쥐를 잡고 계신다고.”
“누가 그래?”
“여기 선배님들이요.”
“여편네들, 하여간.”

사모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자, 얼굴을 가린 망사가 풀썩거렸다. 윤진은 유모차 바퀴를 앞으로 조금씩 전진시키며, 언제든 사모에게서 벗어날 태세를 갖추었다.
“쥐를 잡는 거 아니셨어요? 하긴 멀쩡한 아파트에 쥐가 있을 리가.”
“있지. 쥐는 어디에나 있지.”

사모가 갑자기 망사를 들어 올렸다. 아이가 몸을 크게 들썩이자, 유모차 손잡이가 가슴팍을 쳤다. 숨이 턱 막혔다. 검은 망사 안에 그보다 얇은 망사가 한 겹 더 있었다. 망사를 한 꺼풀 벗겨도 사모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사모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윤진은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한곳에 고정하지 못한 채,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모차를 밀고 당겼다.
“몇 층에 살아?”
“4층요. 사모님.”
“쓰읍, 사모님 소리 좀!”

윤진은 사모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하마터면 집 호수까지 줄줄 말할 뻔했다. 집 호수를 알려주면 물을 얻어 마시려고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을 누를 수도 있었다. 관사 여자들은 마늘 한 쪽이 없어도 옆집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4층이라. 충분하겠어.”
“뭐가요?”
“내가 찾아봤는데, 힘 좋은 쥐는 하수구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다더라고.”
“21층까지요?”
“그렇지. 어떤 쥐는 이만해. 고양이만 하다고.”

사모가 제법 비장하게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 부위를 턱 움켜잡았다. 윤진은 선이 보여주었던, 오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털이 몸에 딱 붙은 시궁쥐 사진을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데 쥐를 직접 보신 적이 있어요?”
“아니.”

윤진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사모는 윤진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이자 망사가 펄럭거렸다.
“자기야. 최근에 민간 어선이 함정이랑 충돌해서 침몰했을 때 말이야. 몇 명이나 죽었을 것 같아?”
“네?”
“인명 피해는 없다고 발표했지?”

윤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이 동에 살았을 때도 비슷한 사고가 생겼어. 
 남편이 대위 시절이었지. 해무가 심하거나, 태풍이 오면 그런 사고가 종종 생겨.”

아이는 몸을 반쯤 비튼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땀에 젖은 아이의 앞머리가 휴대용 선풍기 바람에 흩날렸다.
“전원 구출. 그때도 그렇게 말했어. 
 여기선 그 정도의 흠은 아무렇지 않게 묻혀. 대의와 위신이 중요한 곳이지.”

사모가 말하는 ‘최근의 사고’란 아무래도 남편이 탄 함정과 관련된 것 같았다. 그때도 태풍이 북상한다는 예보가 있었다. 남편은 걱정하는 윤진에게 작은 사고가 생겼지만, 안전하게 피항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
“네?”
“죽은 사람은 항상 있었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사모가 윤진의 귀에 얼굴을 바싹 끌어다 대고 말했다. 또다시 휙. 귓전으로 바람이 스쳤다. 사모는 환영처럼 보였다. 정말 저승사자나 귀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윤진은 고개를 바닥에 파묻고 빠른 걸음으로 유모차를 끌기 시작했다. 사모는 달아나는 윤진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하원한 윤진은 여느 때처럼 분수대로 향했다. 첫째 아이는 친구들과 킥보드를 타고 분수대 주위를 돌았다. 관사 여자들은 이미 여기저기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윤진은 오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여자들은 윤진이 나타나자, 눈을 내리깔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윤진은 남편이 복귀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신이 묻기 전에는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을 분위기였다. 부대에 사건, 사고가 생길 때마다 반복되는 분위기를 윤진이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떠나면 대화는 다시 활기를 찾을 게 분명했다.

무리는 주야장천 유치원 정보만 주고받았다. 이미 다 아는 정보를 반복해서 묻고 답했다. 윤진은 몸이 좋지 않아 집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불편한 공기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몸조심해.”

오가 윤진의 팔을 느슨하게 잡았다가 놓았다. 윤진은 그들을 뒤로하고, 첫째 아이를 찾아 나섰다.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고 동과 동 사이를 빠른 속도로 오갔다. 목이 터지라 아이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윤진의 유모차 손잡이를 잡았다. 선이었다.
“저기 선배님. 대위님께서 아무 말 안 하셨어요?”
“아니. 아무 말도. 자기 남편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복귀한다는 전화만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뭐가?”
“우리 남편만 일찍 복귀한 줄 알고. 사고라도 친 건가 걱정했거든요.”

첫째 아이가 킥보드를 몰고 윤진의 옆을 쌩, 지나쳤다. 윤진이 아이 뒤를 쫓으려는 순간, 선이 다시 유모차를 붙들었다. 선은 윤진의 귀에 입술을 바싹대고 속삭였다.
“선배님.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혹시 집에 쥐가 들어온 적이 있어요?”
“쥐?” 선이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뜨거운 입김이 윤진의 귀에 닿았다.
“네. 밤에 싱크대 밑에서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찍찍 소리도 나고. 아무래도 쥐인 것 같아요. 잠을 못 자겠어요. 너무 끔찍해요.”

선은 울상을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희고 빳빳한 명함이었다.
“그 여자가 줬어요. 106동 화단에 있는 사모. 
 이 사람이 동네 땅속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면서.”

윤진은 선이 꺼낸 명함을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쥐 사냥꾼’이라는 상호와 이름 세 글자, 휴대전화, 쥐 및 바퀴벌레, 꼽등이 박멸이라는 단어가 흰 명함 종이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왜 이곳 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요?”

선이 윤진에게 건넨 명함을 다시 제 손으로 가져오며 물었다.
“뭘?”
“관사에 쥐가 돌아다닌다는 말.”
“없으니까 그렇겠지.”
“정말 그럴까요?”

선이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욱여넣고, 분수대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윤진은 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106동 화단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화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모도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다음 날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원시킨 뒤, 윤진은 사모를 만나기 위해 부러 화단 앞에 유모차를 대고 멈춰 섰다. 사모는 건물 벽에 바싹 붙어서 구멍을 파는 중이었다. 윤진이 먼저 사모를 불렀다. 그녀는 윤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선배가 이 자리에 살았어.”
“선배요?”
“함장 와이프 말이야. 그때는 이게 5층짜리 건물이었어.”

사모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그마한 구멍을 살살 파헤치더니, 주머니에서 쥐약을 꺼내어 구멍에 쑤셔 넣었다. 윤진은 얼떨결에 화단에 들어가서 사모 옆에 앉았다. 사모가 얼른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쥐똥 밟으면 병 걸릴 위험이 있으니 슬리퍼 차림으로는 절대 화단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윤진은 화들짝 놀라 화단 밖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때 어선에 탄 사람 중에서 실종된 사람이 있었어. 
 한두 명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모두 신원 미상이었어. 
 선배의 남편은 실종자의 존재를 윗선에 보고하겠다고 했지. 
 선배는 남편의 말을 믿고 관사 여자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사모는 눈으로 계속 화단을 살폈다.
“우리 남편은 끝까지 실종자가 없다고 주장하더라. 그래서 살아남았지. 
 그때 함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탄 줄 알아? 그런데 하나같이 아니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음모래. 함장이랑 그 부인이 헛소리한다는 거지.”
“그래서요?”
“모두가 그 선배를 피했어.”

그나마 사모만 의리 때문에 선배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러나 관사 여자들을 만날 때만큼은 선배를 흉보는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선배의 남편이 옷을 벗었어. 나머지는 버텼지. 
 다들 다른 부대로 발령 났어. 
 그 뒤로 이 좁은 부대에서 용케도 다시 만나지 못했어. 나는 거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
“무슨 답요?”
“사고의 진위 말이야. 
 이렇게 인사 이동이 많은 동네인데 그 사람들은 다시 같은 관사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 
 그건 소문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의지 아니겠어? 
 여기서는 말이야. 눈에 보이는 건 답이 아니야.”

그날 밤, 윤진은 밥을 먹는 남편에게 쥐가 있다는 소문에 대해 말했다. 쥐를 찾는 사모와 그녀가 파 놓은 구멍, 그리고 선의 집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남편은 윤진의 말에 시큰둥했다. 너무 예민한 거라고 대꾸하고는, 소파에 누워 야구 중계를 틀었다. 동요 영상을 보고 있던 아이들이 달려들어 리모컨을 빼앗으려 하자, 남편은 두 아이를 양손으로 휙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웠다. 첫째 아이는 남편의 발에 팔다리를 휘감고 몸을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었다. 윤진은 더욱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는 게 없어?”
“뭘?”

윤진이 묻고 싶었던 건 그가 평소보다 일찍 귀항하게 된 이유였다. 납득할 만한 대답을 원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에서는 엉뚱한 말만 튀어나왔다.
“쥐, 쥐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윤진은 문득 남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은 부대나 배 위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아내가 그런 일까지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윤진은 남편이 진급하는 과정에서 어떤 불화나 갈등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남편이 말하지 않는 건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몰라도 무탈하게 지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관사 여자들이 자신을 향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분명 좋지 않은 신호였다. 무엇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윤진은 질문의 답이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까 봐 겁이 났다.

설거지를 마친 윤진은 뒤 베란다로 향했다. 열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문턱이 높아서 화단은커녕 뒷산 등성이만 보였다. 해가 진 뒷산은 음습하고 위협적이었다. 윤진은 어린이용 보조 스툴을 밟고 올라섰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플라스틱 스툴이 곧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뒤 베란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4층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지만, 떨어진다고 상상하면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아파트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와 화단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사모가 파 놓은 구멍 때문에 화단은 꼭 꺼져가는 비누 거품 같았다.
“뭐 해?”
“여기서 맨날 쥐구멍을 파. 그 사모가.”

남편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키가 큰 남편은 보조 스툴이 필요 없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구멍 뚫린 화단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윤진이었다.
“저렇게 구멍을 들쑤셔서 약을 뿌리면 쥐가 정말 박멸되는 걸까.”
“쥐는 절대 없어지지 않아. 구멍에 불이라도 지르면 모를까.”
“오 선배도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보다 쥐가 여기에 더 오래 살 거라고. 난 한 번도 쥐를 본 적이 없어.”
“쥐는 밤에만 다니니까.”  윤진이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봤다.
“쥐가 낮에 기어 나오는 건 죽을 때 딱 한 번뿐이야.”

컴컴한 뒷산에서 바람이 휙 불어왔다. 습기를 잔뜩 먹은 바람은 기분 나쁘게 윤진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바람을 피하려고 눈을 찡그렸다. 창문을 닫은 남편은 뒤에서 윤진의 허리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장난임을 알면서도 윤진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남편은 당황해서 윤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윤진이 예민하게 군다고 입을 삐쭉거렸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다! 첫째 아이가 소리쳤고, 둘째 아이가 부리나케 현관문 쪽으로 기어갔다. 인터폰 화면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야?”
“아무도.”

택배, 택배를 외치며 아빠의 다리에 매달린 첫째 아이는 실망해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난번에도 이런 식이었어. 초인종만 울리고 사람은 없고.”
“이런 장난은 흔해.”
“그렇지만 발소리도 안 들리는 건 이상해.”
“쓸데없는 걱정이야.”

남편은 다시 소파에 몸을 묻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아이들이 남편의 등과 다리에 엉겨 붙어 몸을 비틀었지만, 이번에는 남편도 채널을 양보하지 않았다. 윤진은 부엌에 서서 한데 뭉쳐 있는 셋을 바라보았다. 발바닥에서 여전히 설탕 가루가 묻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파병 신청했어. 아랍에미리트 부대로. 소말리아나 레바논보다는 편할지도 몰라.”

남편이 야구 중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언제?”
“한 달 뒤.”
“그렇게 갑자기?”
“천운이야.”

남편이 말하는 천운이란 대체 무엇일까.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말일까, 아니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뜻일까. 윤진은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자신이 낯설었다. 한 번도 남편이 가져온 행운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대위는?”

김 대위는 선의 남편이었다. 남편은 갑자기 불쾌한 듯 인상을 구겼다.
“당신은 신경 쓰지 마. 그 친구 와이프랑 친한 건 알겠는데, 이동하면 다시 안 만날 사람이야.”
“당신도 김 대위랑 친했잖아?”
“맞아. 좋은 사람이지.”

남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뒤 집 밖으로 나갔다. 윤진은 보조 스툴 위에 서서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조 스툴이 윤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윤진은 부서진 스툴 조각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이제 건물 아래를 볼 수 없었다. 윤진의 눈에 보이는 건 어둠이 내려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 울창한 뒷산의 형체뿐이었다. 윤진은 두려웠다. 아무것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
선이 보이지 않은 건 주말이 지난 뒤부터였다. 주말 동안 윤진과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워터파크에 다녀왔다. 남편이 먼저 여행을 제안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아빠와 노는 모습을 보면서, 윤진은 관사 여자들의 찝찝한 시선과 남편의 의문스러운 복귀에 대해 잠시 잊었다. 정말 모든 게 기우인지도 몰랐다. 오로부터 선이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월요일 오후 분수대에서는 선의 이사가 화제였다. 선이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나갔다는 것이다. 관사 여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린이집 퇴소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요일 밤 선의 집에 사다리차가 세워진 걸 보았다는 여자도 있었다. 윤진은 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가 꺼졌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윤진의 다리에는 어김없이 둘째 아이가 달라붙었다. 아이를 떼어내려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둔탁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윤진의 엉덩이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윤진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싱크대 수납장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끽, 찍, 삑 소리가 작고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쥐가 틀림없었다. 쥐가 하수구를 타고 고층까지 올라간다는 사모의 말이 떠올랐다. 구멍 뚫린 부침 가루 봉지도 생각났다. 둘째가 물어뜯은 줄 알았는데, 실은 쥐의 소행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서랍장에는 아동 보호용 잠금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아이가 싱크대를 열어 물건을 뒤지는 통에 임시로 붙여둔 것이었다. 잠금장치는 헐거운 상태로 위태롭게 문에 매달려 있었다. 윤진은 잠금장치가 버텨주길 바랐다. 곧 부서질지 모르는 플라스틱 쪼가리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하얀 아파트의 외벽만 보였다. 윤진은 현관으로 뛰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없으면 어디에든 신고할 작정이었다.

뜻밖에도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선이었다. 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진은 반가움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선은 한 뼘가량 열린 문틈으로 발을 집어넣은 뒤 교묘하게 집 안으로 몸을 밀고 들어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제대하기로 했어요.”
“갑자기?”
“버티는 건 힘든데,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네요.”

선이 입꼬리 한쪽을 쓱 올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선은 무언가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결연해 보였다. 윤진은 선에게서 들을 말이 자기 삶에 위협을 가하리란 걸 직감했다.
“전원 구출이라고 보고한 건 대위님이지 우리 남편이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남편은 분명 구출되지 못한 선원이 더 있다고 했어요.”

군함이 어선의 후미와 부딪힌 날에는 태풍이 예보되었다. 실제로도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높았다고 남편은 말했다. 본부에서는 회항 명령이 떨어졌다. 어선에 불이 붙은 걸 확인했을 때는 이미 회항하려고 배의 방향을 돌렸을 즈음이었다. 윤진이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선의 말은 달랐다. 태풍은 징조만 풍기고 경로를 바꾸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군함은 사고 지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구출한 선원은 열세 명. 인명 피해는 없다고 보고되었다. 그런데 선의 말에 의하면 배에 타고 있던 선원은 열네 명이었다. 한 명은 실종 상태라는 뜻이었다. 누구도 더는 그 사람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아마도 회항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태풍 예보도 무시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함정에는 수십 명의 수병이 타고 있었다. 군인에게 중요한 덕목은 정의감과 애국심이 아니었다. 명령을 따르고 임무를 완수하며 불의의 변수로부터 동료를 지키는 일. 남편은 살아남는 군인의 조건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어쨌든 살아남았다. 윤진은 남편을 이해하고, 그의 결정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누구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자신의 가족은 그 덕분에 관사에 남았다.
“제 남편은 스스로 군복을 벗었어요. 괴로워했어요. 먹지도 자지도 못할 만큼.”

그때 부엌 서랍장 아래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엌으로 향한 선은 싱크대 하단에 귀를 대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선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어머. 이 집에도 쥐가 있잖아.”

선은 바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쥐 사냥꾼’ 명함이었다. 선은 명함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필요하실 거예요.”

선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무겁고 뭉근한 바람이 불어와 문을 세게 닫았다. 군화 한 짝을 손에 끼우고 놀던 둘째 아이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같았다. 선이 다녀간 뒤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윤진은 여전히 정신이 혼미했다. 윤진이 정신을 차린 건 어디선가 풍겨오는 타는 냄새 때문이었다. 부엌과 거실에서 타는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윤진은 냄새의 근원을 찾아 부엌으로 갔다. 가스 밸브는 잠겨 있었다. 냄새는 뒤 베란다 쪽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윤진은 뒤 베란다로 가서, 열린 창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바닥으로부터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해가 져 어두컴컴한 뒷산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윤진은 팔 힘만으로 창틀에 매달려 간신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단에 있는 구멍마다 불기둥이 솟구치는 중이었다. 불은 아파트에 옮겨붙기 직전이었다. 윤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둘째를 둘러업은 팔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아이들은 불기둥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무엇의 흔적인지 알 수 없는 재가 사방으로 튀었다. 큰아이가 한 손으로 코를 쥐었다. 불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탓에 윤진은 얼굴을 감싸고 싶었다. 둘째가 윤진의 등에 더 깊숙이 얼굴을 파묻고 기침을 쏟아냈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화단 주위에 모여 웅성거렸다. 오와 다른 관사 여자들도 불길 반대편에 모여 있었다. 쥐를 찾는 사모와 선은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산 쪽에서 관사를 향해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잔뜩 몸을 움츠린 사람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휘청거렸다. 윤진은 점점 거세지는 불기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방차는 소식이 없었다. 남자들이 급한 대로 구멍에 소화기를 쏘았지만, 불길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윤진은 구멍에서 쥐가 한 마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해졌다. 쥐는 밤이 되어야 움직인다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윤진은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쥐의 행방을 생각했다. <끝>

 

글 - 전지영
출처 - 조선일보 2023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t-23.01.11.  230112-15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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