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스위트 홈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23년) - 최진영 외 /문학 사상 2023. 02. 10.
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평소에는 나무판자로 우물 위를 덮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판자를 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
마당은 흙바닥. 지붕은 검은 기와.
대문은 없었고 외양간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별채를 사이에 두고 마당과 골목을 구분했다.
환하고 건조한 날씨가 오래 지속되는 계절에도 우물의 돌덩이에는 초록색 이끼가 피어 있었다.
그리고 노란 민들레. 댓돌과 흙바닥 틈새에,
벽과 벽의 모서리에 뿌리를 내렸던 별 같은 꽃.
비가 그친 어느 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났다.
당시 두어 살이던 내 손바닥보다 작고 깨끗해 보이던 연두색 생명체.
나는 손을 뻗었고 청개구리는 폴짝폴짝 뛰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왜 울었을까? 그때 내가 운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잊어서 영영 모를 것이 되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고.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청개구리를 기억한다.
이유를 망각한 나의 울음을 기억한다.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왜 남아 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하여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청개구리가 나를 선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집을 떠났다.
그 집에 새로 들어간 사람들은 지붕과 벽을 허물고 벽돌집을 지었다.
우물을 메우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대문을 만들었다.
옛집은 완전히 사라졌다.
몇 년 전, 엄마와 함께 그 집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만큼 낡은 벽돌집을 가리키며
나는 기와집과 우물에 대한 기억을 불쑥 말했고 엄마는 놀라서 대답했다.
그래, 우물을 중앙에 둔 기억 자 형태의 집이 여기 있었어.
하지만 네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나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억은 기억.
말이 안 되는 기억이 적지 않은 데다 이제 나는 시간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므로 말이 안 되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의 눈이 있어 미래를 보고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인생이 한 방향으로만, 그러니까 책장을 넘기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현재에서 미래로만 흐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시간은 인간의 언어. 측정 도구. 약속. 인간이 발명하고 이름 붙인 것.
그러므로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처럼.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과거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을 현재에 그대로 겪을 때가 있으며
미래의 일을 짐작하여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느냐는 대꾸를 듣는 경험들.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나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기억 속에는 이런 집도 있다.
작은 방 하나. 창문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창, 창틀은 갈색.
한쪽 벽을 채운 자개장.
민트 색깔의 낡은 나무 문. 청동색의 둥그런 손잡이. 방문을 열면 욕실 겸 주방이 나온다.
벽도 바닥도 잿빛 시멘트. 모퉁이에 작은 싱크대.
양철 문의 오른쪽에 수도꼭지가 있고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거나 머리를 감기에 알맞은 개수대가 있다.
수챗구멍은 플라스틱 채반으로 막아 두었다.
양철 문 위쪽에는 불투명하고 올록볼록한 유리창이 달려 있다.
유리창 너머는 환하다. 문을 열면 빛이 파도처럼 넘쳐 올 듯 밝다.
나는 그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거나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다.
그 집에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집을 기억한다.
물에 젖은 시멘트 냄새와 빛바랜 벽지의 거칠한 촉감을 안다.
꿈인가, 꿈에서 보았나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놀라며 대답했다.
엄마가 신혼일 때 그런 집에서 잠시 산 적이 있다고.
그러므로 네가 그 집을 기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그즈음 엄마는 나에 관하여 '말이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때로 나는 그 말을 이해했고 어느 때는 상처받았으나 (사랑하게 때문에)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라고 소용없는 사과를 건넸다.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결정해.
내 삶이고 내 죽음이야.
※ 이 글은 < 홈 스위트 홈 >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23.03.18. 20210305-170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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